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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순수성을 믿지 않는 시대
"나는 이태석 신부도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돈이나 출세를 욕망하는 것에 반해, 그는 지위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그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러니 특별히 그를 존경해야 할 이유가 없다. 투자에 불과한 나눔을 선으로 포장하는 교육이 너무 싫다."
익명 피드백이기는 했어도, 용감한 학생이었다. 성적 때문에라도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한국 학생들의 특성상, 나눔을 주제로 한 인성교육수업에서 나눔도 결국 ‘자기가 좋아서’ 혹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이기적 행위일 뿐이라는 반론을 교수에게 거침없이 피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종류의 피드백을 가끔 받아온 터라 이번에는 학생들에게 이 피드백을 공유하고 의견을 들어보았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사실은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수업 분위기상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끊임없이 ‘비판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던 내 말이 효과가 없었다는 증거였다. ‘나눔’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하는 도덕적 소양이지만, 그것이 학점을 주는 ‘도덕교육’이 되는 순간 교육의 참된 목적이 제대로 전달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이를 두고 단순히 교육방법론의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제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나눔을 고도로 전략화된 ‘이기적 행위’나 다름없다고 이해하는 방식이 세상을 압도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스크루지나 놀부 이야기 등을 통해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는 베갯잇 도덕 교육의 시대는 끝이 났다. 주식이나 부동산 분야뿐 아니라, 일반적인 기업 활동에서도, 학교나 학원에서도, 심지어 부모의 자녀 교육에서도, 우리는 이제 “자기 욕망에 충실하라. 타자에 대한 호의는 투자일 때나 가능하고, 투자가 아니라면 최소한 손해 보지 않을 정도의 교환가치라도 있어야 한다”는 식의 노골적인 말을 수없이 한다. 그러니 목숨까지 내놓으며 이웃에게 헌신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줘도 감동과 교훈이 생기지 않는다. ‘이해 불가능한 인물’이라며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거리를 두거나, ‘이기적이어서 이타적인 인물’일 뿐이니 ‘나와 전혀 다를 것 없다’고 아예 거리를 없애버린다.
순수한 나눔을 존경하는 시대가 저문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의 순수성을 철썩 같이 믿고 따랐다가, 뒤늦게 드러난 위선적 행실에 깊은 좌절과 분노에 빠진 경험이 많다. 그래서 나누는 자의 순수성에 기대어 나눔 문화를 전파하려고 한다면 공든 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실패하기 쉽다. 존경받는 사람의 나눔 동기가 순수한 사랑이나 이타심에서만 나올 것이라고 믿는 것은 대중의 막연한 희망일 뿐이다. 나눔의 동기로서 순수성은 불교 용어로 ‘찰나’에 인간 마음에 깃들 수는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한 순수성 자체로 평생을 살 수 없다. 정말로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순수하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일수록, 절대적 기준 앞에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순수하지 못함을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자기가 행한 나눔의 순수성을 떠벌리는 자일수록 가짜일 확률이 다분하다.
왜 이렇게 나눔의 순수성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거나 믿지 않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다시 말해, 왜 나눔을 나의 유익과 상관없이 해야 하는 ‘옳은 행위’로 보지 않고, 내가 살기 위해 하는 ‘본능적 행위’로 강등하여 이해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일까? 나눔 윤리학의 본론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나는 이 문제를 먼저 다루고 싶었다. 사실 이 문제야말로 생물학과 시장경제의 원리가 윤리학과 종교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을 이전과는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핵심 질문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이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나눔 윤리학’을 다시 써보자는 도전이 스스로 생각해도 다소 애처롭기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윤리학의 담론이, 또 기독교 신앙이 꼭 필요하다고 다독인다.
