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절은 내게 구름 너머로 보이는 하늘 같았다. 무엇이 있는지 알지만 하얀색에 가려 희미하게 유추하는 그런 것. 아니 에르노의 글을 통해 생생하게 접한 경험은 충격적이다. 그녀가 표현하는 방식이 담담해서 더욱 그렇다. 젊은 여성이 불법의 범주에 속하는 임신 중절을 해내기 위하여 접하는 일은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다. 성행위의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남성과 임신 중절을 위해 알음 알음 정보를 찾는 작가에게 닥치는 매정한 태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위험한 임신 중절의 방식.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문구가 아프게 와닿는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불구의 신체, 불치의 병을 얻는 것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작가의 눈을 통해 보는 현실은 끔찍하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사회가 다루는 임신 중절에 대한 이미지에 잠식되어 버린 나의 시선이다. 두 번째 탐침관 삽입 이후 중절에 성공하는 장면을 읽으며 나는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허벅지 사이에 달린 것과 탯줄을 자르고 변기에 물을 내리는 장면까지. 그 장면은순간적으로 잔인하게 느껴졌다. 죄의 순간을 목도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 행위가 잔인해서가 아니라(잔인한 건 어린 여성 혼자 위험한 방식으로 중절을 감당하게 만드는 사회이다) ‘낙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오랜 기간 내 머리 속에 심겨진 오만한 사회적 관점 때문이다. 내면에 가려져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이런 여성혐오를 마주하며 이런 지배적 가치관이 보편이 되어 그녀를 변기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또 다른 죄책감을 겪는다.
작가는 이후에 임신을 결심하는 것을 “재생산이라는 폭력”이라 표현한다. 자연의 이치 혹은 섭리라는 이름으로 임신을 성스럽게 묘사하는 동안 여성들은 폭력 아래에서 고통받는다. 임신을 받아들이는 여성과 거부하는 여성 구분없이 이 과정은 폭력적이다. 자궁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몇개월을 지내고 꺼진 배를 바라봐야하는 것을 폭력적이라고 묘사하는게 그렇게나 공격적일까? 어쩌면 이 표현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야 하는 하늘의 뜻’ 같은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