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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입법계품 강설 (무비 스님)
1. 서분(序分)
(2) 보살대중(菩薩大衆)
④ 보살의 덕을 열 가지로 찬탄하다
此諸菩薩이 皆悉成就普賢行願이라 境界無礙하니 普徧一切諸佛刹故며 現身無量하니 親近一切諸如來故며 淨眼無障하니 見一切佛神變事故며 至處無限하니 一切如來의 成正覺所에 恒普詣故며 光明無際하니 以智慧光으로 普照一切實法海故며 說法無盡하니 淸淨辯才가 無邊際劫에 無窮盡故며 等虛空界하니 智慧所行이 悉淸淨故며 無所依止하니 隨衆生心하야 現色身故며 除滅癡翳하니 了衆生界가 無衆生故며 等虛空智하니 以大光網으로 照法界故니라
이 보살들이 다 보현의 행과 원을 성취하였는지라, 경계가 걸림 없으니, 모든 세계에 두루 하기 때문이니라. 몸을 나타냄이 한량없으니, 모든 여래에게 친근하기 때문이니라. 청정한 눈이 장애가 없으니, 모든 부처님의 신통 변화하는 일을 보기 때문이니라. 이르는 곳이 제한이 없으니, 모든 여래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곳에 항상 나아가기 때문이니라. 광명이 끝이 없으니, 지혜의 빛으로 모든 실상의 법 바다를 두루 비추기 때문이니라. 법문을 말함이 다함이 없으니, 청정한 변재가 끝이 없는 겁에 다함이 없기 때문이니라. 허공계와 같으니, 지혜의 행하는 바가 다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의지하는 데가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육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니라. 어리석은 눈병을 소멸하였으니, 중생계에 중생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니라. 허공과 같은 지혜니, 큰 광명 그물로 법계를 비추기 때문이니라.
『화엄경』에서는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고 언제나 열 가지로 웅장하게 표현을 한다. 그래서『화엄경』의 문장을 ‘장대 화엄’ 이라고 한다. 한 두 마디로 표현하여도 될 터인데 한 번 법을 폈다 하면 기본이 열 문장이다. 또 넝쿨처럼 얽혀 있다고 하여 ‘넝쿨 화엄’ 이라고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장이 꼬여 그 의미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장대처럼 쭉쭉 뻗어간 문장이 하나도 가닥을 잃지 않고 제 의미를 장엄하게 발하고 있는 게 『화엄경』문장의 특징이다. 지금부터 소개되는 여러 가지 덕이나 장엄도 모두 열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입법계품」이 설해지는 서다림의 급고독원에 모인 500명의 보살들은 모두 다 보현(普賢)의 행(行)과 원(願)을 성취하였다. 보현행원은 불교의 원(願)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여 원왕(願王)이라고 한다. 그래서 방대한『화엄경』의 맨 마지막 품이「보현행원품」으로 되어 있다. 『화엄경』의 결론이자, 불교의 결론은 바로 행원(行願)이라는 것이다. 원력(願力)을 갖고서 끝없이-끝없이 남을 위한 행(行)을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이다.
보현의 행과 원을 성취한 이 보살들이 지닌 덕(德)을 열 가지로 찬탄을 한다. 이 열 가지 덕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500명의 보살들은 무엇보다도 경계(境界)가 무애하다.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이것은 내 것, 저것은 네 것,” “나는 서울 사람, 너는 부산 사람.” 이라 하면서 편 가르기를 좋아한다마는 이 보살들은 모든 경계에 두루 하여 이편 저 편 나눌 게 없고, 또 모두에게 두루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이 보살들은 몸을 나티내는 데에 한량이 없다. 한꺼번에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가지고 그리하여 부처님 부처님 처소마다 찾아가서 한 분도 빠뜨리지 않고 다 친견할 수가 있다. 몸이 하나뿐이면 이게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몸을 나타내니까 법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달려가서 그 법을 구한다.
그리고 이 보살들은 청정(淸淨)한 눈이 장애가 없어 일체 부처님의 모든 신통 변화함을 본다. 부처님이 아무리 신통을 부려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아무리 하늘에 밝은 태양(太陽)이 떠 있어도 맹인(盲人)은 이 밝은 태양을 못 보듯이, 부처님의 신통 변화와 그 지혜 광명과 자비를 우리 중생들은 안목이 없어 보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 모인 보살들은 눈이 밝기에 모든 부처님의 신통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전부 다 본다.
또한 이 보살들은 생각만 가지면 어디라도 간다. 한계가 없이 어디라도 이르러 간다, “부처님이 성도했단다, 깨달았단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 당장 그 장소에 나타난다. 가고 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순식간에 가서 그 곳의 대중으로 참여할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항상 광명(光明)을 이야기 한다. 이 보살들의 덕에서도 광명이 빠질 리가 없다. 마음이 환하게 밝아진 곳에서는 빛뿐이다. 마음의 힘에서 발하는 광명이 제한이 없어 일체의 실다운 진리의 바다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이 보살들은 자기들만 깨달은 것이 아니고 얻은 법을 남에게 전하기도 잘 한다. 바다 속의 모래가 다함이 있고 하늘의 별들이 스러져가는 긴 세월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보살들의 훌륭한 변재(辯才)는 다함이 없다. 진리만을 얻었기에 끝없는 세월에도 다함이 없이 언제까지나 설법을 할 수가 있다.
