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발족
← 1961년 9월 12일 국민회당에서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사진은 축사를 하고 있는 윤보선 대통령의 모습. 1961년 9월 12일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발족했다. 5·16군사혁명으로 언론에 대한 각종 통제가 심화되자 언론의 자율규제 필요성을 절감한 언론인들은 1961년 7월 그 기준이 될 신문윤리실천요강을 제정한데 이어 이날 신문윤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언론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자율적 통제가 첫째 목표였다. 발족초기에는 일반의 제소사건만을 심의, 결정했으나 1964년 언론파동을 계기로 위원수를 확대했고, 부설기관으로 심의실을 설치해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제소없이도 윤리위반기사를 자율적으로 심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1976년 10월 한국신문협회와 공동으로 신문광고윤리강령 등 실천요강을 제정하여 1977년 1월부터는 신문광고도 규제해 오고 있다.
[1916년] 대종교 교주 나철 자결
←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대종교를 중창한 나철. 일제의 탄압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했던 대종교의 교주 나철이 교단이 존폐위기에 놓이게 되자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15일) 구월산의 삼성단에서 일제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결했다.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33세 때 징세서장(徵稅署長)의 발령을 받는 등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1904년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해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해 힘썼다. 그러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매국노를 암살하기 위한 오적 암살단을 조직, 1907년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를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정치적 구국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나철은 이후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가 중창한 대종교는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삼았고, 다른 민족종교와는 달리 식자층들이 많이 끼어 있어 양반종교라 불리기도 했다. 그후 1909년 1월 15일 단군교를 선포,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교세확장에 주력하던 중, 교단 내 내분과 예상되는 일제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1910년 8월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했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종교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만주를 무대로 국외포교를 하며 교세확장에 주력했다. 그러던 1915년 10월, 일제가 ‘종교 통제안’을 공포하며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자 일제에 항의하는 표시로 이날 목숨을 끊었다. 국가적인 기념일이기도 한 개천절(10월 3일)역시 이 대종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2005년] 삼성, 50나노 16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 삼성전자는 12일 세계 최초로 50나노 기술을 이용한 16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제품은 손톱 크기의 칩 1개에 신문 200년분이나 MP3 파일 기준 노래 8,000곡을 저장할 수 있다. 이같은 대용량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따라 일반 노트북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칩 1개로 대체할 수 있는 ‘디지털 페이퍼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게 됐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은 이날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계 최초로 16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다”면서 “반도체 칩이 종이의 정보 저장·전달 기능을 대체하는 ‘디지털 페이퍼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60나노 기술을 적용한 8기가 제품에 이어 이번에 50나노 16기가 제품을 세계 처음으로 개발함에 따라 세계 반도체 업계 선두주자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또 1999년 이후 매년 메모리 반도체 용량이 2배씩 늘어나는 신제품을 개발해 ‘1년에 메모리 용량이 2배로 늘어난다’는 이른바 ‘황의 법칙’을 다시금 전세계에 입증했다. 16기가 개발에 사용된 50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 회로선폭 기술은 머리카락 2,000분의 1 두께의 극미세 회로를 이용해 반도체를 설계한 삼성전자만의 최첨단 기술이다. 삼성전자는 이 기술을 이용해 16기가 메모리 칩 1개에 1백64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어넣었다. 이 제품은 내년 하반기 중 양산된다. 이 제품이 양산되면 현재 A4용지 절반 크기의 노트북 하드디스크의 크기·무게를 10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다. 황사장은 “이번에 개발한 50나노 기술은 16기가뿐 아니라 기존 8기가나 4기가 제품에도 적용 가능해 원가를 대폭 줄일 수 있다”면서 “2010년까지 3백억달러 규모의 시장이 창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문규기자 /kyunghyang.com 2005/09/22
[1959년] 우주탐사선 루나 2호 발사 1959년 9월 12일 소련은 우주탐사선 루나 2호를 발사해, 최초로 달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달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라는 이유로 미국과 소련의 초기 우주과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과 모험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은 루나 2호에 이어 2번째 무인 우주탐사선인 루나 3호를 같은 해 10월 4일 발사해 달로부터 6,880㎞ 떨어진 거리에서 달의 뒷면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로도 소련은 1970년에 무인월면차를 달 표면에 착륙시키는 등 우주탐사를 계속했다. 미국도 달 탐사에 적극적이었다. 1964~68년 3차례에 걸쳐 달 탐사선을 발사했으며, 1964~65년에는 3대의 레인저호를 달에 동체착륙시켜 총 1만 7,000장 이상의 달 사진을 얻어냈다. 이후 발사된 달궤도선과 탐사선 등은 달의 지형을 촬영하고 달의 환경에 대한 자료를 수집·전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69년 7월 20일에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이 달평원에 착륙해 인간의 직접적인 달 탐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1972년 12월까지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은 5차례에 걸친 달 탐사여행을 통해 표본 채취 등 각종 과학실험을 수행했다.
