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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全海山, 1879∼1910)】 "호남 연합의병의 덕장 전해산"
을사늑약으로 의병이 들끓던 여느 지방과는 달리, 조용하기만 했던 호남에도 1906년 6월 들어 의병이 일어났다. 충남 정산에 살던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임병찬의 도움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 하지만 서두르는 바람에 80여 명의 의병으로 출발했던 최익현 의병은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한 채 일주일 만에 흩어지고,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에 구금되고 말았다. 7월에는 백낙구가 전남 광양에서 김상기·이항선 등과 거의하여 수백 명을 이끌고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전북에서는 충남 출신 김동신이 의병을 일으켜 맹위를 떨쳤고, 전남에서는 기삼연을 중심으로 의병이 크게 일어난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의 우국지사 수십 명이 참여한 의진이었지만, 일본 군경의 신식 무기 앞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기삼연 의병장이 1908년 설날 아침 체포되어 이튿날 광주 서천교 아래에서 총살당하고, 일주일 뒤 이석용이 '창의동맹단'을 구성해 전북 임실에서 거의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 기삼연·이석용 의진에서 참모로 활동하다가 의진을 수습, 새로운 호남의병장으로 활약한 이가 전해산(全海山)(1878~1910)이다. 그는 본명을 기홍(基洪), 일명 수용(垂鏞)이라 했던 전북 임실 출신의 유학자였다.
기삼연의 순국 후 선봉장 김태원이 의진을 수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광주로 찾아갔을 때는 이미 김태원도 순국하고, 조경환이 의진을 수습하여 활약 중이었다. 조경환은 그에게 의병장에 오를 것을 권했지만 한사코 사양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장정들이 산채로 찾아와서 허리띠 속에 고이 간직했던 고종의 밀조를 바치는 게 아닌가! 이렇게 그가 '대동창의단'을 구성하고 의병장에 오르니, 이날이 1908년 8월 21일(음력 7월 25일)이었다.
그날의 상황은 부친과 사촌형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나타나 있다.
'불초 소자가 남쪽으로 온 지 한 달이 지났사온데, 얼마 전에 한양 사람 정원집이 가져 온 밀조를 봉독하고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대의 조칙을 소지한 한양 사람 정원집과 서로 마음과 뜻이 맞아 관포지교의 정을 맺었는데, 그 수하에 있는 정예병 30명은 모두 무관학교 출신으로 총포술이 훌륭하여 가히 대사를 이룰 만합니다.'(해산창의록)
고종의 밀조를 휴대했던 정원집은 무관학교를 나온 친위대 참위 출신이었다. 그는 군대해산 후 경기 광주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형 10년을 받고 전남 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고종의 밀조를 전달받고 그곳을 탈출하여 전해산 의병장을 찾아왔던 것이다.
'의병을 일으켜서 국권을 회복하라'는 고종의 밀조를 받은 호남 유일의 의병장 신분이라 의병들의 사기와 주민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그리하여 인근 지역에서 활약하던 10여 의진의 의병장들이 모여 '호남동의단'을 형성하고 그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4월 14일(1909년) 오전 10시 15분, 함평군 해보면 발미(불갑산 동남방 약 1리)에서 전해산 외 2명의 의병장이 이끄는 연합의진 330명의 의병과 충돌하여 교전 7시간 만에 의병 5명을 죽이고 20명을 부상시켰다.'(한국독립운동사 14권)
이처럼 전해산 의병장은 휘하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벌였으니, 일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일제는 수비대와 경찰대를 촘촘히 배치하고, 일진회 중심의 수많은 밀정을 풀었다. 하지만 의병은 일본 군경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와 화승총을 개조한 천보총(千步銃)으로 무장하여 장성·영광·나주·함평·무안 등 전남 중서부 지방을 완전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1908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의병의 세력이 불길 같았고, 이 기간 동안 수비대·헌병대·경찰대가 연합 혹은 단독으로 전투를 거듭하여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고 기록해 두었다. 일제의 비밀 기록에 전해산 의병장과 관련된 의병투쟁 기록이 108차례나 나올 정도로 맹활약했다.
1909년 5월, 전 의병장은 의진을 박도경 의병장에게 물려 주고 잠시 쉬게 되었으나, 박 의병장이 체포되는 바람에 의병도 흩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전 의병장이 전북 장수로 와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며 은신하던 중, 그해 12월 17일 체포됐다. 그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은 후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고, 8월 20일 대심원에서 상고마저 기각되어 순국했다.
