인간은 불완전함과 미완성이기 때문에 다른 한쪽의 도움과 협력에 의해 매사가 성립한다. 타인으로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가 배우자와의 만남이다. 거리감이 없어질수록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배려심과 존중성에 항상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한 결과로 인해 당사자는 물론 주위의 사람들까지 불행해진 모습이 세상에는 너무나 비일비재함을 가끔 목격하기도 한다. 상호간에 인격을 존중하며 살아야 자녀들에게도 훌륭한 정신적 교육이 될 수 있으며 성장하는데 있어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표면상 보여지는 모습과 형상보다는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상대방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라야 한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운명 이었다고 확신하고 가치있는 행동을 할 때만이 기쁨과 축복이 충만하리라 믿는다.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처럼 일생동안 서로 사랑하며 희생과 봉사의 본보기로 보여준 부부들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다고 여겨진다. 만남 그 자체를 통해서 상대방으로 부터 그 어떠한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계산이 앞서는 불순한 동기가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감정의 발로라고 생각하고 싶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불행하게도 영악스런 세상이 우리들을 맴돌고 있는 여파속에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오늘날의 현상과 모습들을 목격할 때 마다 씁쓸한 마음이 출렁거린다. 인간적인 순수한 정신적 선택이 아니라 향후 살아가기 위한 철두철미한 타산과 조건의 결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상대방에 의해 자신이 얻을수 있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세밀하게 추구한다. 먼저 자신에게 존재하는 능력의 여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방을 선택하는 이상적인 측면 만 강조하는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추태처럼 비추어온다. 결혼 그 자체가 인격체인 사람과의 만남이 아니라 상호간의 외형적 조건과의 결합이 앞서는 경향이 농후한 계약같기도 하다. 그 결과 살아가는 도중에 조건의 상실에 의해 필요 가치가 없어지면 망설이지 않고 둥지를 떠나는 철새 처럼 보인다. 그러한 인간들의 모습을 접할 때 마다 냉혹한 현실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저미어 온다. 부부는 운명의 공동체이다.상호간에 애정과 사랑으로 점철되어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두 사람 사이의 중심이어야 한다. 관심과 책임감에 충실해야 하며 어떠한 고난과 수난이 휘몰아쳐도 힘을 모으고 합해서 극복해 나가는 신념이 있어야 하며 그 가운데 가족의 안정과 평화스러운 삶이 보장되리라고 믿는다. 부부간에 물심양면으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준 덕분에 위대한 과업을 완성시킨 그러한 세상사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은 자신들의 생활공간에서 가장 가까운 주위의 가정들이다. 물질 만능주의 사회구조와 생활 모습의 변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점점 그 소중성을 잃어가고 있음이 차디찬 현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경향이 날로 점점 심각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물질적으로 빈곤한 시절과 시대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지기를 바라던 외침과 함성의 뒤안길에 구축된 오늘날의 이웃들이 있다. 현실적인 실상을 바라볼 때 참담한 심정이 앞을 가릴 뿐이다.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며 무관심 속에 얼어 붙은 인간들의 차가운 형상들이 행복한 이웃의 실체라고 어느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가정에서 훌륭한 인격체의 교육이 잘 이루어진 인간의 됨됨이가 바로 이웃과 연결될 때 사람다운 세상이 열려갈 것이다. 예의범절을 실천하고 사회 공중도덕을 준수하는 일차적 차원이 바로 이웃에서 부터라고 생각한다. 이웃이 무관심속에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따사로운 인정이 이웃간에 오고가고 상부상조 하는 활력소가 넘쳐흐를 때 명랑하고 건전한 사회가 이루어진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마음의 한 구석에는 이웃을 경원시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사회를 형성하는 출발점인 이웃과의 만남에 대해서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들의 생활에 충실한 인간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믿는다. 건전한 사회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건전한 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형태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사회적 메커니즘에 의해 좌우되고 영향을 받아가며 살아간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밖의 모든 분야에 이르기 까지 상호간에 부문끼리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동차의 바퀴처럼 제각기 올바르게 기능을 발휘해야 문제없이 앞으로 전진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더욱 개개인의 정상적인 사고 방식과 행동이 중요한 의미와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와 국가의 흥망성쇠는 개개인의 올바른 자질과 공중질서 및 미래를 내다보는 올바른 가치관과 그에 따른 행동등이 수반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적 혼란 속에서는 개인적인 자유와 행복이 보장받지 못함을 우리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뼈저리게 절감해온 바가 있다. 순리가 지배하고 진실과 정직한 사람이 우대받는 사회일수록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이며 그러한 사회는 각자의 구성원의 노력과 사회적 제반 시스템에 의해 형성된다. 개인과 사회적 행복은 비례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항상 힘을 모아 건강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 정열을 불태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사회와의 만남을 위한 존재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인류라고 한다. 사회, 민족, 국가를 초월한 최대의 지구 집단체이다. 광의적으로 보면 모든 인류가 평화적으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종교 그리고 이념, 사상, 자국들만의 이권의 추구 등 수많은 이유들에 의한 대립과 갈등의 여파로 전쟁을 일으켜 가며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야기시킨 인류적 범죄야말로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동물적인 근성이 인류의 탄생으로 부터 헤아릴 수 없이 역사적 교훈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개인이든 국가든 이성적인 판단의 기능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상상하기 싫은 인간적 모순에 대해 대오각성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만과 욕구에 의한 결과로써 전 인류를 파멸 시킬 수 있는 핵무장으로 서로가 대립해 있는 위험천만하고 불행한 상태에 까지 이르고 말았다.