윤리적 고민을 지우는 명제: 인간은 동물이다
‘나눔’을 이기적 행위의 일종으로 단언하는 현대인들은 (자각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명제로 매개되는 3단 논법, 즉 ‘동물은 이기적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기적이다’를 따른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논법은 서양 철학과 기독교 신학, 그리고 이와는 완전히 이질적 학문인 현대 진화생물학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가상의’ 신념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인간을 동물(자연)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해 왔다. 불교는 인간이 아무리 수행을 통해 연기(緣起)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 나아가 우주 전체가 상호의존 관계 안에 묶여 서로의 원인이자 조건이 된다고 가르친다. 성리학의 경우도, 사람의 몸을 매개로 사람 몸 안의 마음과 사람 몸 밖의 자연이 서로 동일한 인(仁)으로 교통하며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을 동물이라고 선언하는 서양 근대의 관점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동양의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배경과 의미를 지닌다. 원래 서양에서는 고대 인문주의 철학과 중세 기독교 신학을 거치며 인간/동물을 위계적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이 아주 오랫동안 강하게 자리 잡아왔다. 인간의 본성은 이성의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이타성을 향해 있지만, 동물의 본능은 생존을 위해 감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악을 행하는 이기성에 충실할 뿐이라고 여겨왔다. 위계적 이원론은 인간 내부적으로도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를 연속적으로 분리함으로써, 본성인 정신성이 본능인 육체성을 지배하고 통제하도록 하는 서양 전통의 윤리학을 정립하였다. 특히 이러한 이원론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감각적 욕망에만 사로잡힌 동물과 자연계 일체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우월한 존재라는 의식을 북돋으며, 근대 제국주의와 산업자본주의의 탄생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자연(동물)에 대한 지배와 착취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서 초래되는 것이다. 그러니 서구 근대의 자본주의 경제학은 이성의 선의지를 통해 탐욕을 다스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서양 전통의 윤리학과는 궁극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했다. 자기 본위의 욕망에 충실한 활동을 마음껏 펼치며 ‘동물 인간’의 자유를 누려야 자본주의 경제가 활발히 성장할 수 있는데, 자기 욕망을 마음껏 부리는 행위에 이기적이라며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세상에서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와중에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에 속하는 동물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인간을 구분하는 진화생물학의 탄생은 서구 지성사의 오랜 이원론적 인간 이해의 틀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특히 “인간도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직관적으로 펼쳐온 이들에게 인간이 동물일 수밖에 없는 객관적 증거들과 확실한 논리 체계를 제공하였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존재론적 격차에 기초하여 ‘인간다움’을 정립하고 그 위에 인간 지성의 가치와 윤리적 실천의 당위를 세워 온 서양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관점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에게는 정말 거칠 게 없었다. 이기적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니,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해도 되었고 열등한 것을 쉽게 제거할 수도 있었다. 약한 이들이나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해도 되었다. 어차피 각자도생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단 한 가지의 이유만으로 변호되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단 한 가지의 이유, 바로 그것이야말로 근대 이후 서양 사회뿐 아니라, 서양의 자본주의가 이식된 모든 사회에서 발생한 탐욕과 폭력, 전쟁 등의 원인을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되었다.
물론, 이전의 중세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탐욕을 부렸고 폭력이나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시절 사람들은 신이 주신 권위에서, 혹은 신의 이름으로 변명거리를 찾았다. 대부분은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의해 신이 주신 권위를 잘못 사용했다거나, 신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였다는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절대적 명제는 인간이 이기적으로 저지르는 모든 범죄와 악의 문제를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단박에 쉬이 설명해버렸다. 문제는 이렇게 간편한 설명의 방식이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은 알 수 있게 하지만, 그들의 고통을 결코 멈추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기심은 ‘동물 인간’에게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자연의 본능’으로 결정되었으며, 지울 수 없으니 막을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에는 탐욕에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실태 분석만이 넘쳐날 뿐, 탐욕을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를 묻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만 몰두한다.