[1991년] 발트 3국, 상호방위조약 체결 1991년 9월 12일 비슷한 시기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발트 해 연안 3개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이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수세기 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온 3개국은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독일군과 소련군을 몰아내고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후 발트 3국은 의회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정치구조를 근대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으며, 경제개혁의 일환으로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정치 불안으로 독재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6년에는 리투아니아, 1934년에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 각각 독재정권이 들어섰으며, 결국 1940년 또다시 소련에 합병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일련의 자유화 정책을 실시하자 소련의 주변국에서는 그동안 억눌려왔던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으며 많은 소수민족들은 소련 공산당을 공격하며 독립과 자치를 주장했다. 1991년 소련에서 일어난 공산당 주도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발트 3국은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을 쟁취한 이들 국가는 곧이어 외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1897년] 졸리오 퀴리(Iréne Joliot-Curie) 출생
← 졸리오 퀴리 부부 1897년 9월 12일 태어남 / 1956년 3월 17일 죽음
"이렌 졸리오 퀴리는 부모인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이루어낸 방사능 발견으로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에 태어나, 말 그대로 방사능과 함께 자라났다. 결국 그녀 자신도 온 생애를 방사능 연구에 바쳤다. " - 제임스 채드윅, <네이처>에 실린 사망기사에서
이렌 졸리오 퀴리는 남편인 프레데리크 졸리오 퀴리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한 프랑스의 물리화학자이다. 그녀는 노벨상 수상자였던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딸로서, 인공적으로 만든 새로운 인공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여 남편과 함께 1935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했다. 그들은 1928년에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했는데, 연구과정 중에 질소·인·알루미늄과 같이 보통 방사성 원소가 아닌 원소들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얻었다. 이 발견으로 화학적 변화와 생리적 과정을 추적하는 데 인공적으로 만든 방사성 원소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것은 곧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었다. 이들 부부는 중성자와 양전자가 생성되는 것도 관찰했다. 이렌은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중요시해서 1934년 사회당에, 1935년 파시즘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경계위원회에, 그리고 1936년에는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과학연구 부서의 정부 차관으로서 J. 페랭과 함께 나중에 국립과학연구소가 된 단체의 기금마련을 도왔다. 이렌은 행정관리로서 그녀의 과학적 경험과 능력을 활용해 원료 취득·우라늄 조사 및 추적장치 건설 등 여러 일에 헌신했고 1946년에는 라듐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956년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 퀴리처럼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1991년] 제2회 세계한민족체육대회, 잠실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림 세계한민족축전(The World Korean Festival)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 때 인원제한으로 초청에서 빠진 재외교포들이 고국방문이 이루어지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많아, 서울올림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1회 대회가 열렸다. 전세계 한민족의 동질성 확인과 유대강화, 조국의 참모습과 발전상을 보여줌으로써 한민족의 자긍심 고취, 종합축전을 통한 민족화합과 조국통일 기반조성을 목적으로 한다. 