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퍼왔습니다.
조선시대 군대의 문제의식이 우리 까페에서 고민하는 문제의식과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는듯 합니다. 물론 구체적인 장비나 여건이 조금씩 틀리지만...,
http://news.donga.com/3/all/20130214/53043154/1
조선군사들, 하루 30리 이내만 걷고 A텐트서 숙영했다
《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행군’이란 강도 높은 군사훈련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같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도 국군 장병들은 ‘혹한기 훈련’이란 이름으로 산과 들에서 며칠을 보낸다. 이때의 행군훈련은 아무리 추위에 강한 사람이라도 이를 악물어야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혹독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행군훈련이 있었다. 》
행군 30리 넘기면 전투마 지쳐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한 조선의 군사 중 상당수는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었다. 따라서 보리나 벼를 심고 수확하는 농번기에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기가 어려웠다. 조선시대의 군사훈련은 겨울을 비롯한 농한기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행군도 훈련에 포함됐다. 조선의 병사들은 보통 인시(寅時·오전 3시)에 아침밥을 챙겨 먹고 묘시(卯時·오전 5시)에 군장을 메고 행군에 나섰다고 한다. 하루에 30리(약 12km)를 걷는 게 기본이었다. 모든 일정은 미시(未時·오후 1시)에 마무리했다.
행군 거리를 ‘하루 30리’로 제한한 이유는 병법서에 나온다. ‘이 거리가 넘을 경우 군사들의 근력이 쇠약해지고 전투마가 지쳐 적의 기습이 있을 때 아군 10명이 적군 1명을 당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오후 1시 즈음에 행군을 마치면 해가 지기 전 숙영지와 진지를 구축해 혹시 모를 적의 기습에 대비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경우에는 야간행군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밀행(密行)’이라 불렀다. 밀행을 할 때는 군사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전투마의 목에 건 방울도 떼고 걸었다. 모든 불빛을 감추고 북소리도 울리지 않아 적으로부터 아군의 동정을 감췄다. 불빛이 필요할 때는 조족등(照足燈·도적을 잡을 때 쓴다고 해서 조적등·照賊燈으로도 불림)이란 특수한 등을 이용해 발밑만을 비췄다.
이렇게 숨을 죽이고 밀행을 하다 보니 대열 앞쪽에서 발생한 일이나 명령을 뒤따르는 후미에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야간행군 중에는 특정한 물건을 후미에 전달해 명령을 주고받는 ‘암령(暗令)’ 훈련도 병행했다.
행군을 하던 군사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할 때는 나뭇가지를 비롯한 초목의 가지를 꺾어 조용히 뒤로 전달했다. 앉으라는 신호를 나타내는 물건은 돌덩이였다. 느리게 행군하라고 지시할 때는 긴 곤봉을 전달했고, 행군의 속도를 높이라고 할 때는 죄인의 귀를 뚫을 때 쓰는 관이(貫耳)라는 작은 화살을 전달했다.
그렇지만 암령은 전달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것이 각 방위를 상징하는 색깔의 작은 등불을 오방색(다섯 방위를 나타내는 색) 깃발에 달아 쓰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행군로의 앞을 수목이 가로막고 있을 때는 청색 등을 매단 청기를 들어 적의 매복에 대비하거나 우회로를 찾으라는 신호로 썼다. 물이나 늪지대가 나타나면 흑색 깃발을 올려 수중전에 대비하게 했다. 앞쪽에 군사나 전투마가 나타나면 흰색 등과 깃발을 올렸고, 연기나 불이 가로막고 있을 때는 붉은 등과 깃발을 들어올려 주변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숙영지 주변엔 ‘지뢰’ 깔아
행군 도중 목이 마른 병사는 양가죽으로 만든 물통(양피낭)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휴대한 물이 떨어질 즈음엔 식용수 담당관이 특정 위치의 물을 지정해 병사들이 직접 떠먹게 했다. 이때는 혹시나 적이 물에 독을 풀었을 것을 우려해 진중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나 어린 가축이 먼저 먹어보게 했다. 물에 탈이 없는 것이 확인된 후에야 일반 병사들이 마실 수 있었다.