창조와 파괴의 선상에서 상호 대립하며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류를 속박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평화를 가장하고 준비해 온 대량의 살상 무기들의 실태와 실상을 헤아려 보면 인간적 모순과 오류를 갈파할 수 있다. 전체를 파괴하고 파멸시키는 그 어떤 이론과 논리도 인류의 끊임 없는 항해 앞에 성립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건전하고 평화스런 인류의 존재를 위해서 지금까지 잘못 행해진 인간의 오류투성이 전략들 앞에 깊게 반성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인류 역사의 창조가 시급하다. 가치있는 만남을 위해서는 상호간의 인격을 존중하며 상대방에게 한 치라도 결례가 되지 않도록 자아의 세계를 하염없이 고차원의 세계로 승화시켜 이상적인 인간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는 시대를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교통수단과 정보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 시절에 사셨던 옛 선인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탕으로 어렵게 맺어진 인간관계에 대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굽어 살피는 헤아림과 지켜야 할 예의범절들이 만남의 전제가 되었던 듯싶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정신적으로 오염된 사회적 풍류처럼 타아의 입장을 아랑곳 하지않고 자기본위로 쉽게 생각하고 쉽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고 방식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길 염원할 뿐이다. 무한대의 우주의 공간에 비추어 보면 한낱 찰나적 존재인 인생이기에 他我와의 우연적, 필연적으로 초래된 창조적 인연을 통해서 보다 성숙된 행복을 누리기를 누구나 염원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기대라고 생각한다.
인연이라고 하는 사다리를 통해 광활한 범위에 이르기 까지 타인의 세계와 연결될 때마다 희로애락의 선상에서 절감했던 경험등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적 성장이나 진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탄생으로부터 인생의 최후 순간 까지 타인과의 아무런 교류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지 모른다.
자신의 영혼이 원하는 세계와의 인연의 결여로 말미암아 군중 속의 고독을 절실하게 절감할 지 라도 체념하지 말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창조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 지 모른다. 폐쇄된 마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쓰디쓴 소외감의 늪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솔선해서 창조적 만남의 세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상호간의 행복의 샘터는 그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연과 만남을 철저하게 중요시하는 세상에는 신뢰와 신용이란 씨앗이 거듭나며 더불어 살 수 있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개인, 이웃, 사회, 인류가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리라 믿는다. 건전한 만남은 개인과 사회를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며 대인관계 에 있어서 보다 폭넓게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진실과 선에 입각한 풍부한 경험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만큼 지혜롭게 제반 사항에 잘 대처하며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만사에 대해 경험한다 는 것은 불가능하다. 간접적인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인간관계를 통해서 모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론일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존경 받는 인격자의 뒷모습에는 기적같은 만남이 존재했다. 훌륭한 사람, 학문, 진리, 철학, 과학기술, 정보, 사려, 그리고 시간 등 수많은 분야에서의 만남을 통해 범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열정을 불태우는 심성과 자태로 인한 결과이다.
그 중에서도 시간과의 만남은 유일하게 한정적이고 제한적 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과의 만남을 현저하게 기뻐하거나 두드러지게 애착심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당연지사로 받아들인 모습이 인간의 미약한 부분인 지 모른다. 시간은 형상과 형체가 없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우리들에게 다가와서 무의식속에 스쳐지나 가지 만 최종적으로 생명의 한계를 정하는 본질임을 중요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시간을 소홀히 한 결과로 인해 뼈저린 후회로 점철된 삶을 엮어가는 사람들을 흔하게 접한다. 육체적으로 건강할 때 공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시간이 불치의 병에 사로잡혀 최후 순간의 날을 대기할 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촌음의 귀중성 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것 역시 인간이기도 하다. 훌륭한 목적의 실현을 위해 시간과의 만남을 지혜롭게 활용한 사람이야말로 시간의 참 뜻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맹목적으로 떠내려가는 삶이 아니라 그 흐름을 자신이 철저하게 관리하고 활용하는 뜻 깊은 인간의 모습이 보다 가치가 있어 보인다. 시간에 대해 수동적이 아니라 다스리는 지혜속에 일생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단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거늘 그 시간들과의 만남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깊은 의미로 새겨지기를 염원한다. 자아의 완성을 향해서 정열적으로 생애의 삶을 영위하는 분들을 인격자로 믿는다. 그들의 삶과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범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눈과 귀와 느낌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올바르고 풍요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도 만남이라고 하는 행운의 덕인 것이다.
이 지구상이 인격자들로 가득 채워져 다툼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하는 것은 인간들의 궁극적인 사명이어야 한다. 삼라만상의 은혜와 은덕으로 채색된 지구라는 혹성에 존재하는 인간은 수많은 만남을 체험한다. 그런 흔적들이 인류의 발전과 진화를 초래함과 동시에 영원한 번영을 위한 초석이 되기를 염원한다. 공동체의 시작인 만남이란 미덕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공영의 정신이며 자아와 타아의 영혼간에 이해하려 하는 배려정신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기다리는 수동의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향하는 능동적인 정신이며 상호간에 있어서 성실하게 대응하는 겸허한 자세와 솔직한 심성에서 비롯 되어야 한다.
심성의 저변에 감사의 마음의 향기가 수반되지 않는 자는 만남이란 열쇠를 추구할 자격이 없다. 우리 인생의 거룩한 정신적 흔적을 후세에 찬란하게 빛나는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서 찰나의 만남들 앞에 보다 진화된 성실성과 신뢰가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권종면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