당초에는 한 번 하고 마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었는데 참가동포들이 이 행사의 정례화를 요청함에 따라 정기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또한 체육·청소년·문화·학술 등 종합축제로 확대되었다. 이 행사를 주최하던 재단법인 세계한민족체전위원회는 1994년 7월 31일 사단법인 국민생활체육협의회에 통합되었다. 제1회 대회는 세계한민족체육대회라는 이름으로 1989년 9월 26일∼10월 4일까지 열렸다. 참가지역 50개국, 참가인원 1,326명, 경기종목은 축구·배구·육상·수영·테니스·배드민턴·탁구·복싱·유도 등 올림픽경기 9종목, 씨름·그네뛰기·연날리기·널뛰기·활쏘기·줄다리기 등 고유의 민속경기 8종목이었다. 해외동포와 국내인이 함께 참가한 한민족 함께 달리기, 체육행사 외에 소련 한인가무단, 미국 LA한국예술단, 일본 오사카[大阪] 한국예술단 및 한국화·김정숙·방초선 등 중국 옌볜[延邊] 출신 가수들의 공연, 세계한민족이산가족대회, 한국전통식음료잔치 등이 열렸다. 특히 제1회 대회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해 불모의 땅인 만주·타슈켄트·알마아타 등지로 흩어진 채 광복 후에도 조국을 방문하지 못한 재소련동포 147명, 재중국동포 150명이 참가하였다. 행사에 참가한 임원 및 선수들에게는 편도 항공료(재소련·중국동포에게는 왕복 항공료)와 숙식비를 정부에서 부담하였다. 종목별 입상자에게는 금·은·동메달이 수여되었으나, 대회 성격상 팀별 종합채점은 하지 않았다. 1991년 제2회 대회는 세계한민족체전이라는 이름으로 85개국 1,601명이 참여하였으며, 1993년부터는 청소년 행사와 민속체육·문화·학술행사가 동시에 열려 84개국 887명이 참가하였다. 95개국 953명이 참가한 1995대회는 지금의 명칭으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과 연계하여 열렸다. /naver
[1948년] 국회, 연호를 단기로 확정 단기(檀紀)는 단군왕검이 즉위하여 단군조선을 개국한 해인 서기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기원이다. 단기가 국가의 연호로 처음 채택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이다. 1948년 9월 12일 국회 133명의 재석의원 중 106명의 찬성을 얻어 의결, 확정된 '연호에 관한 법률'은 이어 9월 25일 '법률 제4호'로 공포됐고 여기에서 단군기원(檀君紀元)이 대한민국의 공용연호가 됐다. 그러나 1961년 12월 2일부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부칙에서 "본 법은 1962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법률 제4호에 관한 법률은 이를 폐지한다"고 법제화함으로써 단군기원이 폐지되고 서력기원이 채택됐다. /조선
[1977년] 남아프리카 흑인 민족주의자 비코(Biko, Steve Bantu) 사망
← 영화 '자유의 절규' 포스터(왼쪽)와 스티브 비코 비코 [Biko, Steve Bantu, 1946.12.18~1977.9.12] 비코는 1970년대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의 흑인의식운동을 이끌었던 정치운동가이다. 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의 죽음은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의 잔혹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흑인들의 투쟁을 가열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의대에 진학한 비코는 남아프리카 전흑인학생연합(SASO)을 창립하고 백인들에 의한 흑인들의 심리적 억압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흑인의식운동을 전개했다. 1972년에는 흑인운동단체들의 연합체인 흑인민중회의(BPC)의 명예 의장이 되었다. 이듬해 남아공 정부는 비코에게 회합·운동·연설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금지처분을 내리고 탄압의 강도를 높여 갔다. 사망하기 직전 3년 동안 그는 4회나 구속되었고 1977년 8월 경찰에 체포되어 엘리자베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9월 이 교도소와는 멀리 떨어진 프레토리아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강한 타격에 의한 뇌출혈이었지만 그의 죽음과 관련해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브리태니커
[1974년] 에티오피아 군부, 하일레 셀라시에 1세 국왕을 폐위 1974년 오늘 에티오피아 군사조정위원회는 44년간 에티오피아를 통치해 온 하일레 셀라시에 1세(Haile Selassie I, 1892~1975) 국왕을 폐위시킨다. 군사조정위원회는 국왕 폐위와 함께 의회를 해산한 뒤 좌익군사정권을 수립한다. 군사조정위원회는 앞서 두 달여 전 쿠데타를 일으킨 멩기스투 중령이 구성한 기구다. 멩기스투는 이후 반대파 숙청으로 독재체제를 굳히고 소련과 우호조약을 조인한다. 또 집단농장을 기반으로 급속히 사회주의화를 진행한다. 멩기스투 중령은 정권을 장악한 이 날로부터 13년이 지난 1987년 오늘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한 뒤 에티오피아 민간 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다. /YTN
[1901년] 소설가 심훈 출생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본관은 청송. 본명은 대섭(大燮), 아명은 삼준·삼보. 호는 해풍(海風). 백랑(白浪)이라는 별호도 사용했다.