이렇게 행군을 하다 숙영할 곳에 도착하면 요즘 군대에서도 많이 쓰는 A텐트와 비슷한 간이 천막을 치고 군사를 쉬게 했다. 이런 방식의 간이 천막은 설치와 이동이 자유로워 전통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됐다.
숙영지 주변에는 귀전(鬼箭)이라고 해서 대나무 통에 날카로운 마름쇠를 넣고 똥물과 독약을 섞어 만든 일종의 ‘지뢰’를 주변에 깔아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만약 적이 귀전을 밟으면 그 소리를 통해 수비군이 기습 사실을 알 수 있다. 귀전을 밟은 적군은 파상풍에 걸리게 된다. 또한 숙영지 주변으로 30보(약 36m) 밖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불에 잘 타는 마른 나무들을 쌓아놓아 적이 불시에 공격하면 여기에 불을 질러 적의 형세를 살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겨울철 행군은 고되고 힘든 훈련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전술훈련처럼 고도로 과학적이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 사극을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이런 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그저 화려한 전투 일변도로만 극을 구성해 매우 안타깝다. 숙영지에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순식간에 초토화되는 조선군의 모습은 이제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조선왕조가 500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치밀하고 체계적인 군사 운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우리 자녀들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조선군이 아닌,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선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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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대 생활상(2)
난중일기 속 일상
조선시대 군대의 모습과 생활상은 어땠을까. 영조(1724~1776)때 지리학자인 정상기(1678~1752)가 펴낸 [농포문답]을 보면 전쟁터로 나가기 전 준비해야 할 물품 등 당시 군인 휴대품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들이 눈에 뛴다.
개가죽
우선 행군하다 장맛비를 만났을 때 대처방안으로 ‘ 개가죽’이 등장한다. 사나흘 정도의 비는 유지(기름먹인 종이)군막을 치도록 했는데, 바닥에 판자를 댄 다음 큰 가죽요를 펴면 습기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각자 개가죽을 준비해 여름에는 습기를, 겨울에는 추위를 막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임진왜란 때는 서피(담비털)로 귀마개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비변사의 공문에 의하여 원수가 쥐 가죽으로 만든 남바위(귀마개)를 좌도에 열다섯 개, 우도에 열 개, 경상도에 열 개, 충청도에 다섯 개로 나누어 보냈다.(난중일기 1594년 10월 12일자)
당시 병영에 월동장구로 귀마개가 있었는데, 그것을 서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담비털 귀마개는 흔치 않은 귀중품이어서 장교들만 썼던 모양이다.
전투화
행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전투화다. [농포문답]은 계절별 신발 제작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추운 겨울에는 익힌 쇠가죽으로 긴 버선 모양의 신을 만들고, 속 바닥에 풀을 많이 깔아 신도록 했다. 그러면 발이 따뜻하고 바닥이 딱딱하지 않아 쉽게 해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습한 여름, 신발의 높이는 복사뼈에 ‘ 겨우 ’ 닿도록 하라는 세심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전투식량
적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군량과 반찬을 대기 어려우니 ‘무씨’를 많이 챙기라고 주문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를 때 무를 심어 줄기와 잎을 뜯어먹으라는 것이다. 행여 버려도 그리 아깝지 않고, 환군하다 뜯어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소금과 간장을 챙겨가는 방법도 있다. 맑은 장에 담갔다가 볕에 말리기를 수십 차례 반복한 무명베를 식사할 때 물에 풀어 우려 마시도록 한 것이다. 또 거위 알 만하게 뭉쳐 만든 소금을 불에 태워 단단하게 만든 뒤 두세 개씩 휴대하도록 하면 급할 때 유용하다고 했다.
식수 확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먹을 것이 없어도 2~3일은 견딜 수 있고 말 또한 죽지 않지만, 물이 없으면 하루도 지탱하기 어렵고 결국 인마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진영을 설치하거나 성을 지킬 때는 물맥을 잘 아는 사람을 구해 여러 차례 시험하고 성과가 있으면 뽑아써야 한다고 권유한다.
