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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문화 속 교회 이야기] 캐럴
밝고 경쾌한 선율에 춤 곁들여, 집집 돌며 성탄의 기쁨 노래해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12월 성탄이 다가오면 교회는 물론이고 거리 곳곳에서 캐럴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캐럴은 남녀노소, 종교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노래다. 특히 캐럴에 맞춰 율동하는 어린이들 모습을 보노라면 성탄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어쩌면 이 모습은 캐럴의 유래를 생각할때, 가장 캐럴다운 캐럴일지도 모른다. 단조롭고 밝고 경쾌한 선율의 캐럴은 본디 춤과 함께하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춤과 함께하는 캐럴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일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1223년 이탈리아 그레치오성당에 아기 예수가 탄생한 마구간을 본 따 처음으로 구유를 만든 성인은 구유 앞에서 춤과 노래로 예수의 탄생을 찬양했는데 이것이 바로 캐럴이었다고 한다.
캐럴의 어원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영어 캐럴(Carol)은 옛 프랑스어 카롤르(carole)나 고대 그리스어 코라울리엔(Choraulien)에서 왔다. 카롤르는 원 모양을 그리며 추던 춤의 일종이며, 코라울리엔 역시 피리 연주에 맞춰 추는 춤을 말한다.
캐럴이 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불린 것은 5세기경부터라 한다. 당시 캐럴은 구전으로만 500여 곡이 전해졌다. 캐럴의 내용에는 마리아, 아기 예수 등 성탄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부활대축일 등 교회력에 맞는 다양한 내용의 캐럴이 존재했다. 14세기 무렵에는 캐럴이 악보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지며 교회음악의 한 분야로서 자리 잡았다.
16세기 청교도 등의 개신교 신자들이 종교적 행사와 축제를 엄격히 금지하면서 위축되기도 했지만, 18세기 캐럴 복원 운동이 일어나고 미디어매체가 발달하면서 교회는 물론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노래로 거듭나게 됐다.
집집마다 방문하며 캐럴을 부르는 캐럴링(Caroling)은 19세기 초 시작됐다. 영국 아이들이 성탄대축일에 사용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행사에서 유래했다. 이 캐럴링은 오늘날 성탄의 대표적인 풍습 중 하나로 자리 잡리잡고 있다.
[일상문화 속 교회 이야기] 치즈
오랜 세월 수도원이 지켜온 음식
“당신께서 저를 우유처럼 부으시어 치즈처럼 굳히지 않으셨습니까?”(욥기 10,10)
때론 부드럽게, 때론 쌉싸름한 맛으로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는 치즈는 구약성경에도 그 기록이 나와 있을 만큼 인류와 오랜 세월 함께해 왔다. 이 맛있는 치즈의 역사에서도 교회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치즈의 역사는 기원전 60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치즈 제조 기술을 지키고 발전시킨 곳은 바로 중세의 수도원이다. 치즈는 철저하게 금육을 지키던 수사들을 위한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일상 모든 일을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여기던 수사들은 치즈를 만드는 것에도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생산된 치즈는 수도원 밖에서도 최고의 치즈로 인정 받아왔다. 주변민족 침입과 전염병으로 유럽 인구 1/3가량 죽어가 치즈기술이 사라져가던 시기에 수도원들은 치즈기술을 농민들에게 전수해 치즈의 맥을 잇게 해줬다.
현대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치즈는 공장에서 대규모 생산되는 것이지만, 중세 수사들의 치즈를 향한 노력 흔적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에는 생아루그, 생알브레, 생마르슬랭 등 많은 종류의 치즈에 생(Saint), 즉 성인(聖人)의 이름이 붙어있다. 고품질 유제품으로 유명한 베네딕도회는 1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명성을 지닌 마르왈 치즈를 만들었다. 또 트라피스트회가 만든 치즈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 치즈 보급도 한 사제의 헌신으로 시작됐다. 벨기에인 지정환 신부는 6·25 전쟁 후 폐허와 다름없던 가난한 한국을 찾아 농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1964년 전북 임실본당 주임을 맡은 지 신부는 유럽에서 배워온 치즈기술로 임실 농민들과 함께 치즈공장을 설립했고, 이를 계기로 국내에 치즈가 보급됐다. 지 신부의 마음이 담긴 임실치즈는 이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치즈 브랜드가 됐다.