생애와 활동 아버지 상정(相珽)과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큰형 우섭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작은형 명섭은 교회 목사였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7년 왕족인 이해영과 결혼했다. 1919년 3·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이 사건으로 퇴학당했으며,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기간중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에서 활동하다 항저우[杭州]의 즈장[之江]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 귀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焰群社)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를 번안했고, 부인 이해영과 이혼했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으며, 박헌영·임원근·허정숙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등의 평론으로 프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였다. 1930년 신여성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했다. 1931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창작생활에 힘을 쏟았다. 1933년 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잠시 근무했고,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문학세계 1930년 조국 해방에의 염원을 노래한 시 〈그날이 오면〉과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조선일보, 1930. 10. 29~12. 10)을 발표했다. 〈동방의 애인〉은 청년 2명이 중국으로 망명해 벌이는 비밀활동과 연애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주인공이 모스크바의 공산당대회에 참가하는 장면이 일제의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다. 이어 소설 〈불사조〉(조선일보, 1931. 8. 16~12. 29)를 연재했으나 역시 게재정지처분을 받아 미완이 되었다. 그뒤 지식인이 고향에 돌아가 농사짓는 과정을 그린 장편 〈영원의 미소〉(조선중앙일보, 1933. 7. 10~1934. 1. 10)와 자신의 첫째 부인 이해영을 모델로 하여 봉건적인 가족제도와 조혼제도가 여성에게 주는 억압을 자세하게 묘사한 장편 〈직녀성〉(조선중앙일보, 1934. 3. 24~1935. 2. 26)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부곡리에서 당시 경성농업학교 출신인 조카 심재영이 주동하는 '공동경작회' 회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장편 〈상록수〉(동아일보, 1935. 9. 10~1936. 2. 15)를 연재했다. 이 소설은 187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지식인들의 브나로드 운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한 한국농촌의 참상을 보여주고 농촌계몽운동을 실천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그밖에 단편 〈기남(奇男)의 모험〉(새벗, 1928. 11)·〈오월비상〉(조선일보, 1929. 3. 20~21)·〈황공(黃公)의 최후〉(신동아, 1936. 1) 등을 발표했다. 1952년 〈심훈전집〉(7권)과 1966년 〈심훈전집〉(3권)이 나왔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 족청계 제거에 관한 담화 발표 1953년 9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이 족청계 제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9월 10일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의 족청계인 조선민족청년단 소속 진헌식 내무장관과 신중목 농림장관을 농민에게 세금을 과다부과했다는 구실로 전격 파면조치하고, '총국민대회'를 열어 당내 실세였던 족청계를 완전 숙청했다. 대신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을 자유당 2인자로 지명했다. 9월 17일, 이 대통령은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던 대한청년단도 해산, 모든 청년단체와 함께 민병단에 편입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한때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내무장관, 부통령후보 등을 역임하고 권력 2위에 있던 이범석과 그의 족청계는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족청'은 1946년 10월 9일 이범석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청년운동단체로 창립 당시에는 300명에 불과하던 회원수가 9개월 후에는 20만 명, 2년 후에는 무려 120만 명의 대조직으로 발전했다. 정부수립 이후 이 대통령은 족청의 조직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을 우려해 1948년 12월 19일 통합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도록 한 후 족청을 이에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족청은 창단 2년 여 만인 1949년 1월 15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해체되었으나, 해체후에도 계속 결속력을 유지해 자유당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행사했다. /조선