조선후기 병사들이 전투식량이 실제로 재연된 적이 있었다. 지난 2007년 전북 고창에서 열린 모양성제 행사에서 김수완 전 국방부전통의장대장(현 예문관 본부장)이 정조 대에 발간된 병서[병학지남연의] 기록을 토대로 재연한 것이었다. 김수완 전 의장대장은 “ 군자에 군사들이 사용하는 식량, 신발, 갑옷, 병기, 말의 재갈 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른 식량이니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먹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해야 하고, 만약 이를 휴대하지 않았을 때에는 무기를 잃은 죄와 똑같이 다스려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고 했다.
재연된 전투식량은 크게 4가지였다. 수소문 끝에 당시 직접 조리를 한 고창 주민 백옥성(74.여)씨에게 완성된 음식의 종류와 제작 방법을 들어봤다. 밀가루 국수는 밀가루를 소주에 담갔다가 건져 말리기를 여러 번 반복한 뒤 말린 밀가루를 다시 물에 타 반죽을 한 다음 면을 뽑았다고 한다.
백씨는 “ 소주는 알코올 성분인데, 아마도 국수가 쉬지 않도록 하려던 것 같다”고 했다. 주먹밥은 식초를 탄 물로 밥을 지었다. 식초를 쓰면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는다. 백씨는 “ 소금으로 간을 했고,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식초를 방부제로 쓰지 않았겠느냐 ”고 했다. 밀가루 떡도 전투식량으로 쓰였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이 실제 적용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혜은 박사는 “ 조선 후기, 그 중에서도 정묘. 병자호란 전후 시기 조선과 청나라 군대의 무기와 병선 운용, 군복, 전투식량 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으며[농포문담]은 그나마 조선후기 군대의 모습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자료” 라고 했다.
첫댓글 저는 행군할적에는 배가 너무 고프던데요 그런데 건빵 입안에 녹여 먹으면서 행군하면 배가 안고프더군요
고려의 마지막 왕이 이성계입니다. 그리고 조선을 개국하죠. 그렇습니다. 위에 모든 병법들은 고려에서 이여진 것이며 이는 또 고구려에서 그리고 고조선에서 이어지는 것이지요. 하루아침에 뭔가 ,뻥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이런 생각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우리가 21세기를 살지만 우리 피속에 조상의 지혜와 문화와 얼이 깃들어 있음을 알기에 많은 노력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얼을 보면 조선이 얼마나 위대한 나라중에 하나였는지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당근 고려 , 고구려 그리고 고조선이 또한 그런겁니다.
네 어쩌다가 님 말씀 처럼 하루아침에 뭔가 빵하고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군사부분에서만 보더라도 고구려, 고려, 조선은 한중일 삼국중 수성전이 가장 강한나라였지요. 고구려 시대는 말할것도 없고, 대몽항쟁, 임진왜란때의 행주산성, 진주성 전투등등.. 그에반해 중국은 공성전에 강했고(임진왜란 평양성함락), 일본은 고대부터 2차대전까지 단병접전에 강했지요.
그리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에 패망한 조선이란 나라가 사대주의 찌든 문약한 나라라고만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그리 간단히 판단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내요.
그렇쵸, 한왕조가 500년간 지속한 경우는 엄청나게 희박한 경우죠. 조선왕조실록같은 경우 지금도 이렇게 체계적으로
기록을 남기지 못하잖아요.
굿아이디어 많네요.. 잘 밨습니다.. ^^;
첫번째 박사의 결론이 참 한심하네요..
재밌게 잘봤습니다^^ 지금 우리군대에서 40킬로 행군하는데 이렇게 무식하게 행군하는데는 세계에 별로 없다는군요 실전경험이 풍부한 미군도 그냥 짧게 끝낸답니다 글에 나온대로 하루에 40킬로씩 군장지고 행군하면 전투고 뭐고 녹초가되죠
이게 예전 김신조때부터 그렇게 늘어났다고하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