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회] 줄담배, 빼갈 즐기면서 치열한 글쓰기
리영희 평전/[9장] 두번째 언론사 해직, 진보지식인으로 2010/06/10 08:00 김삼웅리영희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근무할 때는 한창 팔팔한 30대와 40대 초입의 시절이다. 연구도 많이 하고 글도 많이 썼지만 비화도 많았던 시절이다. 일반적으로 언론인들은 술자리가 잦은 편이다. 복무 시절때부터 가끔 마시기 시작했던 술이 언론사 15년 동안에 꽤 주량이 늘었다. 마시는 기회가 잦다보니 술이 늘고 도수도 높아졌다.
거의 점심 때마다 자장면 한 그릇에 빼갈 한 ‘독구리’를 비웠다는 ‘신화’가 있으며 팔당에 외신부 부회를 갔을 때는 빼갈 댓 병을 차고 앉아 거의 칠 홉 정도를 혼자서 비우고 보트를 타려다 물에 풍덩했다는 믿기 힘든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멀쩡한 새 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술로 인사불성이 되어 엉뚱한 고무신을 끌고 들어 온다든지 옷이 귀하던 시절 어렵게 마련한 바바리코트를 취중에 잃어버리고 온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술을 마실 때도 ‘끝장을 볼 때까지’ 먹어야 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술이면 술이고 음식이면 음식이지 술 마시면서 안주 먹는 것을 꺼려해 ‘깡술’을 마시다시피했다. 그러다보니 위장에 ‘펑크’가 나 수원성빈센트 병원에 한 달간 입원도 했고, 그후 2년 간격으로 두 번이나 더 입원환자 신세가 됐다. (주석 8)
젊은 시절에 피우지 않았던 담배도 줄담배를 피웠다. 고된 언론인 생활이 값싼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언론인의 평균수명이 다른 직종에 비해 가장 짧은 것은 스트레스와 술, 담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외신기자들과 다름없이 기본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의 기자들과는 계층이 다른, 주로 값싼 술집에서 술을 먹었지. 이런 가난을 지탱하기 위해 부업삼아 많은 번역일을 했어요. 번역일이라는 것이 고달픈 정신노동이었기 때문에 작업의 윤활유로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고, 20~30년 그런 일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거의 원고 한 장에 담배 한 대 꼴로 늘었지요. (주석 9)
워낙 술이 센 김 국장(김경환-필자)과 나는, 아예 저녁 식사를 제치고 밤중에 중국집에서 빼갈과 군만두 한 접시를 시켜 제5판(서울 중심부에 배달되는 신문)이 떨어지는 새벽 4시까지 마시곤 했어. 그러다 보니까 나의 주량이 굉장히 늘어났고 약한 도수의 술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자연히 빼갈을 즐겼어. 1967년 가을에는 위궤양이 악화되어 위벽이 거의 뚫릴 지경까지 이르렀어. 정말 무모하게 술을 마셔댄 셈이지. (주석 10)
리영희는 대단히 치열한 사람이다. 기사 한 꼭지를 쓰거나 논문 한 편을 쓸 때면 책상 머리에 앉아 이것저것 자료를 합성하여 만들지 않는다. 부지런하게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고 논증을 통해 글을 완성한다.
기자시절 그는 ‘특급자료’들을 찾아 매주 미국, 영국, 프랑스 대사관 공보처 도서실 등을 ‘순례’했다. 거기서 신간, 논문, 정보저널 등을 읽고 복사하고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으니 그냥 앉아서 주어지는 자료만 소화해 내는 기자들이나 대학에서 국제관계 연구를 하는 교수들보다도 앞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해외의 인맥까지 뚫어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자료도 입수해 들였다. 그는 이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챙겨 스크랩을 만들어 둠으로써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했다. 아마도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개인용 스크랩북이라는 것을 만든 사람일 것이다. (주석 11)
아무리 머리가 좋은 기자들이라도 이렇게 자료를 조사하고 정보를 축적하고 해외 인맥까지 동원하는 리영희의 치열함에는 누구라도 경쟁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는 영어는 물론 일어, 불어에 능통하고 중국어도 해독한 어학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회사 일을 하고 부업의 번역일을 하고 비중있는 많은 평론을 쓰면서 30대의 청춘을 불태웠다. 그리고 국제관계에 정통한 1급 논객이 되었다. “얕은 재주나 술수는 우직한 성실성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일생의 계언(戒言)으로 삼을 만큼 ‘우직한 성실’이 일군 성과였다.
