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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정의 |
-임진왜란이란? 임진년(1592년)부터 무술년(1598년)에 이르는 전쟁이다. -승리란? 정부측 : 목적을 달성한 전쟁이다. 야당측 :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 -전쟁이란?임진왜란 그 자체로 규정한다. |
임진왜란의 용어를 살펴보면, 책 P. 255에‘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은 1592년 4월 13일의 일이다.’라고 적혀있으며, p. 310에는 정유재란은 1597년 1월 무렵, 왜군이 14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중략)… 정유재란까지 포함해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따로 떼어 정유재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임진왜란의 정확한 시기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승리라는 단어는 각 주장을 나눌 측이 어떻게 용어 정의를 하느냐에 따라 매우 유리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정부측에서 승리란 ‘목적을 달성한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논제인 ‘임진왜란, 승리한 전쟁인가?’를 볼 때, 주어가 없기 때문에 승리를 하였다면, 조선의 입장에서 승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일본은 침략 목적인 조선을 지배하는 것, 명나라를 치는 것 등의 입장으로 일본의 패배를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야당측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의 승패에서는 누가 더 이익을 얻었는가 그리고 누가 더 피해를 당했는가에 따라 승패를 나누었는데, 이는 일본의 패배를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참전국(조선, 명, 일본)들 그 어떤 나라도 승리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이란 용어는 노량해전이나 명량해전 그리고 정유재란 등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부 합쳐서 임진왜란이라고 통합하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정부측의 입장과 야당측의 입장의 각각의 쟁점과 그에 대한 주장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더욱 보기 쉽게 표로 정리하였습니다.
정부측 |
야당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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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
쟁점1.참전국은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쟁점2.조선은 국가체계를 유지했다. 쟁점3.자주적으로 나라를 지켜 승리를 쟁취했다. |
쟁점1.참전국은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없다. 쟁점2.국가의 역할 쟁점3.전후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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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1 |
주장1 |
조선) 우리의 땅을 보전하였다. |
조선)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 |
증거 |
1.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조선 땅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2. 노량해전은 정유재란, 나아가 임진왜란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이다. |
1. 게다가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p.185) 2. 2/3가량의 경작지 훼손(p.277) 3. 왜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4월인데도 보리 심는 백성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p.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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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2 |
왜) 조선을 정복하지도, 명을 치지도 못했다. |
명나라)임진왜란으로 명나라가 얻은 것도 실질적으로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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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
1.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치고자 한 야욕을실현하지 못했다. 2. 왜는 고려에 대한 복수를 성공하지 못했다. |
1.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참전함으로써, 훗날 후금의 공격을 받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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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3 |
왜)전쟁을 일으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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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
1.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치고자
한 야욕을 2. 왜는 고려에 대한 복수를 성공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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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2 |
주장1 |
임금이 생존하여 왕권국가 유지 |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놓쳤다. |
증거 |
1. 선조를 대피시켜 목숨을 유지하였다. 2. 신주를 지켜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이었다.(p.112) |
1. 황윤길과 김성일이 왜에 사전조사를 갔으나, 전쟁의 낌새를 눈치 챘지만 조선은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2. 병법의 활용, 장수선발, 군사 훈련 방법 등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까닭에 전쟁이 발발하자 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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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2 |
국가의 행정적 기능을 유지하였다. |
왕과 관료들이 그들이 지켜야 하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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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
1.관리의 임명과 교체가 이루어 졌다. 2.사신을 접견하였다. 3. 이순신의 첫 승전이후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지방까지... 군량의 조달과 통신체계까지 회복(p129) |
1.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린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p.78) 2. 남병사 이혼은 갑산으로 도망쳤다가 백성들 손에 죽었다. 이로써 모든 국토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p.89) 3. 임금께서 평양을 떠나온 뒤로는 인심이 험악해져... 창고가 다 털렸다.(p.114) |
쟁점3 |
주장1 |
훈련된 군사만이 아닌 조선의 백성들이 주체적으로 싸웠다. |
조선이 얻은 전쟁 배상이 없다. |
증거 |
1.각 도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 왜적을 물리쳤다.(p.141) 2.승군 100여 명이 도감에 와서 훈련을 받고자 했다.(p.289) 3.유정은 금강산에서 승군을 일으켰다. 4.의병장 김천일, 고경명, 곽재우, 김면, 정인홍, 김해... (p.141) |
1. 을묘왜변 때에는 대마도주가 주모자의 목을 잘라 와 사과를 하였는데, 임진왜란에서는 왜의 사과나 전쟁 배상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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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2 |
조선의 백성들을 훈련시켰다. |