‘이기적 유전자’ 탓으로 돌리다
이제 우리는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말로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세상에 산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보여줘도, 장기려 박사님의 삶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 살아남는 방법만이 다를 뿐, 모두 살아남기 위해 경쟁적으로 펼치는 고도의 생존 전략으로 폄하될 뿐이다. 윤리학이 무능해진 사회에서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명제 하나가 한없이 숭고할 수 있으면서도 한없이 천박할 수 있는 인간 실존의 무한한 깊이를 매우 납작하게 만든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앞에서 밝혔듯이 진화생물학의 탄생이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진화생물학, 특히 오늘날의 동물행동학 연구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동물성을 핑계 삼아 자신의 이기적 행위를 변호하고자 하는 이들이 ‘이기적 동물’이라는 말을 얼마나 임의대로 단편적으로 차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200여 년간의 진화생물학 연구의 흐름을 보면, 동물의 ‘이기성’에 대한 연구는 ‘이타성에 대한 연구’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쉽게 말해,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라는 사실에 대해 진화생물학자들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그중 상당수는 ‘적정 수준’에서의 이타성, 즉 ‘상호 호혜성’을 인간뿐 아니라 유인원, 나아가 상당히 많은 동·식물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히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시도는 적자생존에 근거하여 자연선택을 주장했던 찰스 다윈에게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꿀벌 무리에서 생식 능력이 없는 암컷벌(일벌)은 벌통 침입자에게 침을 꽂아 쫓아내지만, 갈고리 모양의 침을 꽂는 순간 자신의 내장도 함께 빠져나가 죽는다. 인간 사회에서도 전쟁 시에 국가를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하는 젊은 군인들이 있다. 집단을 위한 희생을 놓고 더 많은 것으로 보상받기 위한 투자일 뿐이라고 폄하하기에는 그들의 희생이 너무 크고 돌이킬 수 없다. 일벌의 희생으로 인해 여왕벌이 아무리 잘 살아남았다고 해도, 이미 죽은 일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다윈은 이러한 희생이 무모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일부 개체들의 안타까운 희생은 결국 집단의 자연 적응력을 높여 종의 보존을 유리하게 한다. 그는 이 예를 들어 자연선택에는 집단선택(group selection)이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세웠다. 쉽게 말해, 자연환경에 적합성을 놓고 경쟁하는 단위가 ‘집단’이기에 집단 내 다른 개체를 위한 희생으로서의 이타성이 종의 진화에 충분히 의미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다윈의 집단선택설은 1960년대 현대생물학자들에 의해 거의 폐기되다시피 하였다. 시대적 한계로 인해 유전자 DNA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질 수 없었던 다윈에게 일벌이나 군인과 같이 자신을 희생하는 개체들의 행동은 집단을 위한 이타성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DNA라는 유전형질 인자가 드디어 발견되면서,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쟁 단위가 집단이 아니라 개체 속의 DNA라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였다. 집단의 측면에서 볼 때 침입자와 싸우다 죽은 일벌의 행동은 집단 전체를 위한 희생적인 이타성으로 보이지만, DNA의 수준에서 볼 때 그 행위야말로 이기성에서 나온 합리적 선택일 뿐이다. 일벌의 희생 덕택으로 살아남은 여왕벌에게 그와 똑같은 DNA가 여전히 살아있다. 그러니 DNA 차원에서는 일벌 하나쯤 희생되더라도 여전히 복제가 충분히 가능하며, 다음 세대에도 같은 DNA의 복사본들이 살아남는다. 다윈에게는 이타성에 대한 예시로 등장했던 것이 진화 단위를 바꾸고 보니 이기성을 설명하는 예시가 되었다. ‘유전자 이기주의’라고 명명된 이 새로운 관점을 대중화한 대표적인 현대 진화생물학자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리처드 도킨스이다.
