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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戀歌)
서 기 원
기관차는 동물적인 기척을 울렸다. 채찍을 맞은 늙은 말처럼 구성진 비명은 짙은 안개를 헤지고 긴 여운을 남기면서 밤하늘에 사라지곤 했다.
“자, 그럼.” P중위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굴을 들지 않고 그의 두툼한 손의 따뜻한 촉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를 배웅하기 위해서 역에까지 일부러 나와 준 일을 좀 감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 진득한 사의(謝意)를 표현하기에 알맞는 말을 찾고 있었다.
미안해, 고마워, 아니면 이제 그만 돌아가봐…… 이런 말들은 도무지 내 마음에 찰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보다 더 자상하고 인사성 많은 말은 아무래도 위선으로밖에 내 귀에 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리들의 군대 생활은 흉허물없이 사귀는 친구에게까지, 조심성 있게 입을 열어야 할 만큼 섬세한 분위기는 물론 아니었다. 또한 그런 습성을 몸에 지니게 될 턱도 없었다.
“Not bad” P중위는 발차시간이 다급해서 내 옆자리를 잡은 짊은 여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빙그레 웃였다. 나는 놀란 얼굴로 그의 장난기 어린 눈을 쏘아보았으나 그의 무신경함을 비난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 시간 어느 구체적인 여자의 육체나 육체의 일부분, 가령 목욕탕에서 갓나온 머리라든지 살냄새 같은 것을 상상하기는커녕, 동녀(童女) 노녀(老女) 처럼 추상적 인 여성조차도 통틀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정거장이나 비행장에서 손을 흔들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따위의 장면은 그나 나나 경멸하는 나이였다. 더구나 친구의 불행 (그것이 아무리 크고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하더라도)을 지나친 과장으로 등정하는 일은 그의 취미도 아니고 내가 바라는 일도 아니었다. 어떤 불행도 단 하나의 예외로 여길 수 있을 만큼 오만한 경우는 쉽사리 있을 수 없을 것이었다. 더 어두운 나락(奈落)이 숱한 우리들 주번에서 애인의 사망 통지 하나 때문에 남보다 깊은 나락으로 착각하는 노릇이 왜 그런지 굉장히 이기적 인 심사가 될 듯싶었다. 나는 하고많은 서양 영화에서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끼리 처음으로 상대방의 불행을 듣고, I am sorry!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일처럼 애통해 하는 장면을 번번이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럴 때 나는 화적과 같은 무표정을 지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남의 불행을 공감하기에는 그것의 ‘프레임’이 아니라 질(質)을 더듬어 만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Not bad” 나는 P중위가 남기고 간 외마디 소리를 상기하고 잠깐 옆자리의 여자를 의식했다.
열차는 덜컹 하고 철문을 닫는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김 이 서린 유리창을 손으로 문질러 닦고 희부연 역의 구내를 더듬어 보았으나 P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P와 작년 봄에 죽은 나의 누이동생이 생전에 맺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언제나 나는 별안간 누이가 불쌍해질 적마다 P와 결혼이라도 했더라면 한이 없었을 것을…… 하고 이상스런 발상을 끈적끈적한 쾌락처럼 즐기곤 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쾌락일 뿐더러 누이를 위로해 줄 만한 인정 많은 배려나 됨직하게 믿고 싶었다. 그처럼 누이를 잃은 뒤의 슬픔도 차츰 변모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매우 자기 중심의 상실감 같은 것이었으나 점점 누이를 가없고 불쌍하게 느끼는 측은한 정으로 바뀌어진 듯했다. 그만큼 나의 슬픔이 엷어진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영희와 육체를 나누어 갖게 되고, 여자의 몸과 사내의 정조 같은 것을 어느 정도 실감있게 잡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누이가 처녀로 죽었는지 또는 어찌면 그 ‘인민군’군관과 육체의 관계까지 있었는지 몹시 궁금해졌던 것이다. 어떤 때는 누이가 처녀로 죽었을 것을, 또 어떤 때는 그와 반대로 아무와도 상관이 없으니 사내를 알고 죽었을 것을, 바라기도 했다.