국가의 재산과 소중한 역사기록을 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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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
1.수천명을 모은 후 조총 쏘는 법과 창ㆍ칼 쓰는 기술을 가르쳤고, 민심을 수습했다. (p.288) 2.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사를 훈련시키라 명하셨다.(p.288) |
1.공노비와 사노비의 문서가 불탐으로써 나라의 재산을 잃었다. (p.253) 2.<<실록>>,<<승정원일기>>와 같은 역사기록의 상실(p.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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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3 |
명의 도움을 받았지만,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조선군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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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
1. 왜군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했지만 이순신이 적을 크게 물리쳐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p.125~p.129) 2. 이순신이 복직한 후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은 육지에서도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에게 크게 패해 큰 타격을 받았다. (p.311) |
<정부측>
쟁점1) 참전국은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이 쟁점에 대한 첫 번째 주장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우리의 땅을 보존’하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성룡은 이여송 제독이 경기 지역을 떠나면서 이 지역을 포기하라고 하였을 때, 우리가 물러나서는 안 될 다섯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역대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 지역에 있어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귀신과 인간이 모두 수복을 바라고 있으므로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경기 남부의 백성들은 오직 구원병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구원병이 물러갔다는 말을 들으면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져 적 편으로 돌아서고 말 것입니다.
셋째, 우리 땅은 한 걸음, 한 뼘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습니다.
넷째, 우리 병사들 또한 힘은 약하나 명나라 구원병과 힘을 합해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때 물러난다는 소식을 들으면 오직 한을 품고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다섯째, 구원병이 물러난 다음 적이 공격해 온다면 그 강한 기세에 눌려 임진강 이북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유성룡의 말에는 국가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와 조선 병사들의 힘을 굳게 믿었고, 실제로 우리는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책 p.311에서 ‘그러나 노량해전은 정유재란, 나아가 임진왜란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린 동시에 이순신의 삶에도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 기록된다.’라고 쓰여있습니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한 왜군은 육지에서도 권율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에게 크게 패해 큰 타격을 받았으며, 1598년 8월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조선 땅에서 철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왜군을 몰아내고자 1598년 11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후퇴하는 왜군 적선 300여척 중 200여 척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이루며 임진왜란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약 7년간의 긴 전쟁을 끝내면서 결국 우리 땅을 지키고 나라를 보존하였습니다.
두 번째 주장은 ‘왜는 조선을 정복하지도, 명을 치지도 못했다.’입니다. 일본은 사실 일행과 함 온일본의야나가와시게노부, 승려 겐소 등이 동평관에 머무를 때, 비변사에서 김성일과 황윤길 등으로 하여금 일본의 내정을 살피려 하였습니다. 그때, 겐소는 김성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명나라와 우리 일본 사이에 국교가 끊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결국 조공도 사라졌는데, 히데요시는 명나라의 이러한 처사에 상당히 화가 나 있습니다. 곧 전쟁이라도 일으킬 것 같습니다. 만일 조선에서 명나라에 이러한 상황을 전하고 조공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조선도 평안하고 일본의 온 백성도 평안할 것입니다.”(P.49) 이는 조선에게 무리한 부탁을 함과 동시에 명나라에서 조공을 안 주면 전쟁을 일으키려는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겐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전에 원나라 군사를 우리 나라까지 인도해 침략에 나서도록 한 것이 바로 고려였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우리로서는 고려의 원수를 갚는 것에 불과합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이렇게 겐소의 말에, 억지이지만 그나마 그들의 명분이 드러났다. 명나라를 치는 것과 고려의 원수를 갚는 것. 그리고 열흘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지만 왜는 명나라를 치지 못하였고, 고려의 원수도 갚지 못하여 그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쟁점2) 조선은 국가체계를 유지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하려면 그 국가 간의 체계가 유지되었나를 중요시합니다. 그에 대한 첫 번째 주장은 ‘임금이 생존하여 왕권국가를 유지’하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말했다시피 왕권국가였다. 즉, 왕이 국가란 의미입니다. 게임 체스를 예를 들면, 여기서 폰을 땄는지 나이트, 비숍들을 얼마나 땄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우두머리인 ‘퀸’을 땄는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책 p.112에서 ‘임금께서는 가산으로 가시고 동궁께서는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박천을 거쳐 산중으로 피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 조선은 왕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신주 또한 유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중에 죽었습니다. 이를 볼 때, 조선의 승리를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두 번째 주장으로 ‘국가의 행정적 기능을 유지하였다’입니다. 책에서 보면, 국가의 행정적 중요 직무를 맡은 관리들의 임명과 교체가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비록 나라는 어수선할 지라도 지금으로 보면 국회의원이라 할 수 있는 관리의 역할이 그래도 그 기능만큼은 돌아갔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신을 자주 접견하였는데, 이는 일본에 대해 침략을 받았지만 그래도 나라의 위상과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p. 129를 보면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했다. 그런데 거제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한 팔이 끊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니 평양성을 점령한 유키나가라 할 지라도 지원군이 사라지게 되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지방까지 지키게 됨으로써 군량의 조달과 통신체계가 확립될 수 있었다. 이는 곧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라고 쓰여있습니다. 이를 보면, 이순신의 첫 승전 이후, 그의 활약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고 아울러 군량 조달과 통신체계가 확립 및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쟁점3) 자주적으로 나라를 지켜 승리를 쟁취했다.
