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이기철
한 알의 사과알 속에 여름 물소리와 저녁 햇살이 익어 있다는 한 줄의 표현을 나는 이제 허용하려고 한다.
참말보다 거짓말의 아름다움을 거짓말의 저 철저한 속임수의 아름다움을 나는 이제 허용하려고 하고 있다.
바닷가에선 물새의 죽음에 절망하고 돌아와선 참말에 능한 書冊의 한 句節에 절망하고 절망하면서 절망을 딛고 돋아나는 풀잎처럼
여름은 또 한번 가을로 가고 있다는 이 거짓말의 平和에 기대는 즐거움 거짓말의 平和 거짓말의 거짓에 기대는 즐거움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 이기철
나무의 생각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을 넓히고 좁히는 것은 나무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무는 나무가 벋고 싶은 곳으로 가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일하다가 쉬는 나무의 자리다 길을 아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서 제 지닌 만큼의 자유를 심으면서 나무는 가지와 잎의 생각을 따라 그늘을 만든다 수피 속으로 난 길은 숨은 길이어서 나무는 나무 혼자만 걸어 다니는 길을 안다 가지가 펴놓은 수평 아래 아이들이 와서 놀면 나무는 잎을 내려 보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 가로와 세로로 짜 늘인 넓은 그늘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그리움 측정 법 / 이기철
다 말해버리지 못해 입안에 오래오래 불덩이로 남아 있는 것 스러진 줄 알았는데 가보면 새록새록 살아 있는 것 책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 보니 창에도 서려 있는 것 오다가 자꾸 뒤가 궁금해 다섯 번은 돌아보게 하는 것 수숫대처럼 가늘고 힘겹게 등뒤에서 오래오래 흔들리는 것 양말까지 다 챙겼는데 도착해보니 그것 하나만 남겨두고 온 것 事實이 아니고 實在가 아닌 것 實體가 아니고 實物이 아닌 것 어제까지 내 안에 소복했는데 오늘은 어디에도 없는 것 지금까지 부르던 이름을 지우고 새 이름 붙여주고 싶은 것 개화보다 더 일찍 영글어 버린 것 내다버렸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는 것 일찌감치,라고 말하면 훨씬 늦게 오는 것 천천히,라고 말하면 일찌감치 내 안에 와 있는 것 내가 익혀온 공부 중 가장 어려운 공부법 그리움 측정법
인생 / 이기철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 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네가 있어 / 이기철
너를 어찌 그립다고만 말할 수 있느냐 너는 햇빛 너는 향기 너는 물결 너는 초록 너는 새 움 너는 이슬 너는 꽃술 너는 바람 어떤 언어로도 너를 다 말할 순 없어 너는 봄비 너는 볕살 너는 이삭 너는 첫 눈 너는 붉음 너는 노랑 너는 연두 너는 보라 네가 있어 세상은 아름답고 네가 있어 세계 속에 이름 하나인 내가 있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 이기철 시인의 약력 ]
* 1943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 영남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 1963년 경북대학교 주최 전국대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에서 시 「여백시초」가 당선 1972년 [현대문학]등단* * 시집 : 『낱말추적』 『청산행』, 『전쟁과 평화』,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 다』,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흰 꽃 만지는 시간』, 『산산수수화화초초』『영원 아래서 잠시』 * 소설 『땅 위의 날들』, 에세이집 『손수건에 싼 편지』,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영국문학의 숲을 거닐다』 ** *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청도 낙산에서 ‘시 가꾸는 마을’을 운영 * 수상 : 대구문학상, 후광문학상, 김수영문학상, 금복문화상, 도천문학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목월문학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