그의 사촌형 기현(基顯)은 대구에서 시신을 운구해 왔다. 수천 명이 조문을 하는 가운데 장례를 치를 때였다. 전 의병장의 아내 김해 김씨는 남편의 상여가 집 앞 시내를 건너자 방으로 들어가서 음독 자결하고 말았다. 전 의병장의 유해는 다시 시내를 건너와서 부인과 함께 쌍상여로 장례를 치르니, 이날이 경술국치 후 열흘이 지난 1910년 9월 8일이라, 충신열녀를 보내는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전한다.
김해건설공고 교사·문학박사(의병문학)
1879년 10월 18일(음력) 전북 임실군(任實郡) 남면(南面) 국평리(菊坪里) 호전동(狐田洞)에서 부친 서일(瑞一)과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원래 이름은 기홍(基泓), 아명은 종엽(鍾葉), 자는 수용(垂鏞)이다. 해산(海山)은 스스로 지은 호인데, 바다와 산을 누비는 의병장이 되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지녔으며, 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데다 문장 또한 번잡하지 않아 인근에서는 수재(秀才)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9세에 공부를 시작하여 24세까지 전력을 다해 공부하였는데, 이한룡(李漢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예에도 능통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 부친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가산(家産)을 기울여 아들의 교도(敎導)를 업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문장은 날로 비범해지고 서법(書法) 또한 크게 나아졌는데,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공맹(孔孟)의 유학은 물론이고 주자학(朱子學), 중국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의 시문(詩文)을 배웠으며, 주역과 음양술 서적을 탐독하였다. 절의에 뜻을 두어 강개한 성격이었다.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여러 번 정독하는 등 역사를 좋아하였는데,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중국의 전국시대와 비슷하다고 인식하였다. 한국의 황제는 이름만 있을 뿐이고, 친일관료들은 일제에 아부하며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일신의 영달에 급급한 점을 개탄하였다. 또한 일본이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한 후 독립국의 보루인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일본인을 불러와 한국의 관리로 대거 임용하는 등 내정 침탈을 강화하는 상황이 결국에는 국권을 강탈하려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명성황후시해사건 직후부터 의병을 일으킬 생각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실행할 수 없었다. 큰 뜻을 키우고 학문을 도야하기 위해 유학자들의 강회(講會)에 참석하여 담론을 나누었다. 특히 명망이 높았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전북 임피(臨皮)의 낙영당(樂英堂)에서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될 위기에 처하자, 1906년 6월 전북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의 주도로 강회를 마친 후 의병을 일으킬 때 참여하였다. 하지만 군사활동에 취약한 유생군(儒生軍)들이 대다수여서 순창(淳昌)에서 패배한 후 최익현과 이른바 ‘순창12의사’들은 서울로 압송되고 의병부대는 해산되었다. 그렇지만 70대 노구(老軀)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후 전북의 의열지사(義烈志士)로 알려진 임실 출신의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이 1907년 9월(음력)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결성하였다. 이 소식을 접하자, 1908년 1월(음력) 전북 남원(南原)에 주둔 중인 이석용을 만나 그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참모[參謀, 혹은 종사(從事)]로 활동하였다.
1908년 3월(음력) 이들은 남원 사촌(沙村)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의병부대를 해산할 상황에 내몰렸다. 마침 전남에서는 의병항쟁이 크게 고조되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가 눈부신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을 필두로 김용구(金容球), 김준(金準), 이철형(李哲衡), 이남규(李南奎) 등이 여러 의병부대로 나누어 의병항쟁을 전개하다가 기삼연을 비롯한 상당수 지도부가 총살되거나 체포되었다. 오직 김준만이 크게 활약하는 중이었다. 이에 이석용과 상의하여 전남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에 투신하기로 하였고, 이석용은 전북에 남아 다시 의병을 불러 모아 장기항전에 대비하기로 하였다. 전라남북도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들이 기각지세(掎角之勢)를 형성하여 일제를 쫓아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남 장성(長城)에 도착하였을 때 만나고자 하였던 김준 역시 일제 군경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김준의 순국 소식에 크게 낙담하였으나 김준 의병부대의 의병들을 수습하여 재봉기하기로 결심하였다. 1908년 4월(음력) 나주의 용진산(聳珍山)에서 김준 의병부대의 핵심인물이었던 조경환(曺京煥) 및 오성술(吳成述)과 만나 의병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의병부대를 재편하면서 조경환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1908년 7월 27일(음력) 조경환 의병부대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이때의 격문에서 “왜노(倭奴)는 우리나라 신민(臣民)의 불구대천지원수이다. 임진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년 국모(國母) 시해는 물론이고 우리의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다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 칼날에 죽겠는가.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돕고 조종이 권고(眷顧)하여 이 적을 소청(掃淸)하는 날에는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제일공신(中興第一功臣)이 될 것이다. 일체 폭략(暴掠)을 하지 말고 힘써 나라 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죽자”고 호소하였다.