사실 국가간의 전쟁에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인해 승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 승리를 했다 해도 그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없다 할 만큼, 그 도움을 받은 나라에게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은 임진왜란의 승리에 대해 자주적으로 그 과정에서 이루어냈습니다. 그럼이 쟁점에 대해서도 세 가지 주장을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주장은 ‘훈련된 군사만이 아닌 조선의 백성이 주체적으로 싸웠다.’입니다. 당시 곽재우, 김면, 정인홍, 유종개 등의 의병장들은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크게 무찌렀습니다. (p.141) 또한 유정(사명대사)는 금강산에서 승군을 일으켰으며, 그 외 다른 승군들 또한 도감에 찾아와 훈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p.289)
두 번째 주장은 백성들을 위해서 국가에서 직접 훈련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P.288에 유성룡은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사를 훈련시키라 명을 받았고, 그를 도제조로 삼았다고 쓰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국가는 단지 쳐들어오는 왜적에 안일하게 대응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요즘과 같은 군대 시스템으로 백성들을 훈련시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세 번째 주장은 ‘명의 도움을 받았지만,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조선 군이었다.’입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조선의 가장 큰 공적은 주체적으로 승리를 이뤘다는 것입니다. 책 p.125에서 p.129를 보면, 왜군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했지만 이순신이 적을 크게 물리쳐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고 했고 p.311에는 이순신이 복직한 후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은 육지에서도 권율이 이끄는 조선 군에게 크게 패해 큰 타격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명의 도움은 분명 받았지만 결정적 승리를 이끈 것은 우리 조선의 활약에 의해서 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부측 즉, 임진왜란은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한 입장에 대해 세가지 쟁점을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다음은 이 주장에 대해 반대의견을 가진 야당 측의 입장을 보겠습니다.
<야당측>
쟁점1) 참전국은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없다.
임진왜란은 사실상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왜, 이렇게 세 나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조선의 연합군이었지요. 하지만 전쟁 이후, 이 나라들은 얻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의 입장에 대해 주장을 들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주장은 ‘조선은 삼국 중 큰 피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책 P.185에 눈에 띄는 구절이 나오는 데, ‘당시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해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이를 보면, 당시 조선의 경제상황 뿐만 아니라 인심도 흉흉해져 서로 물어뜯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게다가, 가족간의 위계질서도 망쳐져 서로 잡아먹게 됩니다. 책 p.277에는 ‘전쟁으로 조선 경작지의 3분의 2 가까이 파괴되었으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라고 쓰여있는데, 이렇게 국가를 유지했지만 국토를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물리적 피해를 본 게 승리했다라는 증거가 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장은 ‘임진왜란으로 명나라가 얻은 것도 실질적으로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명나라는 조선의 부탁에 의해서 임진왜란에 연합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명나라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 참전함으로써, 훗날 후 금의 공격을 받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정부측의 주장에 들어있듯이 ‘왜는 전쟁을 일으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것 입니다. 왜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치고자 한 야욕을 실현하지 못하였고, 고려에 대한 복수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 나라의 입장을 들은 이유는 야당 측의 ‘승리한 전쟁이 아니다’라는 것을, 주어가 없듯이, 그 누구의 승리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쟁점2) 국가의 역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한강의 물이 3일 동안이나 붉은 모습을 띠었고, 죽산 태평원 뒤에 쓰러져 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나는 등(p.225) 많은 징조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왜의 분위기 또한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황윤길과 김성일이 왜에 사전조사를 갔고, 전쟁의 낌새를 눈치 챘지만 조선은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은 병법의 활용, 장수선발, 군사 훈련 방법 등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한 달도 안 되어 한양이 수복되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전투에서도 우리는 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안보에 대한 허술함과 군사 시스템의 미흡으로 보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패배라는 말 밖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주장으로 ‘왕과 관료들이 그들이 지켜야 하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위에서 정부측이 말한 국가의 행정적 기능을 유지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기능은 백성을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냐는 반박을 하였습니다. 왕이 백성을 버리고 피신을 가고(p.78), 남병사 이혼 등의 백성보호의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도망을 치다가 백성의 손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p.89) 또한, 임금께서 평양을 떠나온 뒤로는 인심이 험악해져 창고가 다 털려 인심과 국가의 제정에 참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p.114) 이를 볼 때, 국가의 3요소인 국민인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왕과 관리들은 책임을 저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은행이라 할 수 있는 곡식 창고도 사실상 무의미하여 국가 시스템의 붕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실정인 것입니다.