나논 P가 결혼 상대로서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든지 사회적인 출세를 기약할 장래가 있어 뵈기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난 누이와 결부시켜 헛된 아쉬움을 되씹으려는 심산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P는 신통한 결혼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여자들에겐 방종하고 자신에겐 게으르고, 앞으로 과연 어떤 직 업이 그에게 알맞을 것인지 좀체 짐작도 가지 못했다. 우리는 결코 군복이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임시로 빌어서 걸친 물건이란 생각을 쫓아버리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임시직원의 자세였던 것이다. 나는 P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었는지 딱 꼬ᅟᅵᆸ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풍기는 분위기 한 가지만으로도 누이가 한평생을 바칠 만한 값어치가 있을 매력이라고 믿어졌던 것이다. 나는 누이가 연모하던 그 ‘인민군’군관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해 낼 수는 없었다. 옅얼은 과히 희지도 않으며 키도 짧은 편에 어딘지 몸 천체가 어두운 인상이었을 뿐이다. 집안 식구 가운데 아무도 그들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었다. 우리 집은 ‘인민군’의 손으로 징발되어 통신부대의 일부처럼 보이는 소분대(小分隊)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우리 가족은 큰채로부터 밀려나 그들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석 달 동안 뜰아래 작은채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의용군 사냥이 심해갈 무렵, 시골로 피신한 까닭으로 뒷일을 알 수가 없었으나 여느때 딸의 동정에 눈치가 빠른 어머니마저 그 일은 까맣게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두번째로 서울을 빼앗기게 되자 우리 식구들은 내가 숨고 있었던 시골 삼촌댁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그해 봄 내가 군대에 들어가 달포도 채 못 되어 누이는 폐병이 악화해서 죽은 것이다. 누이는 숨이 지기 전에 자기의 지갑을 쥐여달라고 청했다. 누이는 파랸 정맥이 돋은 흰손을 가지런히 떨며그 지갑 속에서 낡고 작은 사진 한 장을 꼬집어냈다. 어머니가 그 사진의 인물이 집을 차지했던 ‘인민군’군관인 줄 깨달은 것은 누이가 숨을 겨두고 난 뒤였다. 나는 그 작자가 가끔 퍽 친숙하게 느껴졌고 때로는 미워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부끄럼 때문에 마지막 남은 피로 두볼을 불그레 물들인 채 멀어져가는 시력으로 그 작자의 얼굴을 바라다본 누이를 생각하고 곧잘 눈물을 글썽거리곤 했다.
영희가 죽었다는 통지를 받고 허겁지겁 뛰어올라가는 길인데도 그녀보다 누이를 생각하며 끊을 수 없는 집착에 붙들려 있으니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건 내가 아직도 영희의 죽음을 곧이듣지 않고 있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내게, 그녀의 죽음을 기록한 몇 자의 전보를 누구의 잔인한 장난이거나 혹은 무슨 기막힌 착오쯤으로 돌리고 싶은 요행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영희가 살아있는 것이나 죽어 없어진 것과 차이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설마 그녀를 잃은 공허와 충격이 온통 터무니없는 거짓이 될 것인가?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과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도록 지금껏 그녀와의 시간이 흡사 화산이 잦은 나라의 지진계(地震計) 처럼 불규칙한 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지낸 시간은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는 갈망이 압축된 양과 비하면 너무도 불공평하게 모자랸 것이었다. 만난 다음 순간부터 헤어질 고통과 함께 있었다. 황홀한 도취는 번번이 무서운 죄를 진 범죄인처럼 헤어질 시간을 깨닫고 소스라쳐 진저리를 치곤했었다. 우리는 피차에 강한 인력(引力)과 함께 이 힘보다 약하지 않은 분리작용으로 하여 괴로움이 더했던 것만 같았다. 그것은 반드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적었던 탓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런 인력과 이와 상반되는 힘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 관계의 뿌리깊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겐 그녀의 죽음이 거의 무의미한 것이다. 그녀는 절대로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차는 여전히 동물적 인 기적을 울리고 달리고 있었다. 창밖은 짙은 안개에 싸인 채 가생이 흐릿한 검은 빛의 농담(濃淡) 밖엔 비지지 않았다. 내 앞에 앉은 청년은 몹시 어두운 표정으로 피로해 있었다. 그 옆은 아무 표지도 없는 작업복을 입은 사내가 구겨진 신문을 퍼들고 있었다. 나는 잠을 청해 보려고 뒤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열차가 굴 속에 들어갔는지 질주음(疾走音)이 한층 요란해지고 알싸한 매연이 코를 찔렀다. 그 매캐한 매연의 냄새는 화약이 타는 냄새와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었다. 화약이 타는 냄새는 약간의 무서움과 노스탤지어처럼 감미로운 비각(味覺)과, 그리고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의 울림 이 모두 한데 얽힌 기묘한 복합체를 연상시켰다. 내가 간부후보생을 지원해시 ‘소모품’인 소총 소대장을 지내게 된 이유는 단 한 가지 국민방위군에 끌려가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P중위의 경우도 나와 비슷한 것이었다. 동기생의 90퍼센티지가 전사했고, 나는 후방으로 전속되었지만 얼마동안 살아남은 10퍼센티지가 90퍼센티지한데 기어이 보복을 당하고 말 것 같은 강박의식에 억눌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소대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꽤 많은 인명을 죽었을 것이다. 그리나 지금 나는 분명히 내 총에 쓰러진 대머리의 적병들을 돌이켜 그려볼 수가 없다. 내가 직접 쏘아죽인 소만큼 죽음의 표정을 선명하게 재생시켜 주는 적병은 없었다. 내가 생명을 죽인 기억 속에서 소의 커다란 눈알처럼 죄스러운 느낌을 안겨다주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부하 다섯을 데리고 수색대로 나신 일이 있었다. 지니고 갔던 식량이 떨어지고 꼭 이틀 동안을 산 속에서 헤매다가 어느 농가의 헛간에서 황소 한 마리를 찾아냈다. 나는 부하를 시키지 않고 광기어린 눈으로 M1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처음 한 방 울렸을 때 나는 명중하지 않은 줄 알았다. 두번째로 쏘자, 소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쿵하고 땅을 울리며 모로 자빠졌다. 나는 그 소를 잡은 고기를 목구멍이 메어지도록 처넣었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그걸 꾸역꾸역 토해냈다.