중세 수도원이, 그리고 지정환 신부가 그랬듯이 오늘날 우리가 먹는 치즈에는 사람들을 향한 교회의 사랑이 묻어있다.
[일상문화 속 교회 이야기] 맥주
사순시기 엄격한 금식 · 절제, 수도자들 맥주로 영양 보충
‘파울라너’, ‘호가든’, ‘레페’.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 수입 맥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수도원에서 유래된 맥주라는 점이다.
맥주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이어오지만, 오늘날 우리가 다양하고 맛좋은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은 중세 수도원의 공이 크다.
맥주는 중세 수도자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고마운 음료였다. 중세의 수사들은 사순시기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평소보다도 엄격하게 금식을 지켰다. 당시 수도 규정에는 하루 한 끼의 식사만을 하도록 기록돼 있을 정도다. 기도생활과 더불어 육체노동도 함께해야 했던 수도자들이 체력을 지켜내기 힘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수도자들에게 영양을 공급해준 것이 맥주다. 보리를 원료로 빵과 같이 효모를 사용해 만드는 맥주는 열량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타민, 미네랄이 비교적 풍부하게 들어있어 ‘액체 빵’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수도자들이 영양보충을 위해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농도가 강하고 쓴 맥주를 생산하기도 했는데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내려오고 있다.
수도원들은 맥주의 양조기술을 보존하고 개발했다. 15세기 베네딕도수도회에서는 우리나라 맥주의 주를 이루는 ‘라거’ 즉 하면발효 맥주가 개발되기도 했다.
특히 트라피스트수도회의 맥주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봉쇄 수도회인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10곳 수도원에서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생산하는 트라피스트 맥주는 맥주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특별한 맥주다.
수도회는 수도원을 운영하기 위한 최소한의 맥주만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대형 맥주회사들이 수도원 맥주 양조자격을 얻어 생산하는 것이 우리가 시중에서 만나는 ‘수도원 맥주’(Abbey Beer)다.
맥주는 수도자들에게 사순시기 절제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일상문화 속 교회 이야기] 포도주
성혈로 변화되는 소중한 술, 윤유일 빚은 포도주로 미사도
향긋한 포도의 향을 머금은 포도주는 맛도 일품이지만, 건강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널리 사랑받는 술이다. 미사성제에서 성혈로 변화되는 포도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에게 가장 소중한 술이기도 하다. 포도주는 가장 오랜 과실주로 여겨진다. 성경은 “노아는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됐다고 하고 노아가 포도주에 취한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방주가 내려앉았다는 아라랏 산은 터키, 즉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데 이 지역은 포도의 원산지기도 하다.
포도주 생산 기술을 주도한 것은 수도원이었다. 그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베네딕도회와 시토회는 지금도 유럽을 비롯한 미국, 칠레 등에서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다.
수도생활의 규율이 담긴 「성 베네딕도 규칙서」에도 하루에 마실 포도주의 양을 제시할 정도로 중세 수도원의 포도주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프랑스 생피에르수도원 포도주담당이었던 페리뇽 수사(1638~1715)는 포도주 병마개로 코르크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코르크 마개 사용은 포도주의 숙성을 한층 도왔고, 탄산가스가 담긴 포도주, 샴페인 주조를 가능하게 했다.
기도와 육체노동으로 봉헌의 삶을 살던 시토수도회 수사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포도 재배와 포도주 생산이었다. 수사들은 토양과 기후에 맞는 포도 품종을 개량했고, 지금과 같은 모습의 포도 재배와 포도주 양조 기술을 만들어 냈다.
우리나라의 포도주도 교회와 연이 깊다. 오는 8월 시복되는 하느님의 종 윤유일 바오로는 최초의 한국산 포도주를 빚었다. 1790년 윤유일은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서 사제가 조선에 올 날을 준비하며 미사도구, 포도나무 묘목과 함께 재배법, 포도주 제조법을 배워왔다. 후에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가 들어온 후 1795년 조선 땅에서 첫 미사가 봉헌됐는데 이때 윤유일이 재배해 담근 포도주가 성혈로 축성됐다.