이들은 1908년 8월(음력)부터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의 이름으로 다음해 4월까지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의병장 전해산을 비롯한 선봉장 정원집(鄭元執),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犒軍將)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척왜장(斥倭將) 임장택(林長澤), 도통장 김성채(金性采), 참모장 이봉래(李鳳來), 참모 이영준(李永焌) ・ 김돈(金燉) ・ 김공삼(金公三) ・ 김원국(金元國) ・ 이성화(李聖化)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대동창의단은 대체로 김준 의병부대의 의병들이었는데, 농촌지식인 ・ 해산군인 ・ 농민 ・ 포수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청장년들로서 투쟁역량 및 군율을 강화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의병부대의 편제는 십장-도십장-도포장-선봉장의 체계를 유지하였으며, 전체 병력은 의병 활동이 왕성하던 1908년 8~9월경 300명을 상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유격전술을 펼치는데 용이하도록 소수의 정예주의에 입각하여 의병부대를 나누어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활동구역은 전남 서부의 곡창지대인 전남의 광주 ・ 장성 ・ 영광 ・ 나주 ・ 무안 ・ 함평, 전북의 고창 ・ 부안 등지였는데, 스스로 ‘해산(海山)’이라 이름하며 연해와 내륙에서 두루 활약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이들은 유격전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구비한 영광 불갑산(佛甲山)과 나주 석문산(石門山)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주로 활동하였다.
불갑산의 불갑사를 비롯한 해불암(海佛庵) 등의 사찰을 주둔지로 활용하였으며, 환해(環海)와 금화(錦華) 등 승려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석문산은 주둔지 또는 전투지로 활용되었는데, 흔히 석문동천(石門洞天)으로 알려졌다. 동천(洞天)이란 신선이 사는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장소를 말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치가 수려하면서 시내를 끼고 있는 깊은 골짜기를 동천이라 이름하고서 학문 연마와 후진 양성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처사적 삶을 향유하는 공간이 의병의 주둔지이자 전투지로 활용되었다. 더욱이 이 지역은 나주오씨의 세거지로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였던 오준선(吳駿善)과 오동수(吳東洙)가 전해산의 활동을 적극 도왔고 훗날 전해산의 전기와 행장을 남겼다.
석문동천 외에도 현재 광주의 대명동천(大明洞天)과 용진동천(聳珍洞天)을 그러한 용도로 자주 이용하였다. 이를테면 석문동천의 경우 석문산 바로 앞에 황룡강의 지천이 흐르고, 그 너머에는 넓은 평야가 있어서 전망하기가 매우 좋았다. 또한 석문산 입구에는 거대한 바위가 길 양편에 서있어서 방어에 편리하고 후방으로는 대명동천(大明洞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퇴로를 확보하기가 편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일본군을 유인하여 전투를 벌였다. 당시 상황을 그의 「진중일기(陣中日記)」에서, “(1908년 9월 29일 음력) 아침에 행군하여 석문동 입구에 당도하였다. 본시 이곳에 유진하려고 한 것이었다. (중략) 이윽고 “적이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으므로 급히 뒷산 마루에 올라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과연 왜적 수십여 명이 감도리 뒷산 기슭으로부터 들어오므로 곧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석문동 맨 뒷 봉우리에 매복하게 하였다. (중략) 양편에서 총 소리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니 부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도주하며 허둥지둥 두서를 못 차렸다. 이윽고 적이 벌써 많이 죽어 넘어지니 순사대 몇 명은 겁을 집어 먹고 멀리 도망갔다”고 적고 있듯이, 석문산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여 일제 군경과 싸워 승리하였다.