[1953년]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에 피선 1953년 9월 12일 흐루시초프(Khrushchyov, Nikita S., 1894~1971)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선임됐다. 흐루시초프는 3월 5일 스탈린 서거 후 수상 말렌코프 당서기 사임 후부터 급속히 세력을 키워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제1서기로 임명됐다. 흐루시초프는 1894년 크루스크주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해인 1917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모스크바 지하철공사 감독으로 활약한 공적으로 1935년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됐다. 스탈린 시대에는 당 방침에 충실히 활동해 1939년에 정치국원, 1949년부터 당서기 지위에 올랐다. /조선
[1940년] 1만 5천년 전의 신비를 간직한 라스코(Grotte de Lascaux) 동굴벽화 발견
← 오리나시안기의 황소와 말 벽화, 프랑스 라스코 동굴 1940년 9월12일, 도르도뉴의 몽티냐크 마을. 마르셀(17세)·조르주(16)·자크(15)·시몬(15) 네 소년이 베제르 골짜기에 있는 라스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한군데 멈추어 서서 풀섶을 헤치고 지름 60㎝쯤 되는 구덩이 둘레를 파기 시작했다. 그 구덩이는 오래 전부터 근처의 옛 성으로 통하는 중세시대의 비밀 통로일지도 모른다고 전해져 왔다. 소년들은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탐험’을 시도했던 것이다(1940년의 신문 보도와 선사미술 교과서에는 소년들이 수풀에서 놀다가 데리고 간 개가 구덩이에 빠지자 개를 구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고 쓰여 있다. 이것은 그때 신문기자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그럴싸하게 꾸며낸 말이다). 두 시간쯤 풀을 뽑고 입구를 넓히자 어두컴컴한 터널이 나타났다. 마르셀이 먼저 그리로 들어갔다. 그 뒤를 세 아이가 따랐다. 납작하게 엎드려 배를 땅에 깔고 기기를 10여m. 문득 꽤 넓은 동굴이 나타났다. 소년들은 일어서서 걸었다. 마르셀이 높이 쳐든 램프 불빛이 굴 안을 훤히 비추었다. 천장은 꽤 높았고, 갖가지 기괴한 돌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앗,말 좀 봐!” 갑자기 시몬이 소리질렀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 이런 데 무슨….” 마르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조르주가 소리쳤다. “어, 소랑 사슴도 있네!” 라스코 동굴의 말 그림. 풀처럼 보이는 선이 작살인지 풀인지 알 수 없다. 작살이라면 말사냥이 성공하기를 기원한 ‘사냥주술’이다. 네 소년 앞을 수많은 짐승들이 달리고 있었다. 어떤 말은 앞발을 치켜들었고, 들소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덮칠 것 같았다.동굴 벽은 짐승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년들은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섰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벽과 천장은 온통 그림투성이였다. 100m쯤 나아간 그들은 바위가 무너진 곳에서 길이 막히자 되돌아 나왔다. 소년들은 이 일을 비밀에 부쳤다가 그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른, 즉 그들이 다니는 학교의 라발 교장에게 털어놓았고, 교장은 즉시 손꼽히는 고고학자 브뢰이(Breuil, Henri-Edouard-Prosper, 1877~1961)에게 알렸다. 브뢰이가 면밀히 조사한 결과 벽화는 모두 800점이 넘었다. 들소·말·사슴·염소 따위가 주로 그려져 있었는데 드문드문 고양이나 주술사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짐승들의 크기는 대체로 커서 주(主) 동굴에그려진 검은 소는 가로 5m가 넘었다.그림은 빨강·검정·노랑·갈색을 칠한 채색화가 많았지만,홈을 판 선각화(線刻畵)도 꽤 있었다.그림 중에는 여러 종류의 짐승이 겹친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짐승을 손쉽게 잡으려는 주술(呪術) 행위였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동굴 안은 주동굴(길이 15.5m,너비 9m)과 거기에 달린 갈래동굴(길이 30m,너비 0.5m),갈래동굴에서 통로를 따라가다가 갈라진 뒷방(지름 4m), 가느다란 통로(길이 25m,너비 1∼3m) 그리고 땅밑으로 5m쯤 꺼진 우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타미라에 이어 라스코 동굴이 발견되자 동굴이야말로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만년 전까지 인류의 조상이 추위를 피해 살았던 곳임이 명백해졌다. 만년 전에 등진 고향을 찾아 관광객이 라스코로 몰려들자 몽티냐크 마을 사람들은 소년들이 파낸 구덩이를 넓혀 동굴을 공개했다. 라스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한동안 잊혀졌으나, 전쟁이 끝난 뒤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소년들이 파낸 구덩이에서 좀 떨어진 곳에 현관과 계단이 만들어 지고,전깃줄을 깔기 위해 굴이 파헤쳐 졌다. 이 관광명소는 1948년 7월14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에 문을 열었다. 선사고고학자들이 미처 발굴과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1963년이 되어서야 라스코는 벽화 보존을 위해 공개를 중지했다. 그러나 이미 그 옛날 라스코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많은 도구들이 석수·전기 기술자의 곡괭이와 관광객들의 발길에 짓밟혀 거의 사라져버린 뒤였다. 라스코 동굴을 발견한 일은 자크 마르셀 소년의 일생을 결정지었다. 그는 지금 국립 라스코동굴관리사무소를 맡아 돌보고 있다.