‘유전자 이기주의’는 자기희생 윤리에 반발하는 명분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는 제목이 주는 강렬함 때문에 대중에게 언제나 저자의 원래 의도보다 과장되어 회자되는 책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그가 하려는 말이 “유전자 자체가 이기적이니, 욕심 부리고 싶은 대로 맘껏 다 하고 살아라”라는 게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TV독서프로그램이나 강연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유전자는 자기복제라는 자기이익에만 충실한 존재이므로 자기를 더 잘 복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른 DNA들과의 경쟁 속에서 결국에는 상호협력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도킨스는 이를 경제학에서 사용되었던 ‘죄수의 딜레마’라는 고전적 게임이론(evolutionary game theory)을 차용한 카드 게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상대방을 배신해야지만 나에게 돌아올 이득이 확률상 커지는 카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처음에는 배신을 택하고 높은 배당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게임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배신 뒤에는 상대방의 보복이 따라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학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게임이 끝없이 계속 반복될 때에는 상대방을 배신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 이득을 감소시킬 것이다. 게임의 미래에 대한 추정치를 더 길게 예상할수록 상대방과의 적당한 협력과 상부상조가 훨씬 유리하다. 즉 도킨스가 이 책에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전자 이기주의’에 충실한 생명체일수록 다른 유전자나 다른 개체와 협력하는 것이 유전자 자기복제의 양과 기한을 늘리는 데에 전략적으로 효과적인 선택이라는 점이다. 유전자의 이기성을 인정하면서도, 상호 호혜주의를 진화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론 체계를 갖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상호협력의 이타성은 유전자가 자기복제의 안정성이 확보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할 때 멈추게 된다. 다시 말해, 외형적으로는 상부상조의 나눔으로 보일 수 있으나 손익분기점을 철저하게 계산한 나눔이기에 실제로는 여전히 투자나 교환일 수밖에 없다.
도킨스에게 생명체는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위해 만든 ‘유전자 기계’일 뿐이지, 개체로서의 독립된 주체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그는 왜 생명체들이 서로 무한히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며 살아가는지, 그 신비로운 생명 현상에 대해 진화론적 관점에서 ‘사태 설명’을 한 것에 불과하다. ‘약자를 도와 서로 공생하라’는 윤리적 당위는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신’이 상징하는 윤리적 가치체계를 인간 진화의 가공물로 폄하하는 무신론적 진화생물학자에게 ‘상부상조’라는 생존 방식은 유전자가 자기복제를 위해 만들어 낸 ‘간교한’ 생존 전략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유전자 이기주의’는 자기희생을 요청하는 높은 수준의 윤리를 거추장스러워하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가장 인용하기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딱 거기까지의 선행’ ‘딱 거기까지의 윤리’로 면피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지식이 되는 것이다.
‘이기적 동물들’의 이타주의적 진화
1990년대에 접어들며 진화생물학계에는 또 다른 패러다임이 나타났다. 《타인에게로 : 이타 행동의 진화와 심리학》의 공동 저자인 데이비드 S. 윌슨의 ‘다수준 선택설’(multilevel selection theory)이다. 그는 1960-1970년대 진화생물학계를 완전히 장악했던 개체선택설에 대항하는 대표적 학자로서, 생명진화에 있어 자연 선택의 단위는 단순히 ‘집단이냐 개체냐’라는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결론내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집단선택설과 개체선택설의 논쟁은 결국 “집단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하는 개체의 순수한 이타성이 가능하다”라는 주장과, “이타적 행위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않는 낮은 수준에서만 일어나기에 실제로는 이기성에 다름 아니다”라는 주장의 대립이다. 신학과 철학에서 성선설과 성악설의 오랜 대립처럼 진화생물학 내부에서도, ‘동물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이타성과 이기성의 논쟁이 절대적으로 타협불가능한 양자택일의 길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윌슨이 이러한 양자택일의 곤경을 지혜롭게 피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인 ‘다수준선택설’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진화에서 자연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유전적 요소 말고도 상당히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수학적 모형을 통해 논증한다. 예를 들어, 한 집단 내부에서 이타적인 자들과 이기적인 자들이 섞여 있을 경우, 이기적인 자들의 생존력이 더 우수하여 다음 세대에도 더 많은 후손을 남길 것이 뻔하다. 그러다 보면 집단 내부에서 이타적인 자들의 숫자는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고, 후손 세대에도 이기적인 자들이 넘쳐나는 집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윌슨은 시각을 넓혀 집단들 간의 비교를 모형에 추가하였다. 예를 들어, A 집단에는 인구 대비 이타적인 자들의 비율이 낮은 반면, B 집단에는 비율이 높다고 가정하자. 당연히 집단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자들이 많은 B 집단의 경쟁력이 A 집단의 경쟁력보다 강할 수밖에 없기에, 자손 세대의 전체 수는 B 집단에 훨씬 많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물론 B 집단 내에서만 보면 이기적인 자들의 후손이 더 많이 늘겠지만, 그만큼 이타적인 자들의 후손도 A 집단에 비해 많이 늘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한 집단 안에서의 경쟁에서는 이기적인 자들이 이기겠지만, 집단 간의 경쟁에서는 이타적 성향이 강한 집단이 이기적 성향이 강한 집단을 이긴다는 말이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윌슨은 인간을 비롯하여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이 보상과 처벌을 통해 집단 전체를 위한 이타적 행동들을 더욱 수월하게 강화하는 생존양식을 발달시켰다고 본다.
