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총 인구는 기껏해야 1만명 정도였고 토산품을 위시한 수입이 조금 됬지만 무역이 형편없어 수입도 간당간당했다.
무역수치를 늘리고 해외 식민활동으로 수입을 충당하기로 결정하고 하나둘씩 착착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일단 1만명정도의 군대와 해군을 동원하여 무역 상관을 위협하는 원주민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했다.
그들은 치열하게 반항했지만 곧 압도적인 무력앞에 꺽이고 말았다.
동아프리카 지방에도 건너가 적들을 쳐 없앴는데 소말리아 지방의 원주민은 5천명이나 되었지만 아군의 희생은 매우 적었다.
소코르타 섬과 바레인 섬 소말리아 등지에 Lv 6의 무역상관을 개설하니 매월 흑자가 3.2 듀캇을 유지했다.
그 돈으로 각국 무역 거점에 상인을 보내 본격적인 무역국가의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역시 무역으로 되는 수입은 한정될수 밖에 없었다.
헤드자즈,아덴과 동맹을 맺어 국방을 튼튼히 한 오만은 병력을 늘려 약 7천 정도의 상비군을 유지하게 되었다.
첫 타겟은 이라크의 basrah 지방인데 이 지방은 아군의 트레이드 거점을 지켜주는 전략적 요지이자 수입과 인구도 많은 알토란같은 땅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티무르 제국의 속국이라 감히 건드리지 못하던 땅이었는데 페르시아의 독립전쟁,발뤼키스탄의 독립,우즈벡의 침공으로 티무르 제국이 사실상 무력해지자 지금은 한번 해볼만한 나라였다.
그리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있는 찰나 헤드자즈가 선수를 쳐서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서 제 1차 대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라크(원래 나라이름이 더 길지만 편의상 이라크라 지칭)는 마멜루크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헤드자즈의 군대 2만명은 요르단을 거쳐 바그다드 시를 포위 함락시켰다.나는 바스라 지방을 정복하고 싶지만 병력상 밀리고 있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병력만을 증강하고 마멜루크군과 헤드자즈 군이 계속 싸워서 우리가 전력을 정비할때까지 시간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마멜루크 군이 요르단에서 지원하러간 아덴군 1만명을 격파 전멸시키자 헤드자즈는 결국 이라크와 26듀캇을 받고 전쟁을 끝내 결국 전쟁은 8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끝났다.
하지만 어차피 키워야 할 군대 였기때문에 군대를 1만 2천명으로 증강시키고 기병대를 5천가량 증강시켰다.
육군 기술력이 1에서 2로 증가되고 잔지바르에서 지방의 백성들이 함선 5척을 바쳐서 아군의 함대는 워쉽 9척 수송선 14척의 중동 최강의 함대로 거듭났다.
이리하여 오만은 강력한 국가를 지향하여 군대를 늘리고 개혁을 시도하려했지만 지방 귀족들이 부정 부패(커럽션 이벤트 발발)로 인플레이션이 10%나 증가하면서 순간 나라살림이 어려워진다.(후에도 부정 부패가 이루어저 인플레이션은 자그마치 26%에 육박한다)
육군의 증강이 인플레이션때문에 어려워지자 동아프리카 식민 개획에 박차를 가하여 해안가에 인접한 두 곳에 콜로니를 건설하게 된다.
한편 이스파한과 잔지바르,수도에 있는 세곳의 무역거점을 독점한 우리는 월 수입 4.8듀캇의 막대한 이득을 보게되고 드디어 군사를 1만 4천까지 늘려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정신없는 이라크에 1442년 6월 22일에 선전포고 함으로서 제 2차 대 이라크 전쟁(소위 1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력 개요.
제 2차 대 이라크 전쟁.
오만-보병 9천 가량,기병 5천.
지휘관 슐레이만 장군.
아덴-총 병력 2만 7천.
헤드자즈 총 병력 1만 6천.
이라크-총 병력 1만 1천.
(수도 바그다드에 진주중,바그다드에 넘어온 페르시아 군 5천을 격퇴해서 병력 감소)
이라크의 동맹국
티무르 제국-총 병력 미상.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정신없음.
Gujarat 왕국-총 병력 2만 내외로 추정
해군 4척가량 보유 중인걸로 추정.
전쟁개요.