쟁점3) 전후처리
만약 조선이 승리를 하였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반드시 있어야 마련’입니다. 을묘왜변 때에는 대마도주가 주모자의 목을 잘라 명확한 사과를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왜는 우리 조선에게 물질적인 보상은커녕, 여태까지 임진왜란에 대해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왜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징비록 어디를 찾아봐도 유성룡은 조선의 승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저 우리는 반성하고, 앞으로 이런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 주장으로는 ‘국가의 재산과 소중한 역사기록을 잃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역사는 국가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없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라고 할 정도인데, 당시 우리는 임진왜란을 통해서 국가의 수 많은 양의 재산과 역사를 잃었습니다. P.253에 ‘임진년 4월 30일, 임금의 어가가 한양 성을 빠져나가자 흥분한 백성들이 먼저 장례원과 형조에 불을 붙였다. 두 곳은 공 노비와 사노비의 문서가 있던 곳이다. … 역사의 보물 그리고 문무용 누각, 홍문관 소장 서적과 춘추관에 보관된 각조 <실록>, 다른 창고에 보관된 고려의 사초 <승정원 일기>까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왜의 노략에 의해서 각종 선릉이 도굴되고 훼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상처를 받은 것은 마치 복싱에서 코피를 쏟는 경우를 쏟는 경우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
이렇게 임진왜란이 승리 여부에 대해 찬성 측과 반대 측으로 나누어 각각 조사를 하였고, 의견을 나눠봤습니다. 사실 ‘조선의 승리이다.’, ‘왜의 승리이다.’ 라고 명확히 정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다양한 측면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그리고 승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였던, 임진왜란을 징비록을 통해서 가장 입체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징비록은 사실상 역사의 정확한 기록의 역할보다는 사건의 정황을 그 역할을 크게 한 책입니다. 정조는 ‘좋은 역사책은 좋은 그림처럼, 신운을 얻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목구비가 닮지 않은 게 없어도, 반드시 뺨 위에 세 가닥 수염을 그려야만,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용렬한 화공이 보기에는 세 가닥 수염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을 듯하지만, 아는 사람은 그것이 정신이 모인 곳임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한다.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큰 일 작은 일을 따지지 않고, 오직 신운이 깃들어 있는 곳을 기록하는 데 뛰어나다. 그러므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정신을 그리지 형태를 그리지 않으며,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정황을 기록하지 사건을 기록하지 않는다.’(일득록/ 문자향/ 남현희 편역) 라고 하였습니다. 징비록을 통해서 역사를 좀더 부드럽게 볼 수 있었던 것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역사는 반성과 성찰의 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역사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수는 해도 좋지만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역사 수업을 받는 학생으로써 중요성을 다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비록 볼 만한 것은 없을지라도 이야말로 그때의 사건과 자취이므로 버릴 수 없다. 그러니 이러써 시골 구석진 곳에서 온 정성으로 충성의 뜻을 드러내고, 우매한 신하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기록하고자 한다.’ (징비록 p.17 / 서문)
*참고문헌
유성룡『징비록』,서해문집, 2003
정조,『일득록』, 문자향, 2008
첫댓글 징비록 외에 임진왜란의 연구서를 좀 더 참고할 필요가 있음. 결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 1차 사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느냐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