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으로 가요 / 바캉스를 위한 최고의 찬가

[魯山]

1970년에 <해변으로 가요>란 노래가 발표된다.

그해 이 노래를 들으며 해변으로 떠났던 스무 살의 청년은 이제 60대 중반을 넘어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이 노래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여름이 다가오고 슬슬 여름 휴가를 생각할 무렵이면 라디오 등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10대 때 들었고, 20대 때도 들었고, 30대 때도 들었다.

심지어는 2016년, 그러니까 작년에 있었던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우리나라 국민들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여름 하면 생각나는 노래로 <해변으로 가요>를 선택했다.

50대 이상에서 1위를 한 것은 물론, 30대와 40대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바닷가에서의 한여름 밤의 낭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멋진 바다 데이트, 이런 추억은 내게 별로 없다.

10대 때는 가족이나 친지와 바다를 갔고, 20대 때는 바다로 놀러가는 것이 사치였던 시대였다.

그때는 후배들과 산이나 강을 찾아 시국을 토론하며 밤에 모닥불 앞에서 소주 한 잔씩 돌리는 정도였다.

30대 이후로는 바다 하면 꽉 막힌 고속도로를 운전해 가서 여기저기 방 잡으러 다니고,

식당 알아보러 다니고, 아이들이 부르면 가서 사진 찍어주거나 필요한 물건 챙겨주러 다니던 기억들투성이다.

바다에서의 추억이 있다면 군대 가서 첫 휴가를 나오자마자 집에는 알리지도 않은 채 동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는

첫날 밤을 해안에 세워둔 어느 트럭의 짐칸에 종이박스를 깔아 놓고 보냈던 일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의 좁은 부대 안에서 꽉 짜인 시간표대로 생활하다 보니

무작정 떠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확 트인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에 일출을 본 나는 두꺼운 군복과 무거운 군화를 신은 채 종일 강원도 동해안 바닷가를 헤매고 다녔다.

이런 내가 여름날의 바닷가를 낭만적으로 볼 건덕지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여름날의 바다는 여전히 낭만적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왜? <해변으로 가요>란 노래 때문이다.

장마가 끝나고 휴가 시즌이 다가오면 한국인을 설레게 하는 말이 바캉스다.

바캉스(vacance)란 말은 프랑스어다. 영어로는 버케이션(vacation)인데 휴가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 또는 그 무엇을 비우는 것을 가리키는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단다.

프랑스에서 바캉스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다.

프랑스 총선에서 좌파인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이 승리하자

참고 지내던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대적인 노동파업이 일어났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프랑스 경제가 거의 마비되자 정부와 경영진은 노조와 협상에 들어갔고,

마티뇽 협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1936년 6월 20일 마티뇽 협정이 정식으로 프랑스 국회를 통과한다.

마티뇽 협정은 2주의 유급 휴가 실시, 임금 7~15퍼센트 인상,

임금을 줄이지 않고 주 48시간 노동을 40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이었다.

노동자들이 승리하고 바캉스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유급 휴가는 세계 최초로 시행된, 당시로선 획기적인 정책이었는데 점차 이웃 나라로 확산되어 간다.

위 사진은 1936년에 승리를 쟁취한 프랑스인들이 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바캉스를 떠나는 모습이다.

1936년 당시 자전거를 타고 휴가지로 떠나는 모습이다.

두 사람이 타는 자전거가 유행했던 듯 당시 사진에는 이런 자전거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기차를 타고 피서지로 가는 프랑스인들도 많았다.

기쁨과 설렘이 한결같이 가득한 얼굴들을 보니 연출한 사진처럼 보일 정도다.

우리의 설날이나 추석 때처럼 프랑스판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우파가 권력을 잡은 적도 있었지만 복지 혜택을 줄이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1936년에 실시된 2주의 유급 휴가는 1956년에 3주, 1969년에 4주, 1982년에는 5주로 늘어났다.

위 사진은 1960년대에 지중해 해변에서 프랑스인들이 바캉스를 즐기는 모습이다.

당시 프랑스인들의 전형적인 바캉스는 툴롱, 칸, 니스로 이어지는 프랑스 남동부 해안(French Riviera)에서

지중해의 파도와 햇빛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바캉스란 말이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은 1960년대 중반 무렵이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니 위 사진이 있는데 1956년의 해수욕장 모습이다.

1950~1960년대에도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달려가 더위를 식혔다.

변변한 수영장 하나 없고, 일반인이 해외에 나가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던 시절에는

가까운 계곡이나 바다를 찾아 더위를 이기는 것이 최고의 피서였다.

당시에는 가까운 시냇가, 한강, 뚝섬유원지, 근교 수영장 등에서 물놀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버스나 기차를 타고 대천이나 송도, 해운대 해수욕장 등으로 피서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60년대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6월호에서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한국인의 바캉스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있어

바캉스 이야기를 계속 해보자.

1965년 <중앙일보>는 '제1회 하기 바캉스 회원 모집: 시원한 바다에의 초대'라는 자체 광고를 싣고 있다.

7월 24일부터 30일까지 선착순 100명을 모집해 시설이 좋은 대천관광호텔을 숙소로 제공하며

자사 소유의 TV 전속 가수와 코미디언까지 동원해 카니발과 쇼, 캠프 파이어의 밤을 제공하겠다는 광고였다.