슐레이만 장군이 지휘하는 아군은 바스라 점령을 목표로 삼고 수도를 빠저나와 진군했다.헤드자즈 군과 아덴 동맹국은 수도 바그다드를 공략하고 있었고 대패한 이라크 군은 6천명의 생존자를 이끌고 바스라 시에 피해있었다.
1442년 8월 15일 경 바스라에서 적군 9천명 가량(증강했음)의 이라크군과 조우한 슐레이만 장군의 군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바스라 성 앞의 평원에서 대접전이 벌어젔다.
그러나 아군의 육군 기술력이 월등하게 높고 사기도 높거니와 병력도 많아서 1442년 9월 2일 이라크 군은 약 4천명의 전사자를 낳고 정신없이 어디론가 패주해갔고 슐레이만 장군은 바스라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에 들어갔다.
1442년 9월 20일 경 바스라 성의 함락을 코앞에 두고 있는 슐레이만 군대에 끔찍한 소식이 도착했다.패주한 이라크군 5천가량이 다만 의 트레이닝 포스트를 공격해서 그곳을 무차별 파괴하고 그곳에 저장되있던 막대한 식량을 탈취했다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젔고 바스라군은 성내부의 민간인까지 동원하여 바스라의 포위를 뚫으려는 병력 5천과 합류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1442년 10월 3일.
아군 1만 명과 이라크 군 9천명은 다시 바스라 평원에서 일제히 접전을 벌였다.성 내부에서 뛰쳐나온 군대 4천과 바스라 포위를 뚫으려는 군 5천이 격전을 벌였다.
전황은 상당히 불리했다.아군은 사기치가 떨어저 자칫 패배할뻔했고 기세를 틈타 이라크군이 일제히 공격했다.
그러나 막 징집한 민간인 포함 이라크 군 4천은 사기가 매우 낮았고 아군의 노련한 기병대들이 그들의 정중앙을 뚫고 진격해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진형이 무너진 이라크군은 포위되었고 아군은 사기를 회복, 격전끝에 이라크군 9천을 전멸시키고 빈집이나 다름없던 바스라 시를 함락시켰다.
1442년 10월 6일의 일이었다.
3일간의 전투에서 극적으로 역전승한 아군은 바스라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슐레이만 장군은 병사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약탈을 허용했지만 결과적으로 군기문란이 조장되어 도망자가 발생 아군 1만 가량은 전사자를 합쳐 바스라시를 함락시켰을때 약 6천가량만 남아있었다.
그때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바그다드를 헤드자즈 군과 포위하고 있던 페르시아군이 25듀캇을 받고 이라크와 평화협상을 맺은 것이다.
헤드자즈 군과 아덴군이 남아 바그다드 시를 공격했지만 병력상 적은 감이 있어 포위는 풀리고 말았다.
결국 슐레이만 장군의 군대는 북상하여 헤드자즈군과 아덴군과 같이 바그다드 시를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바레인 섬의 트레이닝 포스트를 잠잠히 있던 Gujarat 왕국의 군대 3천 가량이 4척의 함대를 타고 무차별 약탈한 것이다.
아군은 반격에 나서 전함 9척과 수송선 14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바레인 앞바다 에서 적군 3천명과 함께 적 전함 4척을 모조리 격파했지만 Lv 6 까지 키워논 트레이닝 포스트의 한순간 파괴는 실로 씁쓸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1443년 1월 6일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바그다드 가 함락된것이다.이라크 왕은 치욕스러운 항복을 결정했다.
1443년 2월 23일 군주 마익이 사망하고 신 군주 Umer 가 전쟁상황의 오만을 떠 맡게 되었다.
1443년 3월 2일.다시 말도 안돼는 소식이 들려왔다.헤드자즈 군 아덴군이 각각 30듀캇씩의 돈을 받고 전쟁에서 이탈한 것이다.
슐레이만 장군은 격렬히 항의 했지만 이미 성문은 굳게 닫힌 뒤였다.헤드자즈 군과 아덴군은 이미 빠저나갔고 격분한 슐레이만 군 6천은 바그다드를 공격했지만 숫자상 너무 적은지라 공성능력은 이미 상실되있었다.
바스라시를 넘기라는 요구도 거절한 이라크 왕은 군사를 증강하고 있었고 오랜 포위끝에 도망하는 병사들이 태반으로 늘어나 병력은 4천가량을 밑돌았다.