[1921년] 의열단원 김익상 총독부청사에 투탄 김익상(金益相 1895(고종 32)~1925.)은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로 근무하다가 상경하여, 광성연초공사(廣成煙草公司) 기계감독을 지냈다. 1920년 펑톈[奉天] 지점으로 옮긴 뒤 비행사가 되기 위해 광둥[廣東]으로 갔으나, 중국 내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비행학교가 폐교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항일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1921년 베이징으로부터 폭탄 2개를 가지고 서울에 들어왔다. 전기수리공을 가장하고 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비서실을 총독실로 잘못 알고 던져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폭발 뒤의 혼란을 이용하여 무사히 상하이[上海]로 탈출했다. 이어 1922년 상하이 황푸탄[黃浦灘]에서 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시찰차 중국에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암살을 기도했다. 오성륜이 권총으로 쏘았으나 영국인 여인이 끼어들어 실패했고, 그가 던진 폭탄도 불발했다. 도망하다가 죽은 영국 여인의 남편 톰슨이 쏜 총에 맞고 체포되었다. 나가사키[長崎]로 이송된 후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몇 차례에 걸쳐 감형되어 풀려났으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암살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1956년] 독일 소설가 한스 카로사 (Hans Carossa 1878.12.15.~1956) 사망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 남부 바이에른 튈츠 출생했다. 의사인 부친의 뒤를 이어 뮌헨, 라이프치히, 부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1903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개업의가 되어 진료를 하면서 시, 수필, 소설 등을 발표하여 1931년에 고트프리트 켈러 상과 1938년 괴테 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바이에른 지방의 풍토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대게 픽션적인 요소를 가미한 생활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으로 인생의 암흑과 혼돈을 의식의 바탕에 두고 빛과 조화를 지향하는 인내와 유머러스한 마음이 따스하게 배어 있다. 카로사는 괴테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유년 시절>, <젊은이의 변모>, <의사 기온>, <젊은 의사의 수기>, <루마니아 일기>, <두 개의 세계>, <이탈리아 여행> 등이 있다.
그 밖에 2006년 시리아 美대사관 테러공격 받아 ; 9·11테러 5周 하루 뒤‥· 무장괴한 등 4명 사망 2002년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작했다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발표 1999년 세레나 윌리엄스, US오픈테니스 우승. 흑인 여선수 41년 만에 그랜드슬램 달성 1997년 미국의 화성 탐사선 ‘글로벌 서베이어’ 화성궤도에 진입 1996년 가이셀 브라질 전 대통령 사망 1990년 중부지방 집중호우로 행주대교 부근 한강제방 붕괴 1988년 제94차 IOC총회 서울서 개막 1982년 중국, 당총서기에 호요방 선출 1980년 호메이니, 미국인질 조건부석방 제시 1977년 중국, 핵탄두 미사일발사실험 성공 1972년 남북적십자 2차 본회담 참석차 북한대표단 서울 도착 1970년 팔레스타인게릴라, 납치한 3대의 여객기 요르단서 폭파 1970년 북한 청년근위대 창설 1966년 미국 제미니11호, 궤도를 돌던 아지나 로케트와 도킹 1964년 베트남에 군부쿠데타(3차)로 정반득장군 집권 1962년 캄보디아 시아누크원수 월남에 월경(越境)하면 단교한다고 최후통첩 1962년 라오스와 외몽고 수교. 대사교환 합의 1962년 중공군 인도령 ‘투앙’에 침입 1956년 한국발명협회 발족 1952년 중국-소련 회담 공동코뮤니케 발표 1951년 조지.C.마샬 미국 국방장관 사임 1950년 영국의회, 한국전쟁 참가문제로 긴급 소집 1947년 중국군, 국민당 정부군에 총반격을 선언 1946년 이승만박사 저격사건 발생 1945년 싱가폴에서 일본 남방파견군 항복 조인 1945년 조선공산당 재결성 1929년 조선박람회 개막 (~10.31) 1920년 제1차 혼춘사건, 일본군이 중국인 마적을 매수하여 간도 혼춘성 공격 1897년 러시아 우수리철도 개통 1894년 콜롬비아의 3선 대통령 누녜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