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 안에서
두 분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학자들이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중에 한분이 1007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다미아니’이고,
다른 분은 1925년에 성인품에 오른
예수회 소속 ‘성 베드로 카니시오’이다.
교회를 빛낸 성 베드로 다미아니는
교회가 많은 점에서 타락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이 윤리적으로 형편없었다.
특히 평신도들이 돈으로 성직을 사서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는 성직매매(聖職賣買)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교회의 근간이 위태롭게 된 시절이었다.
베드로 다미아니는
라벤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어 고아가 된다.
처음에는 결혼한 형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형은 동생을 심하게 부려먹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고생을 많이 하게 되었다.
결국 라벤나의 사제로 있는 다른 형 다미아노가
그를 데리러 와서 사제관에서 함께 살게 해 준 것은
베드로에게 참 해방과 같은 기쁨이었다.
어린 시절의 어려움은
후에 그의 제자가 된 로디의 요한이 저술한
전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형 다미아노는
동생 베드로에게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비용으로 공부를 하게 도와주었다.
베드로는 형 다미아노 신부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그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베드로 다미아니’로 불렀다.
베드로 다미아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1035년 수도원에 입회하여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도자들에게 행한 그의 신학적 가르침,
그의 박학함과 성경에 대한 지식은 소문이 나서
다른 수도원에서도 강론을 요청받게 되었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고,
성경와 교부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은수자로 생활하던 중
1043년에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그 후 성 베네딕도와 성 로무알도의 이상을 결합시킨,
‘은수자적이면서 공동체적인 규칙’에 따라
수도 생활을 개혁시켰으며,
다섯 개의 은둔소를 더 세웠다.
1057년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의 아빠스였다가
교황이 된 스테파노 9세는
본인의 반대의사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다미아니를
오스티아의 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서임하였고,
교회개혁 운동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평신도들의 성직 매수를 강력히 반대하였고,
훌륭한 강론을 통해
신자들을 자신의 개혁의향으로 이끄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베드로 다미아니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지원을 받아
교회개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여러 번 대립 교황들에게 대항하였으며,
교회회의 참석,
밀라노, 독일과 프랑스 나라들에 대한 외교 활동,
개혁을 위한 저술 등의 노력으로
교회의 공적인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순수성과 권리를 회복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또한 매일의 영성체를 영적 양식으로 삼게 하여,
신자들을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성인은 가는 곳마다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소시키고,
자신의 생활모범으로 사람들을 겸손과 희생
, 속죄와 참회의 길로 인도하였다.
성 베드로 다미아니는
교회의 정치가이면서 개혁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에 거론되던 모든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고 전통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의 신학적이고 수덕신비적인 작품들은
이론적이기 보다는 실천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그가 중세 시대에
위대한 라틴 문장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성경를 비롯하여
라틴 교부와 그리스 교부들의 작품들,
고대 라틴 문학과 로마법, 특히 교회법에 대한
그레고리오 교황 이전시대의 전집 등으로부터
풍부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에게 성 예로니모를 연상시키게 하였다.
또한 베드로 다미아니는 ‘가난한 공동체 생활과
은수자적 생활이 모든 이를 위해 가장 좋은 삶’이라는
수도자적인 이상에 기여하였고,
성직자들의 교회법적 생활을 옹호하였다.
그리하여 자발적인 청빈의 사도였던 성인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선구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베드로 다미아니는 1072년 파엔차에 있는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현재도 그곳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교황 레오 12세는
1828년에 교회를 위하여 바친
성인의 지대한 공로와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베드로 다미아니가 제7천국에 있다고 하였다.
성 베드로 다미아니는
두통을 없애주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
많은 신자들의 그의 전구를 청한다.
글...청주주보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