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백두산 편을 올려야 하나 사진이 어디 저장되어 있는지 감감합니다...
그래서 순서를 틀어 심양 여행기를 먼저 올립니다. 그리고 아래부터 존대어를 생략합니다^^
여행기라보다 소개글 경향이 다분합니다. 글이 길어 고궁편은 두 편에 걸쳐 올리겠습니다. 재미는 없습니다^^
아.글 올리는 거 힘듭니다 ㅋㅋ 아..집에서 해 주는 밥 먹고 싶다^^
5월 24일 13시경 심양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인터넷으로 알아봤던 열차시각은 얼마 전
변경되어 터콰이(특급)가 아닌 푸콰이에 몸을 맡긴다. 중국의 기차는 종류에 따라 같은 구간이라도
소요시간이 엄청 차이가 난다. 특급이면 대련-심양이 4시간이지만 보통열차는 6시간 정도 걸린다.
내가 탄 기차의 루완 쭤 내부로 등받이가 직각에 가까우며 대면배치구조로 되어있다.
의자 가운데는 자그마한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다 . 루안쭤는 단거리 구간 일부에만 배차하는 게 일반적이다.
심양(沈陽)은 渾河(혼하, 고대에는 沈水라고 불렀음)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풍수적으로 물의 북쪽을 陽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沈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심양은 알다시피 조선 인조 때 우리나라를 침략한 청나라의 초기 수도이다.
1625년 청태조 누르하치는 遼陽(요양,랴오양)으로부터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1634년 청태종 홍타지는 심양을 盛京(성경)이라 봉하여서 國都로 하였다.
1644년 청조의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긴 후 심양을 陪都(배도: 國都 이외에 둔 수도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명나라의 국도는 남경이었으나 금릉(金陵)을 배도로 삼았고, 청나라때에는 심양,
2차대전 중에는 중경을 배도로 삼았다)로 삼았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1667년 심양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였으며 1945년 심양이란 이름이 다시 회복되었다.
1948년 11월 2일 심양은 인민해방군이 점령하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요는 이 정도로 하고^^
심양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서탑(西塔) 에 위치한 민박집으로 향한다. 심양은 상해, 북경, 천진에 이어 4대도시이다.
저녁 늦게 도착해서 민박집에서 저녁 먹고 아주머니랑 야그 좀 나누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지도, 카메라를 챙겨 들고 고궁 가는 버스를 탄다. 지도에 버스노선도 자세히 나와 별 문제없다.
길도 반듯반듯해 지도로 내 위치 찾기도 목적지 찾기도 편리하다.
심양시는 자그마한 언덕도 없을 정도로 평탄한 지형이다. 따라서 지형의 굴곡에 따라 건물이나
길을 낼 필요가 없이 바둑판 가로, 세로줄처럼 반듯반듯하게 시가지가 정리되어 있다.
유적지 주변에 아무런 지형적 배경 없이 건물만 들어서 있어 한국의 고궁에 비해 드라마틱한 감은 훨씬 떨어진다.
고궁 숭정전 외부와 내부. 맞배 지붕이며 건물 양 가장자리에 돌기둥을 올려 조각했다.
울 나라 궁 건물에 비해 색감이 화려하다는 느낌이다. 홍색과 청색이 주로 쓰이고 금색칠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숭정전’ 한자옆에 꼬물꼬물한 글자가 만주어인가보다. 내부를 보자니 금색으로 치장한 용상이 ‘나 잘났다’ 하고
떡하니 자리잡고, 입 벌린 용가리가 기둥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숭정전 뒷편의 계단과 후면 전체사진이다. 건물 자체는 아담하지만 건물을 둘러싼 난간과 계단의
조각 새김새는 정교하면서 화려하다. 돌이 희면서도 청색 기운이 많이 도는데 표면은 시멘트로 미장한 마냥
매끄러운 느낌이 난다. 우리나라의 화강암은 약간 거친 느낌이 나면서 힘이 넘쳐 보이는데 이 고궁의 돌들은
화강암에 비해 다루기도 용이해 보이고 여성적인 느낌이 난다. 숭정전이 모하는 곳인지 현장에서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궐의 명칭이나 용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황제가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곳이 아닐까?