66년에 월 신문 구독료가 130원이었는데 당시 회비가 3천900원이었으니 꽤 비싼 가격이었다.

내 생각에는 이 광고가 우리 사회에 바캉스란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공식적인 자료가 아닐까 싶다.

1966년 8월 6일의 <중앙일보>는 연 600만 명이 바닷가를 찾아 즐겼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캉스 붐이 일면서 바캉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범죄 기사도 등장하는데 이는 해마다 보도되곤 했다.

또 1967년에는 바캉스 인파가 서해와 남해에서 점점 동해로 이동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기사도 있다.

바닷가 상인들의 바가지를 언급하는 기사도 이미 이때 등장하고 있다.

1968년에 피서 열차로 특별 편성한 파도호 모습이다.

1968년 7월 21일부터 31일까지는 30만 명이 넘는 서울시민들이 바캉스를 떠났다고 한다.

30여 만 명이면 적은 숫자라고만 할 수는 없다.

1968년 서울 인구가 약 380만 명이었으니 10명 중에 한 명이 바캉스를 떠난 것이다.

그런데 1960년 서울 인구가 약 245만 명이었다. 불과 8년 사이에 136만 명 이상이 증가한 것이다.

다시 말해 1968년에 서울의 거리에서 만나는 세 명 중에서 한 명이

요 몇 년 사이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다수가 농촌에서 서울로 먹고살자고, 일자리를 찾아서, 잘 살아보자고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이들 다수가 서울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을 리가 만무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 빈민이 되었을 것이다.

1968년 7월의 마지막 일요일에는 한강 백사장, 우이동이나 도봉산 계곡으로 30만 명이 몰렸고,

이날 하루 익사자가 12명이 나왔다고 한다.

1969년 8월 17일에는 전국의 해수욕장과 유원지에 150만 인파가 몰렸다.

이날 하루 익사자만 34명이었고, 각 곳이 혼란하고 무질서했으며,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경찰에 잡혔다.

물론 바가지 요금도 기승을 부렸다.

1970년 드디어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어 개통한다. 산업의 동맥이었지만 바다로 떠나는 탈출구이기도 했다.

위 사진은 서울 강남의 양재 부근인데 그야말로 한적한 농촌 풍경이다.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이 안 간다.

당시 서울에서 대전까지 버스로 8시간이 걸렸는데,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점심을 부산에서 먹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해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가 발표되었다.

이 노래를 듣고도 바다에서의 멋진 데이트를 꿈꾸지 않은 청춘이 있었을까?

바캉스의 유혹을 이길 젊은이들이 있었을까?

1972년 7월 23일 피서 열차 풍경이다.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구식 증기기관차까지 동원해 임시 열차를 편성했지만 초만원이다.

피서객들이 위험을 무릅쓴 채 열차를 타고 피서지로 가고 있다. 바캉스에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보인다.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피난민들이 탄 열차 같다. 그런데 정말 피난 열차였는지 모른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긋지긋한 일상을 탈출해 남들이 다 간다고 하는 피서지로 피난을 가는 열차 말이다.

1982년에 통행금지가 사라졌으니 당시에는 엄연히 통행금지가 있었다.

그런데 바닷가 해수욕장에서도 밤 12시 이후에는 통행이 금지되었을까?

<해변으로 가요> 가사에 "별이 쏟아지는 ...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 하는 부분이 있어 드는 생각이다.

강준만 교수의 글을 보니 공식적으로 통행금지는 있었지만 한결 느슨했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의 해수욕장 풍경이다.

당시 언론에는 피서지 해수욕장에서의 일을 성토하는 기사들이 많다.

그 기사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바캉스의 해수욕장 하면 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부터 막히기 시작하는

교통 체증, 물 반 사람 반인 바닷가, 쓰레기, 뒹구는 소줏병, 동네 건달들과 취객들의 행패,

상인들의 지나친 호객 행위와 바가지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기억들이 많다.  

노는 것도 일처럼 하는 한국 사람들은 바다로 가서 노는 것에도 목숨을 걸었는지 모른다.

살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로 민족 대이동을 했던 사람들이 1년 내내 죽도록 일하다가

1년에 딱 한 번 있는 휴가 시즌이 되면 이번에는 바다로 해수욕장으로 악착같이 민족 대이동을 했던 것이다.

바캉스는 바캉스를 떠나야 여름을 제대로 보낸 것이라는 통과의례가 되었고,

힘들고 지긋지긋한 일상에서의 탈출과 일탈을 잠시나마 허용하는 통로였고,

남들이 가는 피서를 나도 다녀왔다는 보상심리가 작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바캉스 시즌도 함께 시작된다.

하지만 내 성향은 사람들이 몰리는 해수욕장보다는 호젓한 바닷가 쪽이다.

휴식을 위해서나 사랑을 위해서나 낭만을 위해서나 말이다.

지금도 사람 붐비던 해수욕장에 대한 기억은 부산했고, 정신없었고, 어수선했다는 것들이 다수다.

그나마 과거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게 하는 건 한적한 바닷가에서의 일들이다. 

나 역시 여름 하면 <해변으로 가요>가 생각난다. 50대 아저씨인 것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