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1)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退無怨者
물러가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모습은 가관(可觀)이다. 대인(大人) 같은 사람은 별로 눈에 안 띈다. 시장바닥에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흙탕 속에서 뒹구는 모습이다. 국회에서 인사청문회 하는 모습을 보면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잘 골라내면서 자기 눈에 있는 대들보를 보지 못하는 소인배(小人輩) 모습이다. 그러하니 국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이렇게 어수선할 때 국민적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 대다수에게 존경받는 대인(大人)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은 나만의 소망은 아닐 터이다.
각설하고, 10여 년간 줄곧 진행하던 자치통감 원전 읽기 모임이 코로나 사태로 중단하였다가 여러 사람의 희망에 따라서 자치통감에서 ‘삼국지연의’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기로 하였다. 그래서 자연스레 후한의 뒷부분 영제(靈帝)의 말년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영제(靈帝) 중평 4년(서기 187년)조에 전 태구현(太丘縣)의 현장(縣長)이던 진식(陳寔)이 죽었다는 사건이 실려 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그를 조문하려고 온 사람이 3만여 명이었다. 사실 진식은 관원 가운데 하급직이라 할 현장(縣長)을 끝으로 고향인 하남(河南)의 허현(許縣)에 머무는 퇴직 관원이었다. 그런 그가 죽었는데 전국에서 조문하려는 사람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에 관한 일화도 실려 있는데, 그가 고향에 가 있는데 그곳 사람들 사이에 고소하고 다투는 일이 있게 되면 두 사람이 합의(合意) 아래 진식에게 가서 올바로 판단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때 진식은 구부러진 것을 바로 잡고 사리를 분명히 깨우쳐 주고 판단해 주었는데 이를 듣고 물러가서 진식이 잘못 판단하여 억울하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차라리 형벌을 더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진군(陳君, 진식)이 나에게 잘못했다고 하는 지적을 받고 싶지는 않다.”라고까지 하였다니 그는 존경 받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높은 관직을 가지고 정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면 혼란한 후한말의 사정은 좀 안정되었고 한의 운명도 기울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는 선택을 받지 못하였고 고작 현장으로 끝나야 했다. 왜 그랬을까? 이때에 모든 관직은 외척이나 환관이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았고 황제인 영제(靈帝)조차 스스로가 관직을 팔고 있었다. 예컨대 태수직(太守職)은 2천만에서 3천만 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식 같은 사람이 관직을 사려고 줄을 대지 않았을 터였으니 현장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시기에 태수라도 하고 싶은 사람은 궁궐로 달려가 서원(西園)에서 먼저 돈을 내고 나서야 임명되었다. 이렇게라도 관직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직위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착취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비록 3천만 전을 내고 관직을 얻어도 남는 장사여서일 것이니 약삭빠른 인간들이 관직을 사려고 하지 않았을까?
황제가 파는 관직은 지방관만이 아니었다. 삼공(三公)이라는 최고의 관직도 돈을 받고 팔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건란은 일어났고 어수선 하자 그래도 나라를 안정시켜야 했고, 그러자면 그래도 유능한 사람을 삼공 자리에 두어야 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명성 있는 진식의 사촌 형인 진열(陳烈)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냥 임명한 것이 아니었다. 많이 깎아 줘서 5백만전만 받았다. 임명하는 날 백관이 다 모이고 진열을 사도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영제는 5백만으로 깎아 준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아주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살짝 ‘아깝다. 1천만은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라고 하였다.
이러고도 왕조가 무사할 까닭은 없다. 백성들은 살기 힘들어지자 의지할 곳을 찾았다. 마침 몇 개의 주문(呪文)만 외우면 병이 낫는다고 하는 장각(張角)에게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이들이 드디어 뭉쳐서 반란을 일으켰고, 끝내 후한말 삼국지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얼마 후 4백 년을 지탱해 온 한왕조는 무너졌다.
그러나 이 혼란 속에서도 아무런 바탕이 없었던 유비(劉備)가 등장한다. 그는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서 인재의 영입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고사는 제갈량을 책사로 모시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했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런 배경을 갖지 못한 유비는 제갈량을 모시는 바람에 배경이 튼튼했던 조조와 손권과 천하를 3분하고 황제에 오를 수가 있었던 것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한왕조를 물려받은 영제는 진식 같은 인재가 있어도 모시지 못했고, 그 4촌 형에게도 돈을 받고 삼공을 팔았으니 성공할 까닭은 없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은 후한말 영제(靈帝)시절보다 나을까? 연전부터 시장이 되고 지사가 된 사람이 개발이라는 미명(美名)을 앞세워 개발 사업을 벌이게 하여 천문학적인 돈을 업자에게 남겨주고 반대급부로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아직 재판 중이어서 결론은 안 났지만 이러한 말이 회자되는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 사건과 관련된 사람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해 주고 50억씩을 받았다고 하여 50억 클럽이란 말까지 나왔다.
이들만 그럴까? 정치한다는 사람들에 내년 선거를 앞두고 출판기념회를 갖는다는 소식이다. 그 책에 무엇이 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를 계기로 책값이란 명목으로 돈을 받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와서 책을 살까? 정치하는 사람에게 줄을 대어 보려는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된다. 이들이 후한말의 영제이고 환관이고 외척이며, 돈을 주고 관직을 사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의 상황은 녹녹하지 않다. 국제적으로 점점 더 경쟁은 심해지고, 북한에서는 공공연하게 핵무기를 개발하고 ICBM을 쏘아대는데, 이에 대처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이처럼 부패의 사슬로 묶여 있으니 이들에게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이 위기를 구할 사람은 없는 것일까? 없을 까닭이 없다.
영제 때 진식(陳寔)은 많은 인망을 가진 사람이지만 시골 고향에 묻혀 있었다. 유비시절에는 초려(草廬)에 묻혀있는 제갈량(諸葛亮)이 있었다. 영제는 진식을 모셔 오지 못하였지만 유비는 제갈량을 모셔 왔다. 결과는 진식을 못 모신 후한은 멸망하였고 제갈량을 모신 유비는 천하를 3분하고 촉한의 황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어느 곳도 신뢰할 수 없다고. 후한말의 상황과 흡사하다. 이 시대를 구할 인재가 없을까? 영제 때에는 진식은 있었고 유비시절에는 제갈량이 있었다. 지금도 쓸 만한 인재는 진식이나 제갈량처럼 모두 숨어지내는 것은 아닐까. 현재 드러난 사람은 3천만 전을 주고 태수직을 사서 본전의 몇 배 몇 십 배를 벌고 싶어 하던 관리 비슷한 사람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내년 4월이면 총선이다. 인재를 뽑을 기회다. 주권자들이 유비 같이 숨겨진 진정한 인재를 알아보고 뽑았으면 좋겠다.
첫댓글 좋은 사론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