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잔치를 함께 즐깁시다./ 누가복음 15:1-10
<잃은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관한 비유>는 말 그대로 당시 사회에서 배척당하던 세리와 죄인들의 회개를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와 더불어 누가복음에서 세리와 죄인과 이방인의 친구였던 예수를 소개하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이나 특히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주님 곁에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 넓히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잃은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이런 비유를 들어야하는 청중은 누구일까요? 더 나아가서 2000년 전의 이야기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식사자리에 동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왔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는 “예수는 죄인들을 환영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판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가 벌인 잔치를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런 비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실 잃은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스스로 돌이켜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직접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목자는 산으로 들로 나가고, 여인은 온 집안을 뒤집니다. 찾고 나서는 동네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풉니다. 아마 찾은 양 값이나 드라크마 은전 보다 잔치비용이 더 들었을 것입니다.
잃었다 찾은 그 죄인 하나를 하늘에서 더 기뻐할 것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여기서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보면, 아흔아홉의 양떼를 소홀히 한다거나, 주머니에 남은 아홉 드라크마 은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0마리의 양, 그리고 10개의 은전이 되어야 원래대로 회복되어 “온전한” 모습이 된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를 듣고 깨달아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는 청중은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이 주목할 것은, 잃은 양과 은전은 그 주인의 노력과 수고에 따른 결과라는 점입니다. 주인이신 주님께서 직접 당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끝까지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잃은 양과 잃어버린 동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면, 지금 주인이 자기를 지금 애타게 찾고 돌아다닌다는 것을 의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세리와 죄인이 스스로 나는 버림받았고 돌아갈 희망조차 없는 존재라고 절망하거나, 나 같은 못난 것은 주인이 다시 찾지도 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의심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잔치를 베풀고 세리와 죄인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초대하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합니다.
반대로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종교의 내부인들로써 다시 돌아오는 죄인들과 함께 잔치자리에 앉을 마음을 만들어야합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교회내부인 즉, 교회에서 직분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는 열정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앞장서서 하나님을 찾는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세리와 죄인, 요즘말로하면 신앙적 열심히 없거나, 그다지 경건해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거리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주님이 차린 잔치식탁에 그들과 함께 앉아 축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는 저 가망 없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즐거워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는 너희들은 그 이유로 나와 더불어 이 잔치의 식탁에 앉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베푼 잔치자리는 주님을 스스로 찾는 사람들에게만 열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찾아 모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열린 식탁입니다.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만찬인 성찬식의 식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평화목교회의 잔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베푼 잔치입니다. 여기서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친밀함으로 대하는 마음이 충만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평화목 교우 여러분, 이 비유의 주인공은 저와 여러분들 모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합니다. 하지만 어느 편에 있던지 주님의 비유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변화할 마음을 품고 살아야합니다. 주님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누구나 그 자리에 와서 즐기며 기뻐하는 공동체의 삶을 소망합니다.
2024년 9월 15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