그때 나는 내 직업에 미쳐 있었습니다. 일이 많았을 뿐더러 60년대의 국제사회가 참 격동적이었습니다. 제3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독립과 혁명의 불길이 솟고, 중국대륙에서 도덕성에 기반한 인류 제3의 생존양식에 대한 대실험이 진행되고, 아프리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와 이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악랄한 공작이 진행되고, 그리고 베트남전이 있었지요. 당시의 베트남전은 30년대 스페인 내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류양심의 실험장이었습니다.
세계의 양심적 지성은 베트남전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로 그 사람의 세계관과 양심을 판단했습니다. 이처럼 격동적인 세계의 흐름은 나를 거의 미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60년대의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외신부 기자로서 희열을 느낄 정도로 일에 몰두했습니다.
일에 밤낮이 없었고 집에 가는 일보다 회사에 가는 일이 더 익숙했을 정도입니다. 이 바람에 가족과의 단란한 생활이나 재물같은, 다른 사람들이 흔히 누리고 중요시하는 것보다 인류의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고 진실을 추구하는데 더 많은, 혹은 거의 모든 의미를 부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석 12)
리영희가 한국 지식청년들의 ‘사상의 은사’(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가 되기까지는 ‘거의 미치게 할’ 정도로 일에 대한 집념과 열정이 있었고, 여기에는 가족의 희생이 뒤따랐다. 한국인 남자의 평균수명에 가까운 65세가 되어서야 수도꼭지에서 온수가 나오는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될 만큼 리영희와 그의 가족은 빈한한 삶을 살아야 했다.
칼 마르크스가 한참 <자본론>을 쓰고 있을 때 집에 양식이 떨어진 그의 어머니가 “애야, ‘자본론’만 쓸 것이 아니라 ‘자본’을 구해와라.”고 했다는 비화가 있다. 아마 리영희의 어머니와 부인도 이와 비슷한 심경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직접 리영희의 말을 들어보자.
가족에 대해서 내가 많은 고통을 주었다고 후회하게 된 것은 70년대의 마지막, 나이 50을 넘어서다. 광주형무소의 0.9평짜리 어두운 감방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아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아직 초등학교(리영희가 이 글을 쓸 때는 호칭이 초등학교였다 - 저자)를 다닐까 말까한 철없는 어린 것들에게 너무나 엄격(가혹?)했던 과거를 뉘우치게 되었다. 다른 가정의 아버지처럼 어린 것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은(못한) 30대, 40대의 나 자신이 냉혈적으로 보였다.(주석 13)
하지만 리영희와 그 가족의 고단한 삶은 이제 출발지점일 뿐이었다. 국제정세의 거대한 변화와는 달리 박정희 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남북관계가 더욱 대결 국면으로 악화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역사에 대한 지식인의 소명 의식을 새롭게 일깨운다.
내가 단언하건대, 리영희 선생의 역사에 대한 감각은 거의 본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맹수나 작은 벌레들이 그들이 사는 환경의 어떤 일도 너무나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처럼 역시 변전이나 그 향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의식의 역량뿐 아니라 그가 받아온 오랜 수난의 역정 가운데서 터득한 통찰 때문이기도 하다. (주석 14)
주석
8) 조유식, '리영희 그 독한 기자정신의 역정', <월간 말>, 1995년 5월호.