대명동천 역시 무기제조 장소로 자주 활용하였다. 그의 「진중일지」에 “(1908년 음력) 10월 9일 임술(壬戌), 영사재(永思齋)에서 유진하였다. 즉시 후군장으로 하여금 각초(各哨)에 규율을 세우고 황(黃)을 사들여 화약을 제조하며, 납을 달구어 탄환을 만들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영사재는 나주오씨의 제각인데, 그곳을 의병의 주둔지와 무기를 제작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용진동천 역시 전해산 뿐만 아니라 조경환 및 오성술 의병부대도 일본 군경과의 전투지였다. 용진산은 1910년대에 오준선이 용진정사를 짓고서 후학을 양성하며 전해산을 비롯한 기삼연 ・ 고광순 ・ 김준 의병장의 전기를 찬술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리적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항일투쟁을 주도해갔다. 뿐만 아니라 주민 보호에 앞장서서 군수품을 조달할 때에는 가능한 그 대가(代價)를 지불하였다. 가의(假義, 가짜 의병)의 퇴치, 헌병보조원의 만행, 세무관리의 행패, 일진회원의 비행 등으로부터 주민들을 적극 보호함으로써 신뢰를 얻었다. 예컨대 일진회원 변영서(邊永瑞) ・ 박기춘(朴基春) 등을 처단함으로써 친일세력의 발호를 경계하였다.
또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투쟁역량을 강화하였으며, 무기의 조달과 개조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때로는 선교사(宣敎師)와 만나 신무기 구입에도 노력하였다. 전투가 없는 날에는 나주의 오준선, 함평의 김돈(金燉), 장성의 기우만(奇宇萬) 등을 방문하여 의병의 투쟁방략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식이 깊은데다 분석력이 탁월하여 예측이 적중되는 경우가 많아 의병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그리하여 전남 서부지역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이름을 날렸다.
투쟁역량이 한결 강화된 대동창의단은 전남의 서부지역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반일투쟁을 비롯한 친일세력의 제거 그리고 항세투쟁(抗稅鬪爭) 등을 주도하였다. 일본군경과는 영광의 불갑산, 광주의 대치(大峙), 광주 자은동(自隱洞)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자은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 군경은 그 보복으로 마을에 불을 질러 약 100여 호의 민가가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일본을 원망하였을 뿐이었다. 이들의 활동이 활발할수록 일제의 대응 역시 강화되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한 전담부대가 편성되기도 하고, 변장정찰대(變裝偵察隊)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 군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전남에서 활동 중인 의병부대간의 연합을 도모하였다. 연합항쟁의 필요성을 절감한 전남지역 11개의 의병부대들이 참여하여 1908년 말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결성하였다.
호남동의단은 전해산을 비롯하여 제1진 의병장 심남일(沈南一)에서 제10진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에 이르기까지 당시 전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12월 나주 고막원(古幕院) 전투에서 선봉장 정원집이 중상을 입은 후 결국 사망하였다. 해산군인 출신으로서 실질적인 전투를 이끌었던 정원집의 순국은 대동창의단의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때부터 전해산의 의병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하여 1909년 4월 하순 영광 오동치(梧桐峙) 및 덕흥(德興)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한편, 일제는 체포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1909년 5월 박영근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호남 삼월에 오얏꽃 어지러운데 보국할 서생이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또한 사정을 아는지 떠나는 나를 밤새 부르며 돌아가지 말라 하네’라는 시 한편으로 당시의 비참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전북 장수군(長水郡) 중번암면(中磻巖面) 동화리(洞花里) 산골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며 후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1909년 12월 18일 변절자 김현규(金顯圭) 등의 밀고로 영산포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그를 “공평정직하고 일호도 사사 뜻이 없는 진실한 의사”라고 평하였다. 최후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東海)에 걸어 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고 말하였다. 아울러 신문과정에서도 자신은 "폭도(暴徒)가 아니라 의병(義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정당성을 적극 피력하였다.
1910년 8월 20일 사형이 확정된 후 같은 달 23일 동지 박영근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순국한 것으로 전한다. 부인인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시부모의 장례를 치른 후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와 『해산창의록(海山倡義錄)』이 어렵사리 보존되었다.
전남 서부지역의 대표적 의진으로, 일제는 그를 심남일(沈南一) ・ 안규홍(安圭洪)과 더불어 전남에서 활동한 3대 의병장으로 평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