게다가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으로 이스파한을 공격하고 있던 이라크 군마저 돌아온다는 소문이 파다해 슐레이만은 바스라시로 퇴각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때 수도 마스케이트가 Gujarat 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비보가 들려왔다.아군의 영토를 타고 자국으로 후퇴하는 아덴군 9천이 Gujarat 군을 격퇴시키긴 했지만 동아프리카의 트레이닝 포스트와 식민지가 적군의 해군의 공격에 노출되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1443년 10월 5일.7개월간의 공격에도 바그다드는 끄덕없었고 드디어 페르시아 에서 돌아온 병력 5천명이 바그다드 성 앞에서 슐레이만군 4천과 접전을 벌였다.
자칫 위험해질수도 있었으나 슐레이만 장군의 뛰어난 지휘아래 적군을 격파시키는데는 성공했다.1443년 10월 7일,마지막으로 병사들은 포상을 받았다.그러나 병력은 2천가량 밖에 남지않아 더이상 바그다드 시 공격은 불가능했고 결국 이라크왕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여 1443년 10월 10일,25듀캇의 적은 수의 돈을 받고 바스라 시를 넘겨준 후 전쟁을 끝마쳤다.
실로 대군까지 동원하여 1년간 수많은 접전을 벌였지만 이득은 25듀캇밖에 얻지 못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하여 수도 mascate 로 돌아온 병사는 기껏해야 1천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자그마치 1만 4천을 동원하여 출정한 것치곤 너무나 적은 생존 병력이었다.
그렇게 소위 1년전쟁은 허망하게 끝났다.
전쟁이 사실상 패전으로 끝나자 귀족들의 부패는 심해저서 결국 인플레이션이 30%까지 뛰는 불운이 연달아 겹첬다.
시아파 교도들은 반란낌새까지 보여서 동방 정교회와 카톨릭을 탄압하여 그들의 대우를 약간 개선 반란을 억제했으나 수니파 교도들에게 이단자들과 협상한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트레이딩 포스트를 새로 건설하여 이득을 노렸지만 수입은 그다지 많아지지 않았다.
국내의 혼란함과 더불어 외국도 혼란이 많아젔다.티무르 제국에서 독립한 발뤼키스탄 왕국은 Gujarat 왕국의 습격을 받아 멸망했고 페르시아는 연전연승을 거듭하여 티무르 제국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
오만왕 umer 는 일단 경제부흥을 선포하고 경제를 좀먹는 지방귀족들을 타도한후 세금을 걷워 (Gift 이벤트 발생으로 자금 200이 증가함)
아덴과 친선을 다진후 아덴을 속국화 하는 데 성공하였고 군대를 증강하여 7천명 정도의 군대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각지에 식민지와 트레이딩 포스트를 건설하였고 이스파한과 mascate 의 무역거점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드디어 월수입이 5듀캇을 넘는 흑자를 보았다.
그 와중에 세계는 혼란을 거듭하여 티무르 제국은 반란군으로 인해 정부가 전복되는 혼란이 일어났고 페르시아는 티무르의 영토를 잠식해들어가고 있었다.
1452년 1월 1일.군주 umer 가 사망하고 슐레이만이 새 군주로 즉위하였다.
슐레이만은 동아프리카 식민계획이 박차를 가하고 zanj 왕국과 혼약을 맺은 뒤 속국이었던 아덴을 1455년경 병합하는 데 성공하여 남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였고 병력 3만명의 군대까지 얻어 드디어 오만은 강대국으로 도약을 하게되었다.
현재 상업국으로서 강대해진 오만은 헤드자즈와 동맹을 굳건히 하고 이라크와의 제 3차 대 이라크 전쟁을 준비중이다.이번은 1년전쟁 처럼 끝나지는 않을것이다.반듯이.
*질/답 란의 제 글 그대로 가저와봤습니다.2년전글이 아직도 남아있네요^ ^; 당시엔 상당히 정성들여 쓴 글이라..다시 올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유로파가 어떻게 된지는 잘 모르겠네요.패치도 많이 나왔을테고..글을 보니 한글화에 대한 말도 있군요.
첫댓글 유로파게시판 제일 첫번째 글이 나폴레옹 시나리오의 프랑스였었죠...
아.. 옛날에 읽었던 글이군요. 감개가 무량합니다.. -_-;
슐레이만 장군 이름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이 글 봤을때부터 약소국으로만 하게 되었다는...
잘 쓰신다 -ㅅ- 프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