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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4-5 아버지의 일 2001. 3. 18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말씀중에서 답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4절에서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어 내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요17:2절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몇구절을 더봅니다.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그 최고의 상태가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생을 우리는 너무 기본적인 것으로 이미 확보해 놓은 면허증 처럼 생각하기에 영생을 맛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생이란 무엇보다 귀합니까? 온 천하를 얻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영생을 사람이 결코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라고 하니 단지 숨이 끊어지지 않고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이 사망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러한 영생을 사람이 결코 만들어 낼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 복제 인간이 나온다고 하여도 죄인을 의롭게 하는 영생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사람의 윤리든 도덕이든간에 죄인을 의롭다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생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복제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과 돈을 투자하는 것 만큼이나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을 개발하여 영생을 확보해 보고자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시도와 노력을 전혀 포기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언가 선할수 있고 의로울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외부에서 자신과 관계없이 제 삼의 힘이 주어져서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권세아래 빠져 있는 인생의 본질인 것입니다. 누가 자신을 믿지 아니하고 다른 이를 믿을수 있습니까?
내가 하지 않았는데 어떠한 결과가 나타난 것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길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때에도 꼭 원인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무슨 선한일을 하였기에 이러한 보상이 오는 것인가?
아 전에 조그마한 선행을 한 것이 이렇게 크게 보답이 오는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전생에서 무언가 선행을 한것이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동화나 이야기의 주제가 다 그러한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내용입니다.
착한일을 한 사람은 나중에 복을 받고 나쁜일을 한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받아 드린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없는데 의롭다하여 주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일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 들일수 있는가 하면 주의 성령이 임하여서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된 자만이 이러한 복음을 기쁘게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주님의 강림에 대하여 말씀을 보았을 때 출애굽때 시내산에 강림하신 그 하나님의 두려우심과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고백하게 된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강림하심이 아니시면 누가 자신의 죄악을 알겠습니까? 아 큰일 났다 내가 지금 죄악가운데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러한 죄인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그 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신 일이며 그 일을 이루어 내심을 통하여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이를 통하여 아버지도 영화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가 언제의 영화입니까? 창세전의 영화입니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가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람아 지은자 되었으니 지은 것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것이 창세 전에 가졌던 영화입니다. 이러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 일을 누가 하신 것입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이신 하나님과 함께 창조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신적인 작정에 의하여 창조된 그 영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광이 지금 아버지의 일을 이루어 내심을 통하여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기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은 어떠한 인간이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제대고 이루어 낼 자가 없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에게 가능성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까닭이 없습니다.
위에서 명령만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시면 다 이루어 내어야지요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임하니 자신들이 얼마나 죄인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새벽기도회에 사무엘상을 보고 있습니다. 누가 나오는 내용입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서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계속 추격을 하는데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두 번이나 맞았는데도 살려줍니다.
이정도의 믿음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었으니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리라. 하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벤 것을 인하여 마음을 아파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왕이 되고서 대적을 많이 정복하고 여유가 생겼을 때 무슨 범죄를 행합니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합니다. 그리고 임신이 되자 알리바리를 조성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휴가 나오게 하지만 충성된 우리야는 자기아내에게 가기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밀령을 내려서 전쟁터에서 죽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죄인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책망합니다.
그 책망을 비유로 들을때는 자기 인줄 몰랐습니다. 어느 부자가 많은 양떼들이 있는데 손님이 왔을 때 자기 양을 잡지 아니하고 가난하여 그 양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의 양을 빼았아 대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그런 나쁜놈이 내 나라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게 바로 당신이요! 이 지적앞에 자신이 얼마나 처절한 죄인인지를 고백합니다. 자기는 죄중에 잉태 되었고 죄악 덩어리라는 것을 알고서 회개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대신에 꺽어진 뼈로 인하여 살게 됨을 오히려 감사는 것입니다.
이때 나온 말이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죄인임을 아는자는 자기가 사는 모든 것이 얼마나 자기 욕심으로 가득한 죄인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남보다 의로운줄 알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가장 큰 죄인이 바로 자신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신의 죄를 모르면 자꾸만 외형적인 것으로 무엇을 하고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를 거창하게 드린다든지 헌금을 듬뿍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서 믿기 보다는 자신들이 스스로 커다란 일들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러 저러한 일을 이루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입었기에 내가 이러한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다 부정한자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부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바람처럼 몰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무엇을 만들어 내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금요일 구역공부시간에 바룩이 자신이 살기 위하여서 인지, 아니면 풍전등화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서인지 모르나 대사를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일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고 합니다. 그러한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여 지켜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편 131편을 찾아 보라고 하였습니다. 한번더 찾아 보고자 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위하여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심령으로 교오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신이 큰 일을 계획하지 않는 것입니다. 젖을 뗀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엄마 품에서 엄마를 인하여 평온을 누리듯이 여호와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런 어린아이의 심정이 됩니까?
모두가 자기가 신으로서 자신의 행위의 능력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심령이 됩니까?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간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라고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낼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알아서 잘하면 되지않습니까?
그러나 결단코 그럴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이고 그 아들은 기꺼이 오셨으며 아버지의 일을 이루심으로 창조전의 그 영광,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듯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우리에게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며 이 일을 이루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일을 한곳만 더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6:38-40절입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여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심이라"
이것이 아버지의 일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 일을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고 또한 아들도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우리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이 아버지와 아들이 영광받으시는 일에 참여 된 것이 영광인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아버지의 일을 이루시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 우리의 영광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은 물론 세상사람들이 볼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고 믿을수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영광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하신 이 일을 믿는 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29절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이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영생을 위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며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하는 일입니까하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믿고 사느라고 고생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내신 그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거운 삶이 아니라 얼마나 가벼운 삶입니까? 나의 일을 믿지 마시고 주님의 일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