이 보살들의 마음은 툭 트여서 아예 제한이 없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므로 무엇에다 비유하여 말할 것이 없다. “백두산만 하다, 수미산만 하다.” 라고 한정지어서 말할 게 없기 때문에 이 우주를 다 감싸고 있는 허공(虛空)만 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500명의 보살들은 어디에 의지해 있지를 않다. 여기서 ‘의지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보통 우리들이 ‘어디에 기댄다.’는 의미하고는 다르다. ‘어디에 매여 있지 않다, 어떤 일정한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이 늘 지송하는 관세음보살님은 중생의 마음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낸다. 『법화경』의「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일심으로 부르면 그 소리를 듣고서 중생의 필요에 따라 32응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되어 있다. 사람을 제도하기에 가장 적절한 모습이라면 수행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왕의 모습으로, 천진한 동남동녀의 모습으로도 널리 나타난다고 한다.
이렇게 너무나도 가까이서 우리들은 관세음보살님의 음덕을 받고 있기에 관세음보살을 자비의 화신이라 하고 또 우리들은 관세음보살을 향한 마음을 나타내고자 조각으로도 표현하고 그림으로도 그려 본다. 고려 시대의 ‘수월관음도’를 보면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어쩌면 저렇게도 신앙과 예술의 미를 잘 조화시킬 수가 있는가 하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들의 열렬한 믿음을 미(美)의 극치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이 형상으로써 관세음보살로 삼지는 않는다. 좀 더 마음을 열고 보면 관세음보살은 고정된 형상이 없기 때문에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32응신을 보일 수가 있다.
남편이 필요하면 남편의 모습으로, 아내가 필요하면 아내의 모습으로, 자식의 모습으로 제도될 사람에게는 자식의 모습으로, 도둑놈으로 제도될 사람은 도둑놈으로 나타나 가지고 모든 중생의 마음에 따르는 제도를 할 수가 있다. 어디에 매여 있지 않으면 모든 것으로 다 될 수 있다. 어떠한 모습으로 제도하였다가 다른 역할이 필요하면 얼른 또 그 모습으로 형상을 바꿀 수가 있게 된다.
여기 모인 보살 대중들도 다 이른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마음이 허공만큼 툭 트였으므로 모습도 어떤 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여러분들도 이것과 반대되는 경험을 많이 하였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예로, ‘나는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라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들의 눈에는 오직 그 한 사람만 비쳐오고, 또 귀에도 그 사람의 목소리만 분별이 될 것이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가까이 오면 공기마저 달라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이 그 한 사람에게 딱 고정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것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모든 것을 다 느낄 수 있게 되지마는 그 밖의 어떠한 사람도 더 이상 나의 눈과 귀에 들어올 리가 없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은 내 마음의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 물론 ‘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지’ 해서 아무하고나 분별없이 사련에 빠지라는 말은 아니다. ‘매인다, 매이지 않는다.’ 하는 것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기도 들어 보았다. 이 법회에 동참을 한 보살들의 마음은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이라도 다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보살들이 지닌 아홉 번째 경지에는 참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어리석은 눈병을 제멸하였으니 중생계에 중생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현상에 이끌리는 눈병을 완전히 치료하였으므로 이제는 눈에 잡히는 것이 더 이상 장애가 되지 못하고 온전히 우리들 마음의 진실과 인생의 실상만을 볼 수 있다. 어리석음에 대한 눈병을 치료하고 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부처님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계에 중생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어느 해에 몹시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마맥(馬麥)이라고 해서 말이나 먹을 정도의 험한 보리 음식을 드시게 되었다. 부처님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자 아난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아, 내가 덕이 모자라서 우리 부처님을 이렇게밖에 모시지 못하는구나. 거룩하신 부처님께서 이토록 험한 음식을 잡수시다니…’ 이렇게 생각을 하며 아난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깜짝 놀라시며 아난에게 물었다. “아난아, 공양을 하다 말고 갑자기 왜 우느냐?” “부처님이시여, 올 농사 형편이 워낙 좋지 않아서 부처님께서 너무나 험한 음식을 잡수시게 되니 마음이 그저 아플 따름입니다.”
그때 마침 부처님께서는 음식을 드시고 계시던 터라 남아 있던 음식을 내려놓으시며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디 내가 먹고 있는 이 보리밥을 한 번 먹어 보아라.” 하시면서 아난에게 자신이 잡수시던 보리밥을 한 번 씹어보기를 권하였다. 그래서 아난은 부처님께서 씹으시던 보리밥을 먹어 보았다. 아, 그랬더니 그 음식은 세상에서 둘도 없이 맛있는 음식이었다. 전혀 다른 맛이었다. 바로 이 이치이다.