9) 리영희, <대화>, 404쪽.
10) 앞의 책, 405쪽.
11) 조유식, 앞의 글, 72쪽.
12) 앞의 글, 69~70쪽.
13) 리영희, '30년 집필생활의 회상', <自由人 자유인>, 39쪽.
14) 이호철, 앞의 글.
거의 점심 때마다 자장면 한 그릇에 빼갈 한 ‘독구리’를 비웠다는 ‘신화’가 있으며 팔당에 외신부 부회를 갔을 때는 빼갈 댓 병을 차고 앉아 거의 칠 홉 정도를 혼자서 비우고 보트를 타려다 물에 풍덩했다는 믿기 힘든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멀쩡한 새 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술로 인사불성이 되어 엉뚱한 고무신을 끌고 들어 온다든지 옷이 귀하던 시절 어렵게 마련한 바바리코트를 취중에 잃어버리고 온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술을 마실 때도 ‘끝장을 볼 때까지’ 먹어야 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술이면 술이고 음식이면 음식이지 술 마시면서 안주 먹는 것을 꺼려해 ‘깡술’을 마시다시피했다. 그러다보니 위장에 ‘펑크’가 나 수원성빈센트 병원에 한 달간 입원도 했고, 그후 2년 간격으로 두 번이나 더 입원환자 신세가 됐다. (주석 8)
젊은 시절에 피우지 않았던 담배도 줄담배를 피웠다. 고된 언론인 생활이 값싼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언론인의 평균수명이 다른 직종에 비해 가장 짧은 것은 스트레스와 술, 담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외신기자들과 다름없이 기본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의 기자들과는 계층이 다른, 주로 값싼 술집에서 술을 먹었지. 이런 가난을 지탱하기 위해 부업삼아 많은 번역일을 했어요. 번역일이라는 것이 고달픈 정신노동이었기 때문에 작업의 윤활유로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고, 20~30년 그런 일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거의 원고 한 장에 담배 한 대 꼴로 늘었지요. (주석 9)
워낙 술이 센 김 국장(김경환-필자)과 나는, 아예 저녁 식사를 제치고 밤중에 중국집에서 빼갈과 군만두 한 접시를 시켜 제5판(서울 중심부에 배달되는 신문)이 떨어지는 새벽 4시까지 마시곤 했어. 그러다 보니까 나의 주량이 굉장히 늘어났고 약한 도수의 술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자연히 빼갈을 즐겼어. 1967년 가을에는 위궤양이 악화되어 위벽이 거의 뚫릴 지경까지 이르렀어. 정말 무모하게 술을 마셔댄 셈이지. (주석 10)
리영희는 대단히 치열한 사람이다. 기사 한 꼭지를 쓰거나 논문 한 편을 쓸 때면 책상 머리에 앉아 이것저것 자료를 합성하여 만들지 않는다. 부지런하게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고 논증을 통해 글을 완성한다.
기자시절 그는 ‘특급자료’들을 찾아 매주 미국, 영국, 프랑스 대사관 공보처 도서실 등을 ‘순례’했다. 거기서 신간, 논문, 정보저널 등을 읽고 복사하고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으니 그냥 앉아서 주어지는 자료만 소화해 내는 기자들이나 대학에서 국제관계 연구를 하는 교수들보다도 앞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해외의 인맥까지 뚫어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자료도 입수해 들였다. 그는 이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챙겨 스크랩을 만들어 둠으로써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했다. 아마도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개인용 스크랩북이라는 것을 만든 사람일 것이다. (주석 11)
아무리 머리가 좋은 기자들이라도 이렇게 자료를 조사하고 정보를 축적하고 해외 인맥까지 동원하는 리영희의 치열함에는 누구라도 경쟁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는 영어는 물론 일어, 불어에 능통하고 중국어도 해독한 어학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회사 일을 하고 부업의 번역일을 하고 비중있는 많은 평론을 쓰면서 30대의 청춘을 불태웠다. 그리고 국제관계에 정통한 1급 논객이 되었다. “얕은 재주나 술수는 우직한 성실성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일생의 계언(戒言)으로 삼을 만큼 ‘우직한 성실’이 일군 성과였다.
