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
북군 지도자는 전쟁의 완료보다도 승리가 더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것은 연방탈퇴가 없어져야 하고, 모든 방면에서 노예가 사라져야 한다는 두가지 전쟁의 목표를 포함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목표를 위하여 규범을 무시했고, 그들은 또한 남부에 가해질 북부연방 정부에 의한 제재의 정도에 반대했고, 남부가 북부연합에 재통합되는 과정에도 반대했다.
전쟁의 초기에 시작되어 1877년에 끝난 재편입은 복합적이었고, 북부연합과 국가 정책에 변화를 일으켰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것은 헌법에 3가지 편입 개정안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13번 째 개정안은 노예제 폐지에 관련된 것이었고, 14번 째 개정안은 북부 연방의 보호를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늘리는 것이고, 15번 째 개정안은 투표권 행사에 있어서 인종적 제한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편입은 다른 시간에 다른 주들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1877년의 절충안에 의해 마지막 세 개도 끝났다.
결과
1865년 봄, 남부군이 항복하면서 미국의 노예 제도는 사실상 끝이 났다.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군 소속 지역의 노예들을 해방시킬 것을 선포했고, 이로 인해 남부의 모든 노예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멕시코 접경지대와 남부 지역의 북부군 관할 구역 노예들은 주정부 시행안(state action)나 1865년 12월 6일 비준된 수정 헌법 제13조로 하여금 해방되었다. 약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1861년부터 1865년 사이에 해방되었다.
북부의 완전한 복구 작업은 재건 시대라고 알려진, 전후 상당히 혼란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인해 103만 명의 사상자(당시 인구의 3%)가 발생했고, 사상자 중 62만 명은 군인이었으며 그 가운데 2/3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남북 전쟁은 미국이 지금껏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의 사망자 수와 맞먹는 수많은 미국인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전쟁을 유발한 원인과 그 타당성 여부는 물론이고, 남북 전쟁이라는 그 명칭 자체도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소재이다. 1860년대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3~43세 백인 남자 전체의 8%가 전쟁으로 인해 사망했고, 이 수치는 북부 인구의 6%, 남부의 18%나 된다. 약 56,000명의 군인이 남북 전쟁 중 감옥에서 죽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이렇게 많은 이유 중 하나로 돌격 등과 같은 나폴레옹 식 전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정밀한 강선의 개발과 미니에 탄환, 그리고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북군에 의해 사용된 ‘스펜서 연발총’이나 시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개틀링 기관총’에 의해, 개활지에 포진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한 전략으로 쓰인 전쟁 참호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