부처님의 입장이 되면 맛이 없는 음식이라고는 없다. 부처님의 차원이 되면 음식 그 자체에 어떤 우열(優劣)의 분별이 생기지 않는다. ‘맛있다. 맛없다.’ 하는 차별(差別)심은 우리들의 수준에서 생긴 상대적인 분별심일 따름이다.
우리들에게는 우열의 순서가 정해져 있다. 그것도 불완전한 우리들의 안목으로 판단하고서는 거기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우리들의 수준이 중생이므로 그래서 우리 앞에 부처를 갖다 놓아도 우리는 부처로 보지 못하고 중생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의 눈에는 중생이 중생으로 보이지 않고 부처로만 보일 뿐이다. 이 이치로 이 보살들의 안목에는 중생계에 중생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부가 광산에서 금(金)을 잔뜩 캐냈다는 소리를 듣고 광산에 달려가도 우리들은 금을 찾아내지 못한다. 금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금광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잡철이 아무리 많이 섞여 있어도 잡철은 눈에 안비치고 금만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이치이다.
신도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 보면 생활 속에 그대로 이런 도리가 다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두 사러 갈 때에는 남들이 신은 구두만 눈에 들어오고, 옷 사러 갈 때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입은 옷만 눈에 띈다고 한다. 또 자기 자식이 고등학교 학생일 때에는 주위에 온통 고등학생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고, 대학생이 되면 대학생 밖에 보이지 않다가 사위나 며느리를 볼 나이가 되면 그 또래만 눈에 들어온다고 하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부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모두들 자신의 수준에서 사물을 받아들이고 파악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그러나 아난은 부처님께서 드시는 보리음식을 자기 수준에서 해석하였기 때문에 험한 음식이라고 하여 눈물을 흘렸던 것이었다. 물론 스승을 극진하게 모시고 위하는 태도는 그것대로 훌륭하고 감동을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렇게나 험하던 음식이라도 부처님의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이 다 산해진미로 인식되어 지는 것이다.
부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부처로, 보살의 안목에는 보살 내지는 부처로 보게 되니, 중생계에 가득 차있는 중생이지마는 중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중생으로 보려고 하여도 중생으로 볼 수 없다.
이러한 말들은 결국 우리들이 수행을 함으로써 나의 시각이, 나의 인격이 달라져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삼라만상이 통째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이르러 가야 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 보살들이 지닌 마지막 열 번째의 덕성은 이 분들의 지혜는 허공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큰 광명의 그물로 법계를 비춘다는 것이다. 너무나 치밀하게 경전에서 다 밝히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경전에서는 흔히 허공을 가져다가 비유를 많이 하고 있다. 평소 우리들은 허공이니까 아예 없다. 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분명히 있기는 있다. 없는 듯, 하면서도 분명히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물(網)이다.
옛날 서양의 지혜 있는 왕비도 자기 나라를 탐내는 이웃 나라 왕의 부당한 요구를 슬기롭게 넘기는 데에 이 그물을 사용하였다. “아름다운 왕비시여, 그대의 남편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입지도 벗지도 말고’ 또 ‘걷지도 타지도 말고’ 나에게 오시오.”
이 말을 들은 왕비는 며칠을 생각한 끝에 그물에다 벗은 옷을 감추고 말의 꼬리에 이 그물을 끌게 하여 이웃 나라 왕의 억지 요구를 슬기롭게 해결하였다. 옷이 아닌 그물에다 나신을 넣었으니 분명히 입은 것이 아니고 그러면서 또 그물로 몸을 감싸고 있으니 벗은 것도 아니다. 말이 끌고 갔으니 탄 것도 아니고 끌려갔으니 걸어간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노자(老子)도『도덕경(道德經)』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 하늘의 그물은 성글고 성긴 것 같지마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
그러하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그물은 그 코 간격도 허공만큼 한이 없어서 아무도 그 그물코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끔 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하늘의 그물을 잘 빠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도 종국에는 그 그물코에 ‘덜거덕’ 하고 걸리고 만다. 어느 정도까지는 남을 속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속일 수도 있지마는 언젠가는 들통이 나고 만다. 이러한 도리를 우리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 속에서도 많이 보았고, 주위에서도 많이 경험하고 있다.
우리들의 수행도 그러하다. 수행을 해가면 해갈수록 없는 듯, 하면서도 분명하게 있는 그물처럼, 눈에는 띄지 않지마는 분명히 닦아지는 게 있다. 여기에 우리들이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마음을 닦아가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경을 보든 참선을 하든, 절을 하던 염불을 하든, 내가 한 것은 남에게 가지 않고 나에게 오롯이 남아 있다. 깨달음의 지혜는 허공처럼 텅 비어 확실한 모양은 없지만 그러면서 또 너무나도 분명하게 있다. 그래서 없는 듯, 하면서도 분명하게 있는 그물망을 빌어다가 비유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회에 동참을 한 문수. 보현보살로부터, 이름이 전부 소개된 140명의 보살들을 포함한 500명의 보살들이 갖춘 덕은 굉장하다. 부처님의 경지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적어도 부처님의 법회에 동참을 하여 법을 구하려면 거의 부처님과 비슷한 경지가 되어야 법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노력하여 다가가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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