그때 나는 내 직업에 미쳐 있었습니다. 일이 많았을 뿐더러 60년대의 국제사회가 참 격동적이었습니다. 제3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독립과 혁명의 불길이 솟고, 중국대륙에서 도덕성에 기반한 인류 제3의 생존양식에 대한 대실험이 진행되고, 아프리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와 이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악랄한 공작이 진행되고, 그리고 베트남전이 있었지요. 당시의 베트남전은 30년대 스페인 내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류양심의 실험장이었습니다.
세계의 양심적 지성은 베트남전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로 그 사람의 세계관과 양심을 판단했습니다. 이처럼 격동적인 세계의 흐름은 나를 거의 미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60년대의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외신부 기자로서 희열을 느낄 정도로 일에 몰두했습니다.
일에 밤낮이 없었고 집에 가는 일보다 회사에 가는 일이 더 익숙했을 정도입니다. 이 바람에 가족과의 단란한 생활이나 재물같은, 다른 사람들이 흔히 누리고 중요시하는 것보다 인류의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고 진실을 추구하는데 더 많은, 혹은 거의 모든 의미를 부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석 12)
리영희가 한국 지식청년들의 ‘사상의 은사’(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가 되기까지는 ‘거의 미치게 할’ 정도로 일에 대한 집념과 열정이 있었고, 여기에는 가족의 희생이 뒤따랐다. 한국인 남자의 평균수명에 가까운 65세가 되어서야 수도꼭지에서 온수가 나오는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될 만큼 리영희와 그의 가족은 빈한한 삶을 살아야 했다.
칼 마르크스가 한참 <자본론>을 쓰고 있을 때 집에 양식이 떨어진 그의 어머니가 “애야, ‘자본론’만 쓸 것이 아니라 ‘자본’을 구해와라.”고 했다는 비화가 있다. 아마 리영희의 어머니와 부인도 이와 비슷한 심경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직접 리영희의 말을 들어보자.
가족에 대해서 내가 많은 고통을 주었다고 후회하게 된 것은 70년대의 마지막, 나이 50을 넘어서다. 광주형무소의 0.9평짜리 어두운 감방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아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아직 초등학교(리영희가 이 글을 쓸 때는 호칭이 초등학교였다 - 저자)를 다닐까 말까한 철없는 어린 것들에게 너무나 엄격(가혹?)했던 과거를 뉘우치게 되었다. 다른 가정의 아버지처럼 어린 것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은(못한) 30대, 40대의 나 자신이 냉혈적으로 보였다.(주석 13)
하지만 리영희와 그 가족의 고단한 삶은 이제 출발지점일 뿐이었다. 국제정세의 거대한 변화와는 달리 박정희 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남북관계가 더욱 대결 국면으로 악화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역사에 대한 지식인의 소명 의식을 새롭게 일깨운다.
내가 단언하건대, 리영희 선생의 역사에 대한 감각은 거의 본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맹수나 작은 벌레들이 그들이 사는 환경의 어떤 일도 너무나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처럼 역시 변전이나 그 향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의식의 역량뿐 아니라 그가 받아온 오랜 수난의 역정 가운데서 터득한 통찰 때문이기도 하다. (주석 14)
주석
8) 조유식, '리영희 그 독한 기자정신의 역정', <월간 말>, 1995년 5월호.
9) 리영희, <대화>, 404쪽.
10) 앞의 책, 405쪽.
11) 조유식, 앞의 글, 72쪽.
12) 앞의 글, 69~70쪽.
13) 리영희, '30년 집필생활의 회상', <自由人 자유인>, 39쪽.
14) 이호철, 앞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