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아픔을 지고 살아간 전극념(全克恬) 김 상 호
전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섭(?)이다. 기원 전 18년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藜), 오간(烏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백제 개국의 림(汝霖)
<가계도> 공을 세우고, 백제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지금은 도시조로부터 18본으로 분관되었다. 중시조 학준의 14세손인 식(湜)은 대사간, 대사헌, 예조참판, 대사성을 거쳐 자헌(資憲)의 품계에 올랐다. 정실은 강화 최씨이나 일찍 죽어 자손이 없고 후실은 남양 홍씨로 3남 1녀를 낳았다. 측실은 4남 2녀로서 4남은 극개(克慨), 극항(克), 극징(克澄), 극층(克)이다. 첫째 아들 극항(克恒)은 나이 서너 살에 글을 지었으며, 12살 때에 자고사(??辭)를 지어 좋은 평판을 얻었다. 특히 시에 뛰어났고, 동서고금의 책을 많이 읽고 잘 기억(博覽强記, 박람강기)하여 선진들로부터 경이와 찬탄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정랑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호종하던 중 인조의 명에 따라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가 성을 지키다가 후사없이 전사하였다. 사후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정려되었다. 둘째 아들이 극념(克恬, 1597~1660)이다. 자는 유안(幼安)이며, 호는 창주(滄洲), 어은(漁隱)이다. 1597년(선조 30) 정월에 출생 전상학,『충간공 전식』「연보」, 2011, 15쪽. 이 때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창주 선생의 백씨 극항과 아우 극연의 후사가 없어 적통으로 대를 이어갈 자손이 없고, 문중을 관리할 관리자로서 벼슬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선생은 은거하면서 문중을 돌보고 2남 4녀의 2남 학(?)과 후() 중 둘째 후()를 극항의 뒤를 잇도록 하여 대를 보존하였다. 가문의 가통 보전 활동과 학문에 몰두하며 후진 교육으로 일생을 보냈으며, 1660년 64세로 졸하였다. 창주 선생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벼슬인 사산감역관은 왕궁을 호위하고 있는 둘레의 산과 성곽을 관리하는 것이다. 벼슬 명칭에서 사산(四山)은 조선시대 서울의 4산인 백악산(북악산), 목멱산(남산), 인왕산, 낙타산(낙산)으로서 사대문안과 왕궁을 옹위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왕실과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자연재해와 인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조선왕조 초기부터 4산에 금표를 세우고 이를 관리하는 감역관서를 설치한다. 감역관은 무관직으로 병조(兵曹)에서 글을 읽은 선비들 중에서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받아 임명하였다. 비록 음직(蔭職)이었으나, 글을 읽은 선비들이 등용된 때문에 이후 "지위가 재신(宰相)의 반열에 오른 자가 많았으며, '남행(南行) 조선시대 과거를 거치지 않은 문음자제나 은일지사를 관직에 임명하던 제도(蔭職). 옥천 전씨의 문중에서 창 주선생과 전극태 두 분이 감역관으로 임금의 낙점을 받은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필자는 임금이 옥천 전씨 문중에 은전을 베푼 것은 사서의 큰아들 극항, 막내아들 극연 두 아들이 병자호란으로 잃은데 대한 은전을 베푼 것으로 본다. 후대에 창주 선생의 시문, 행장 등을 모아 2권 1책의『창주집(滄洲集)』이 발간되었는데 이 책에는 시(詩) 203수와 상량문, 비음기(碑陰記), 행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당과 송나라의 명작을 모방한 것이 많으며, 훈세(訓世), 탄로(歎老), 병후(病後) 등은 후손을 훈계하는 내용의 시이다. 시문이 청아하고 품격이 높다. 궁거구점(窮居口占), 식빈(食貧), 맥반(麥飯)은 선비 살림살이의 곤궁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서 여유있는 생활을 동경하는 갈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규원(閨怨), 북부원(北婦怨)에서는 병자호란 뒤 청나라가 조공의 명목으로 우리나라 처녀들을 데려가는 처사를 비난하고, 부모와 이별하고 타국에 인질로 끌려가는 처녀들의 원한을 잘 나타내고 있다. 표달(豹獺)도 청나라의 사신들이 사납고 악독한 것을 이리와 표범에 비유하여 그들의 횡포를 규탄하고 있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에 사람 조공을 바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규원(閨怨)이란 시를 보면 청나라에 간 여인의 실상을 연상해 볼 수 있다. 閨怨(규원) 또한, 청나라에 끌려가는 조선 여인들의 한(恨)에 대한 서문과 함께 여인의 한을 대신 시로 읊었다. 北婦怨(幷小序)〔북부원(병소서)] 時淸國六使數日內相次入都迫令結昏擇二品以上官之女假稱皇后以士族庶女爲侍婢而帶行其寃抑悲號之狀慘不忍見(시청국륙사수일내상차입도박령결혼택이품이상관지녀가칭황후이사족서녀위시비이대행기원억비호지상참불인견) 要抱明妃出塞悲(요포명비출새비) 왕소군이 변방을 나가는 슬픔을 다시 품으니 이 시에서 청나라로 가는 조선 여인을 왕소군(王昭君, 明妃)에 비유하였다. 왕소군은 중국 한나라 원제 때 이름이 왕장(王?)으로 후궁이다. 이 때 흉노와 국경에서 잦은 마찰이 있어 화친을 위해 원제의 후궁을 흉노 추장 선우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원제는 후궁 중에서 못생긴 후궁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보낼 후궁을 간택하기 위해서 화공에게 모든 후궁의 초상을 그려 올리게 했다. 화공은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뇌물을 준 후궁들은 예쁘게 그려주고 뇌물을 주지 않은 후궁은 추하게 그렸다.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다. 원제는 초상화를 보고 추하게 그려진 왕소군을 낙점하고 흉노 추장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왕소군이 흉노로 떠날 때 그녀를 본 원제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 화공을 국문을 하니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화공은 곧바로 사형을 시켰으나 원제는 못내 아쉬워했다.
문집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선생이 병자호란을 직접 겪으면서 형제를 잃고 멸문의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정신적인 압박감과 선비들의 일반적인 생활의 곤궁함을 나타내고,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나라의 사신을 ‘표범’과 ‘이리’로 표현하고 조선인의 원한을 담은 글들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병자호란 중에 행방불명된 극연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많이 태웠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조선인이 속환된다는 소식을 기다리다가 돌아오지 않자 죽은 것으로 치부(置簿)하여 가짜 묘까지 만들어 장례를 치를 생각도 했다. 아버지인 사서 선생은 1637년 4월 심양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있던 좌의정 이성구(李聖求) 이성구(李聖求), 1584(선조 17)∼1644(인조 2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 1637년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결국 실종된 막내아들 극연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장례절차를 생략한 후 초하룻날 신주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전란으로 인해 큰아들과 작은 아들, 동생과 아우를 잃고 살아 남은 자의 비애를 엿볼 수 있는 한 부분이다. 이렇듯 창주선생은 조선시대 음직 중에서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의 직으로서 세 사람의 천거를 받아 임금이 낙점한 감역관의 벼슬을 버리고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인적, 물적으로 쇠락한 가문의 보전과 오늘날의 옥천 전씨가 대를 이어가며 가문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한 장본인(張本人)이다. |
출처: 빛마당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빛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