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교적 문단행사에 적게 참여하는 편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참여하기도 한다.
그냥 모임을 알리는 소식이 오면 대부분 묵살해 버린다. 그러나 주최자가 직접 전화를 해서 내가 꼭 나가야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간곡히 참석을 부탁할 때나, 축사같은 것을 부탁할 경우는 참석을 한다.
지난 3월달은 유난히 내가 거절하지 못한 문단행사가 많았다.
간단히 기록하여 두고자 한다.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은 소설가 이호철 씨의 8순 기념 진치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는데, 주로 진보계열 문인들이 참석하였다. 백낙청, 염무웅, 이시영, 이선영,임헌영,신상웅, 이부영(정치인)씨 등과 한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고 이호철씨와 사진을 한 컷 찍었다. 나는 이호철 씨의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탈향>이 가장 인상 깊었다는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 그의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닳아지는 살들>이라는 단편 소설은 읽은 적은 있지만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이호철 선생과는 세교는 없지만 서로들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 무슨 행사가 있으면 꼭 연락을 하시고 참석을 부탁한다.
실천문학사 주주총회가 있었다.
실천문학사가 경영자의 실수로 파산하고 만 것이 14년 전이다. 실천문학에 글을 발표하고 있던 문인들이 모여서, 실천문학사를 해체하고 주식회사로 발족시켰다. 나도 주식 500주(주 당 만원)를 사서 당시로는 대주주로 참여하였다. 2억 정도의 주식대금이 모였다. 소설가 김영현 씨가 대표이사를 맡아 경영하여 회사 자산 11억, 월 수금액 1억 정도의 회사로 성장하였다. 김영현 씨가 이제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와서 회사의 획기적인 임원개선이 있었다. 김영현씨가 나에게 전화를 해와서 최고원로 주주이시니 꼭 좀 참석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다. 조금 늦게 도착하였으나, 나를 헤드테이블에 앉히는 등 대우를 했다.
14년간 한번도 주주총회가 성원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의결되고 집행되어 불법이 아니냐고 한 주주가 이의를 제기해와서 회의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김영현씨의 실책을 신랄하게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소 불법적인 사항이 있었더라도, 기왕에 집행된 것은 재심하지 않는 것이 대법원판결이라는 사실을 내가 지적하였다. 대학사회에서 두 학과를 통합하는데는, 두 학과에 소속된 교수들과 학생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장이 밀어부쳐, 한 개의 학과로 학생을 뽑았을 때, 여기에 반발한 두 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소송하여 대법원까지 갔으나, 판결은 분명 불법적인 과정이었으나, 기왕에 통합하여 새로운 학과로서 학생을 모집하였으니, 현행대로 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있었음을 예로 들었다. 주주들이 다들 승복하였다.적당한 시간에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일어서 나왔다. 실천문학의 새로운 도약을 빌었다. 윤지관교수, 김재용교수, 최두석교수, 방현석교수, 이은봉 교수, 공광규 교수, 이재무시인, 맹문재 시인, 손택수 시인등을 만났다.
나는 실천문학사에서 장편소설 <바람의 여인>을 출간한 바가 있다.
대학에 교수의 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한국작가교수회의> 총회가 문학의 집에서 있었다. 사실 이 모임은 나의 아이디어에 의해 홍성암씨(동뎍여대)씨가 주동이 되어 만들여졌다. 근 십년의 연륜이 쌓였으며, 그간 한 호도 걸르지 않고 10호 이상의 무크지를 출간하였다. 그간 회장의 명담을 보면, 일회는 유금호(목포대), 2회 김용성(인하대), 3회 조건상(성균관대), 4회 홍성암(동덕여대), 5회 정소성(단국대), 6회 박정규(서울산업대), 7회 이진우(대전대),8회 서용좌(전남대) 등이다. 나는 이 잡지에 여러편의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기억나는 것은 창간호에 발표한 <50년>이다.
이 모임의 2010년도 총회가 열렸는데, 서용좌 교수는 200만원의 찬조금을 갹출하였고,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전남대학교에서도 1백만원을 갹출하였다. 이 모임에서 출산하는 문예지는 대부분 해당기에 회장을 맡은 분의 호주머니에서 해결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나의 경우, 삼성문화재단에서 찬조를 받아 해결하였다. 나는 이 모임이 있는 날 지방 여행중이었으나, 늦게 나마 참석할 수 있었다. 여행을 같이 했던 사람들과의 회식이 약속되어 있어서 이모임에 오신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해 섭섭하였다.
내가 중편 소설 <불>을 발표한 <시에>라는 문예지에서 창간 5주년 기념모임이 있어서 사전에 축사를 부탁하는 전화가 왔다. 발행인이고 주간이신 양문규씨는 실천문학의 편집실장출신으로 실천문학의 주시회사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의 뜻을 펴기위해 퇴사하여 시에(시와 에세이)를 창간하였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0명 정도 모였는데, 최근 문인들 모임에서 이렇게 많은 문인들이 모인 것을 처음 보았다.
문단에서는 진보경향의 문인들의 작품을 수용하는 문예지로서, 흔히들 <창작과 비평>,< 실천문학>, <시에>를 든다.
최근 경향으로 보아, 시에에 가장 많은 젊은 문인들이 운집하는 것같다. 이명수 시인, 최승호(서림)시인, 이재무시인, 하종오 시인,김선주 평론가 등을 만났다.
여기서 진보경향의 문인이라 함은, 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이나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현대문학>이 발표무대가 아닌, 주로 새로운 문학단체인 <한국작가회의> 계렬의 문인들을 말한다. 이 단체는 오랜 군인정권의 체제 수용을 거부하고 집요하게 저항적인 자세를 취했던 문인들의 모임이다.