다시 말해, 어떻게 집단 내부의 이타주의를 증폭(the amplification of altruism)할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집단이 다른 집단과 비교하여 더 잘 번성할 확률이 높아진다. 인간의 경우에도, 자연에 적응하여 진화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유전적 형질만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규범과 문화의 진화를 통해서 인간 집단은 처벌과 보상 체계를 고도로 발전시켜 왔으며, 특히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타주의로의 자발성을 더 수월하게 이끌어 내는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사회적 번영의 정도를 달리해 왔다.
집단이 아닌 약자에게 집중하는 윤리학
윤리학을 새롭게 써가겠다는 글에서 진화론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독자를 혼동에 빠뜨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과도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나눔을 윤리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인간의 이기성이 어떠한지를 논해야 하는데, 현대인들의 상당수가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동물 인간’의 이기성 개념을 너무 편협하게 맹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납작한’ 이해를 근거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나눔을 실천할 수 없는 이유를 주저 없이 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 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펼치게 될 나눔 윤리학에 설득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순수한 나눔을 하지 않거나 믿지 않는 이유가 인간이 이기적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진화생물학의 핑계를 계속 댄다면, 정말로 이제는 다시 생각하면 좋겠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기적 동물’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빈약하다. 지금까지 나온 진화생물학 이론으로도 이미 우리는 ‘이기적임에도 이타적인 이유’를 충분히 댈 수 있다.
우리말에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동물행동학자 프란스 드 발의 생각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동물에 대해 정말로 잘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기 싫어 안 한 것에 동물 탓 하지 말자. 내가 안 한 것은 내가 안 한 것이고, 내가 못한 것도 내가 못한 것이다. 기껏 욕심 부려봤자 일주일, 한 계절 먹이를 저장하는 것에 만족하는 야생의 동물들에게서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탐욕적 이기심의 원인을 찾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염치없는 논리 비약이다.
데이비드 윌슨, 프란스 드 발, 제인 구달, 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그의 제자 최재천 등 동물들의 이타성과 사회성 진화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연구하는 진화생물학자들과 동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들의 책을 읽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윤리학자로서 자괴감이 든다. 생명의 근원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탐구하는 책에서 윤리의 기원을 추정하게 하는 객관적 데이터와 연구 자료들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협력과 상호부조, 나아가 공존의 원리가 생명의 질서라면 그 자체로 윤리의 기원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이기성과 이타성의 핵심을 논하는 윤리학의 자리는 배타적으로 남아있다. 자리의 크기는 분명히 매우 작아졌지만, 오히려 그만큼 매우 중요해졌다. 진화생물학에서 논하는 ‘집단’을 위한 일부 개체의 희생은 집단 내부의 ‘약자’를 위한 나눔이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윤리학은 ‘집단 자체’가 아니라 집단에서 배제 당하고 차별받는 ‘약자’에게 집중한다. 집단의 생존 번영에 기여도가 거의 없거나 아예 손해만 끼치는 자들로 지목된 이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윤리학의 본질이다. 또한 윤리학은 ‘다른 대륙의 빈민’ ‘난민’ ‘성소수자’ ‘외국인’ ‘전염병자’ 등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 집단’의 경계선 ‘밖’에 있는 낯선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궁극적 관심을 놓지 않는다.
다음 글에서는 윤리학이 고유하게 집중하는 경계선 안팎의 언저리에 있는 이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나눔과 사랑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라는 질문에 비로소 겸허히 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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