내가 이 얘기를 영희한테 해 주었을 때, 그녀는 킬킬대고 웃었다. 그랬다고 해서 나는 사내의 기묘한 체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여자를 니무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얘기하는 나부터가 나 자신을 희롱하듯 킬킬대고 있었으니까. 해도 영희가 그 얘기를 영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저녁, 양식집에서 비프스테이크를 씰어먹으면서 그녀는 나보다 먼지 접시를 비우고는 포크를 내 접시 위에 꽃고 고기 한 점을 날라다가 두 어깨를 움츠리며 입 속에 넣었다. 그 자리엔 우리들 둘과 나로서는 초면인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얌전한 월급장이로 뵈는 그 청년은 영희와 내가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동안 그녀를 줄곧 쫓아다니던, 이를테면 나의 연적(戀敵)인 격이었다. 하지만 연적이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벌써 마음을 정한 영희는 자기가 고른 사림을 그제껏 추근추근 늘어붙는 사내 앞에 통째로 보여 주면서 그처럼 잔인한 장난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그런 장난에 맞장구를 치면서 흥겨워할 만큼 단순하고 또 이기적이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그 청년을 보낸 다음 대뜸 영희를 비난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하면서 웃었을 뿐이다. 하긴 그녀는 그 청년한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조금도 진배없이 잔인했다. 반일 내가 미리 여자를 알고 있었더라면 영희는 나를 끝내 거절하고야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어설픈 행위는 피차에 배반당하지 않은 기쁨과 만족감에 젖어들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밝은 빛이 눈이 부신 부끄럼을 감추지 못했다. 가령 내가 그러한 행위에 미숙하지 않았다고 한들 그녀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사내의 동정(童貞)이나 지조 같은 것을 자기의 경우와 꼭같이 귀중한 값으로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자기가 줄 수 있는 것과 조금도 축이 나지 않도록 상대로부터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었다.
밤이 깊어가는 객차 안은 한결 조용해지고 가끔 코를 고는 소리가 불결한 입 냄새와 함께 들려오곤 했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나는 옆자리의 여자를 의식 했다. 나는 그녀가 일부러 몸을 의지해 오는 것같이 느꼈다. 어두운 유리창 속으로 반사되어 어렴풋이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낯모를 행인에게 몸을 기댈 수 있을 천한 계집으로는 뵈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피로해 뵈지도 않았다. 나는 대담하게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곁의 여자를 살펴보았다. 길게 째진 눈매가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창백한 두 볼이 흐릿한 전등빛에 도리어 푸르게 비쳤다. 그녀는 짧고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나는 무의식중에 오른쪽 허리에 챤 권총을 다소 위로 밀어붙였다. 나는 그려한 동작이 결과적으로 나의 앉은 자세를 가다듬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옆구리에 밀착한 여자의 몸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Not bad” P의 농담이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해 준 것인가. 나는 그녀를 경멸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경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따뜻한 체온이 내 살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그린 상태를 불결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나는 육체의 자극보다도 마음의 안정감에 편안한 균형을 느끼고 있었다. 혀가 굳어 버리고 목이 타버리던 기갈이 차츰 가시어 가는 성싶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절대로 여자의 몸뚱이에 굶주려온 짐승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설득시키고 싶은 욕심 때문에 어느 구석인지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인가 굉장히 굶주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그것이 오직 ‘섹스’ 하나뿐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녀의 기갈도 ‘섹스’뿐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구든지 굶주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굶주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걸 미처 모르는 어린애나 굶주림을 잊어버린 늙은이밖엔 아무도 없었다. 밥을 먹고 짐을 자고 또 숨 쉬는 것 이외에 무엇인지 찾을 대상이 있은 사람이면 그 기막힌 기갈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후방으로 내려와서 한두 달 동안 나는 멀리나마 영희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기갈을 흡족히 채워 메울 수 없는 때가 많았다. 영희 하나만이 나의 전부일 수는 없는 끝없이 깊은 굶주림이 캄캄한 함정처럼 넓은 입을 벌리고 있었.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밤거리를 나는 미친 개가 되어 몇번이고 같은 길을 맴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나의 비척거리는 걸음은 거리 한복판의 사창가를 중심으로 그 둘레를 아마도 열 차례는 원을 그리며 돌았다. 