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虛無主義) 또는 니힐리즘(Nihilism)은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nihill('허무'의 라틴어)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철학적 견해이다.
우주·인생의 진상을 무(無)에서 보려고 하는 사상은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나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에서도 볼 수 있으나,
자각적인 사상으로서의 본래의 니힐리즘은 19세기 중엽 이후로부터 현대에 걸친 서구 사회의 특유한 사상이다. 곧 근대의 격변기에 서구 근대 시민 사회의 가치체계가 붕괴하고 그 후에 올 장래의 가치에 대해 전망할 수 없는 역사의 위기적 전환기에 있어서 소시민층의 세계관의 반영으로서 성립한 것이다. |
석가모니가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놔두고 성을 몰래 빠져나간 사실을 보면..
그의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에서 도망치는 모습이 아닌가..
그런 심정은 니힐리즘의 설명과 다르다 해도 삶을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으로
삶을, 세상을 허무주의로 보고 있다는 주장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럼 허무주의는 현 현상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기에 더 나아가면 무 정부적이고, 현 사회 질서를 깨려 하고 타락과 쾌락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허무주의는 그런 것이라 하여 그것에 빠져 비틀거리는 삶.. 소극적 허무주의자.. 이라면 쾌락이나 무정부적일 수 있지만
그런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자세로 나아갈 때.. 적극적 하무주의자.. 그들은 오히려 현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닐까..
노장자의 허무주의는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에서 벗어나 철저한 자기 긍정의 세계를 구축했고,
니체는 서양의 신 중심 사회를 허무주의로 비판하면서 인간 중심인 사회로 바꾸려 한다.
석가모니의 허무주의는.. 본해 허무주의라 할 수 없는 게.. 그가 세상을 도망치듯 탈출한 것은..
당시 인도 사회가 인정하고 있는 인생은 괴로움이며, 그런 인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닌 윤회한다는 인생관이요 세계관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그런 괴로운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로
굳이 허무주의라고 하려면 소극적 하무주의가 아닌 적극적 허무주의와 통한다.
그런 것을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눈 높이로
불교는 세상을 온통 괴로움으로 보고.. 허무주의..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려
무아를 깨치려는 허무주의적인 종교라고 말하고 있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진짜 허무주의로 보면서..
그러면 그런 일반인들의 입장에 반해 불자들은 왜 허무주의자가 아니 되는 걸까?.
아니, 불교 수행자들이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드물지만 발견할 수 있다.
‘단하소불(丹霞燒佛)’이라 하여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선사가 낙양의 혜림사(惠林寺)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입니다.
겨울밤이라 매우 추웠으나 절의 주지는 장작이 없다며 방을 따뜻하게 해주지 않자..
천연 선사는 법당의 목불을 가져와서 불을 지핍니다.
원주 스님이 “불경스럽게 그럴 수 있느냐” 하니
선사 왈 “나는 부처님을 다비해서 사리를 얻으려고 합니다”고 응대합니다.
“나무토막에 무슨 사리가 나오겠습니까”
“사리가 안 나오면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이겠습니까”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을 가져와 장작으로 사용하는 것은 허무주의에서도 최상급 니힐리스트가 아닌지..
이율곡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느끼고 산사로 들어가 중이 되려 했다가 이삼년 지나자 슬며시 환속했다고 한다. 인생 무상을 느낀다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닌가..
출가하는 자들 가운데 인생의 괴로움을 깊이 느끼고 출가하는 자가 적지 않으니 그들은 허무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출발이.. 불교가 니힐리즘이든 아니든..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수행을 하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괴롭다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삶이 참 삶이 아닐 뿐 아니라 그런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나 과정은 당연히 사회에서 취하고 있는 방법과 아주 다르니.. 예를 들면
자비희사(慈悲喜捨)라 하여.. 괴로움에 허덕이는 자에게 그와 하나가 되어 자비를 베풀고,
그가 좋아하고 행복해하면 함께 행복해하다,
그와 헤어지면 그간 했던 자신의 행동을 모두 잊으라는 게 그것이다.
그렇게 듣고 배우는 불자들은
자신이 힘이 적어 주위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을 많이 돕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지만..
목표 없이 방황하지 않기에
스스로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근본적인 의심 나 없음인 무아라는 것.. 그것이 허무주의 극치가 아닌가 하는 점은..
무아를 의심하건 아니건.. 무아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무아는 진리라고 불교는 말한다.^^.
진리라면 그것을 따르고 추구하는 행동이 허무주의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