경복궁 근정전에 비해 아담하고 심양 고궁 내에 대정전이라는 또다른 정무 장소가 있으니 간단하고 규모가
작은 업무에 쓰인 것으로 추측해본다^^
설명판을 보니 봉황루란다. 청태종 연간(1627-1635)에 지어진 것으로 황제와 황비의 독서처나
간단한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 북경 천도 이후에는 역대황제 옥새와 초상화를 보관해두었다 한다.
봉황루는 청대 심양 고궁 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새벽에 봉황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성경(북경 천도 이후 심양은 성경이라 불렸다.) 8경중 하나로 꼽힌다고 적혀있다. 못 올라가게 해 놨으니
내 알 바 아니지만 말이다. 3층 누각인데 생김새야 사진에서 보이는 그대로이고 내가 설명할 실력도 없다^^
단지 3층 지붕 망새 옆에 피뢰침 2개가 솟아있는 게 흥미롭다. 다른 건물도 보아하니 좀 높다 싶으면 달려있다.
머 산도 없고 평평한 동네이니 그럴 듯 싶다. 근데 울 나라 궁궐에는 달려있나?^^
신간(Divine pole)이다. 만주족 전통적 샤머니즘 관습에 따른 것으로 솟대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이는 것으로 꼭대기 반구 안에 곡식과 각종 고기를 넣어 하늘새인 까마귀에게 바친다.
삼족오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북아에서의 까마귀 신성화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신간이 자리한 곳 바로 옆에 자리잡은 건물이다. 이것 역시 청태종 연간에 지어진 것으로
심양 고궁에서는 중궁(中宮)이다. 출입문에서 오른쪽 한 칸이 태종과 그 마누라 침실이고
출입문 왼쪽의 4칸이 제사 지낼 때의 신당인 동시에 연회를 베푸는 곳이란다.
천도(遷都) 이후에 황제들이 동쪽으로 순례할 때 당연히 옛 법도에 따라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이 건물은 만주족 전통적인 주택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당과 침소가 같이 있을 수 있나?
우리나라도 일반집에서야 그렇지만 궁궐이나 되는 큰 집에서 그리 한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묘와 사직단이 따로 있는데..음..어렵다^^ 만주족 전통가옥구조의 전형이라는 설명에서 연유성이 있나 싶다.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관리자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중국인들이 거의 사진을
안 들이대서 나만 뻘줌하게 찍을 순 없었지만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내부를 찍었다.
내부천장은 나름 치장했지만 바닥은 큰 장방형 벽돌로, 벽은 그냥 회칠로 마무리하였다이다.
가구들도 다 소박하고 내부도 그리 넓지 않아 정말 간단한 연회만 가능하다.
하긴 건국초기였으니 화려한 생활보다는 세력확장이나 내부단속에 힘쓸 때이니 검소하게 살았을 것 같다^^
.
심심하기까지 한 고궁 내에서 후원과 그것을 둘러싼 담장과 건물 지붕과 처마선이 나름 한 바탕 구경감이 될 만하다.
후원을 보다보니 정원, 후원, 조경, 자연관 이런 단어가 계속 연상이 된다..우리나라와 중국,일본 정원의 차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만 글이 그럼 넘 길어진다..보는 입장에선 사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므로 사진만 보시라^^
첫댓글 아직 베이징 자금성은 안 가봤지만 우리나라의 고궁이 심양 고궁보다는 몇 배 좋습니다..분위기하며 고졸함이 비교할 정도가 아니죠^^
감사합니다 다녀왔지만 이렇게 공들인 사진 덕분에 더욱 새롭네요 ..글구 우리나라 고궁이 작지만 아주 아름답지요...베이징 자금성역시 크기는 심양 고궁에 비할수 없으나 꼭 가셔서 새롭게~~~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