일곱 번쯤 돌았을 때 어느 길모퉁이에서 미군 병사와 마주쳤다. 그 친구도 나처럼 우비도 없이 술기운에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이고 어자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말하였다. 그는 결코 한국군 장교를 희롱삼아 경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여기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도 촉박한 인상이었다. 나는 별안간 그가 내 친구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물론 나는 창녀가 득실거리는 골목을 자세하게 일리 주고 재미를 많이 보라고까지 덧붙여 주었다. 그는 다시 다리를 모아 경레를 하고는 긴 목을 세우고 높은 키를 휘청거리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헤어진 후에도 몇 차례나 더 헤매면서도 창녀한테 굴러가지 않은 억제력은 결코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의 결백함이나 의지를 스스로 대견스레 알기엔 실상 너무도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터였고 이보다도 영희의 탐욕스러운 집념 이 나를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미친 개는 심신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옆의 여자가 그 사창가에서 뒹굴던 창녀라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차가 몇 번인가 정거하고 떠나는 동안 가수(假睡)의 상태에서 여자의 살과 부딪고 비비고 가끔 쉬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마디의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말을 걸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적당한 거리로 물러나야 할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두려움이 하나의 묵계처럼 서로 입을 다물게 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탈진한 끝에 잠이 든 새벽녘에 꿈속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느껴 운 것 같았다. 잠이 깬 뒤 꿈속의 기억은 몽롱했으나 누이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린 성싶었다. 나는 옆의 여자도 잠을 깬 것을 알고 있었으나 창가에 바짝 몸을 붙인 채 휜히 밝아오는 시골 풍경만 내다보고 있었다. 기차가 한강을 건널 즈음,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한마디라도 인사를 건네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와 그리고 나 자신한테도 모욕을 덜해 줄 듯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기차가 어둑어둑한 서울역 구내에 들어서자 나는 그녀의 트렁크를 내려주고 “내가 들어 드리지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비로소 무거운 부담을 단숨에 덜어버린 가뿐한 해방감 속에 무엇인지 그녀를 똑바로 마주볼 수 없는 부끄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수치감의 해맑고 신선한 색채로 하여 언젠가 이와 비슷한 일이 없지 않았던 것만 같은 조바심을 씻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집찰구를 나오기까지 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택시보다도 지프차가 많은 주차장 앞까지 짐을 들어다 놓고 그녀의 눈을 피하면서 “안녕히 가세요.”하고 말했다. 그녀는 별안간 상체를 흔들고 낭패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쉰 목소리로 내가 건넨 인사말을 한자도 틀리지 않게 흉내를 내면서 몸을 돌이켰다.
나는 영희네 집을 향해서 걸어갔다. 정거장 앞 광장에는 폭탄이 터진 웅덩 이를 메우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높은 빌딩의 벽은 기관포탄에 생생한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구지레하게 낯이 익은 천차가 녹슨 궤도 위를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나는 영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누구의 장난이나 착오가 아닌 뚜렷한 현실임에 틀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새삼스레 놀랐다. 나는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누이와 P와 그리고 영희가 한순간에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어느 찻집을 찾아들었다. 내게 남은 일은 오직 영희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한시바삐 달려가고 싶은 충격과 이와는 딴판으로 될수록 긴 시간의 유예를 간직하고 싶은 미련이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두어 시간쯤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가 비틀거리는 다리를 세우고 길거리로 나섰다. 나는 영희네 집을 향하면서 간밤의 여자를 싱겁게 보내 버린 몇 시간 전의 일을 몹시 후회했다. 나는 그녀를 마주볼 수 없었던 부끄럼이 영희를 처음 알고 난 아침을 그대로 되살려주듯 신통히도 닮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 나는 영희가 정녕 죽어 없어진 것으로 믿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영희의 집을 향하다가 발길을 돌려 다시 도심지로 되돌아갔다. 골목 안의 으슥한 여관을 찾았다. 나는 냉수를 청하고 소독하듯 빈 속을 씻었다. 그리고는 허리에 찬 권총을 풀었다. 보이얗게 먼지가 묻은 총신을 때기름이 흐르는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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