나는 축사에서, 시에를 좀더 대중화하고 독자에게 가까이 하기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언론과 가까와지고, 행사를 많이 벌릴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양문규 주간의 용기를 축하하기 위해 그를 단상으로 불러내, 그의 이름을 연호하게 했다. 그의 환송을 받으며 일찍 식장을 떠났다.
민중시인 이소리씨가 문학전문 웹진 <문학 in>을 창간하여 축하하는 모임을 인사동에서 가졌다. 원로 문인이신 이기영시인, 사전편찬자 박용수선생, 강민 시인,평론가 임헌영 선생, 동아일보에 있다가 사직하고 고향 해남에 내려가 있는 윤재걸 씨,여류작가 윤정모씨 등 30여명이 모였다. 과거 계간지 <문학과 사회>를 창간하여 3년이상 간행하였고, 민중지인 <오마이뉴스>에 기자로 참여하여 오프라인과 인터넷매체에 두루 경험을 가진 이소리씨가 천신만고하여 만든 웹진이다. 성공하기를 비는 마음 절실하다. 민중시인 오우열씨가 장고를 메고 나와 노랫가락을 불렀는데, 아무도 노랫싻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와 윤재걸씨와 편집주간인 유시연씨가 지갑을 털었다.
옛 중앙정보부장 공관이 있던 남산 북쪽 사면 자리에 <문학의 집, 서울>이 들어선 것은 알려진 일이다. 문학단체가 이런 독립된 사옥을 가진 것은 아마도 이 단체가 처음이자 유일할 것이다. 문협도 예총회관 안에 방 한 칸을 배당받아 쓰고 있고, 소설가협회도 마포에 작은 오피스텔 한칸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리나 <문학의 집>은 수백평 대지에 번듯한 본관 건물과 2층짜라 대강당을 갖추고 있다. 대강당은 새로지어 경관이 수려하고 시설이 첨단화되어 있다. 이사장이신 김후란시인의 능력의 탓이다.
며칠 전 김후란씨가 전화를 하여 꼭 좀 참석해달라 하여 나갔다. 문단 최고원로 시인이신 김남조 시인이 나오셨다.낯모르는 문인들이 많아 좀 어색하였으나 서로들 반갑게 인사하였다. 나는 6년간 회비를 내지 않았음을 알았다. 내가 얼마나 문인모임에 등한히 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지갑을 털어 우선 2년치를 지불하였다. 성춘복시인, 강민 시인,조병무 평론가, 유자효 시인, 감태준 시인, 김송배시인, 김일주 사진작가 등 주로 보수계렬 문인들을 만났다.
중앙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소설가협회에서 전화가 왔는데, 경영이 어렵다면서, 30만원 정도의 광고를 하나 달라는 것이었다. 주저없이송금하였다. 소설가협회장인 이동하선생이 전화해서 감사를 표하였고, <계간문예>의 편집책임자이신 김정례씨가 감사의 점심을 사겠다고 하여 사양하였으나 꼭 나오시라고 해서 나가 점심을 얻어 먹었다. 나는 소설가협회 기관지인 <한국소설>에 중편소설 <불>을 발표하였고, <계간문예>에 중편소설 <회항>을 발표한 적이 있다.
경기대학 국문학과를 정년하고 고향 충남 광천에 인장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이재인 씨가 다음 주 화요일(29일) 점심을 청하여왔다. 최근 50일간 미국방문을 하고왔다면서 청한 것이다. 그는 최근 나에게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화벽문학>에 중,단편소설을 청탁하였는데, 원고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나의 생활이 원고료에 의지할만큼 어렵지는 않지만 원고료없이 원고를 받으려는 풍토가 가셨으면 좋겠다. 어떤 글 한 줄을 쓰고 다음 줄을 쓰지 못해 몇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얼마나 작가 시인이 고심하여 글을 쓰는지는 이교수 자신이 잘 알 것이다. 이교수를 만나면 이 점을 꼭 지적할 작정이다.
문단인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진보문인이니, 보수문인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실례일 것같다. 그러나 문단에는 분명 그런 구별이 있으며, 이들은 같은 시대 같은 대한민국의 문인들이면서도 서로 내왕을 하지 않는다. 경조사 왕래도 하지 않는다. 정계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그렇게 싸워도 서로 술도 마시고 내왕을 하는 것을 보면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서로들 내왕을 하지 않으니 서로들 잘 모른다.
나의 경우, 어찌다가 정말로 나 자신도 잘 모르게 양쪽에 다 참여하는 경우가 되고 말았다. 나에게는 정말 정다운 문우가 있을 뿐이지 진보계니 보수계니 하는 구별이 없다. 보수계의 노련한 원로문인들도 존경할만하고, 진보계렬의 젊은 문인들도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두 계렬의 문인들의 그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쳐진 담장을 허물고 자유롭게 내왕하면서 서로의 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세월이 왔으면 좋겠다.
3월 한달 정말 문단의 아웃사이더인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바쁘게 행사에 쏘다녔으니, 적극적으로 문단 참여를 하는 문인들은 얼마나 바빴겠는가. 문인이 문단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면도 있다. 문인은 문학으로만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쓰지도 않으면서 문단행사에만 적극 참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동업자들과 소원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지나놓고 보니, 김영현, 양문규, 이소리 세분은 진보문단을 지켜운 노련한 문인들로서 그들의 역할이 크다할만하다. 나름대로 작품발표의 지면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첫댓글 윗글은 소설가이신 정소성 선생님의 3월 문단활동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