그리스도인에게 포도주는 단순히 술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이라며 우리에게 잔을 건넨다. 포도주 잔을 들 때마다 우리는 그 응답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일상문화 속 교회 이야기] 시계
시간 맞춰 기도하기 위해서… 교회, 시계 발명 결정적 역할
현대인의 일상에 시계는 빠질 수 없는 휴대품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일들이 정해진 시간에 따라 이뤄지고 있고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이 시계의 발명에 교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래시계는 8세기 프랑스의 라우트프랑 신부가 고안했다. 구약성경에도 해시계를 사용한 기록(2열왕 20,9-11)이 등장하듯 시계는 기원전부터 존재해왔다. 이후로도 물의 흐름이나 초가 녹는 것으로 시간을 재는 시계가 등장했지만,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모래시계는 태양 없이도 비교적 일정한 시간을 잴 수 있게 해줬다.
기계장치로 작동하는 시계의 발전에는 수도회의 역할이 컸다. 해나 물, 모래를 이용한 시계와 달리 동력원이 있는 기계식 시계는 오늘날처럼 하루를 일정한 간격으로 나눠 시각을 알 수 있게 해줬다.
추를 동력으로 하던 초기의 기계식 시계는 탑 형태로 건설됐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 형태의 첫 번째 시계를 훗날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된 오리야크의 제르베르가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14세기 세인트올번스 수도원장 리처드는 최초로 태엽장치 시계를 설계해 수도원에 설치했다. 이 시계는 시간만이 아니라 월식도 정확하게 잴 수 있었다. 리처드의 시계는 소실됐지만 리처드의 기록으로 복원됐다. 영국 글래스터베리의 수사 피터라이트풋이 14세기 만든 시계는 아직도 보존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계 중 하나다.
교회가 시계 발명에 열의를 보인 이유는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교회는 사도공동체 시대부터 시간을 정해 기도해왔다. 성무일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은 종을 울려 기도시간을 알렸고, 이 종소리에 마을주민도 시간을 알았으며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시계를 의미하는 클락(Clock)이 종이란 뜻의 라틴어 클로카(Clocca)에서 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시계에는 일상의 모든 시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려 노력했던 신자들의 노력이 담겨있다. 시계를 볼 때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기도한다면 그 시계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시계일 것이다.
[일상문화 속 교회 이야기] 계이름
성무일도 찬미가 첫 음절, ‘도’는 도미누스에서 따와
“도, 레, 미, 파, 솔, 라”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어린아이라도 계이름은 쉽게 욀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음에 이름을 달아 누구라도 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계이름은 성무일도의 찬미가에서 유래한다.
계이름을 처음으로 만든 이는 이탈리아 아레초 출신 구이도(990~1050) 수사다. 베네딕토회 수사인 구이도는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에 바치는 성무일도의 저녁기도 찬미가의 각 구절의 첫 음절에서 계이름을 붙였다.
라틴어로 ‘Ut Queant laxis / Resonare fibris / Mira gestorum / Famuli tuorum / Solve polluti / Labii reatum / Sancte Iohannes’라 부르는 이 찬미가는 각 첫머리가 다장조의 헥사코드(6음 음계)와 일치했다. 우리말 성무일도에서는 ‘세례자 요한이여 들어주소서 / 위대한 당신업적 기묘하오니 / 목소리 가다듬어 찬양하도록 / 때묻은 우리입술 씻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부분이다. 구이도는 6개의 음을 음이 일치하는 첫 구절인 ‘우트, 레, 미 파, 솔, 라’라고 불렀다. 후에 ‘우트’는 주님을 뜻하는 도미누스(Dominus)에서 따 ‘도’로 바뀌었고, 17세기경에 제7음 시(Si)가 더해져 지금의 계이름이 완성됐다.
구이도가 이 계이름을 만든 것은 누구나 쉽게 성가를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계이름이 없던 당시에는 노래를 듣고 외우는 방식으로 성가를 불러왔다. 아레초의 주교좌대성당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구이도는 계이름을 만들고 오늘날 5선 악보와 원리가 흡사한 4선 악보를 고안해 성가의 음을 기록할 수 있게 했다. 악보에 정확한 음 높이를 기록할 체계를 만든 것이다. 그는 이전에는 성가 가수가 되려면 10년은 걸렸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1년이면 된다고 자신했다. 과연 오늘날에는 악보만 읽을 줄 알면 누구나 성가를 부를 수 있게 됐다.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이름은 그 자체에 기도가 담겨있다. 미사에 악보를 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가를 부른다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듯 성가는 참으로 ‘두 배의 기도’가 될 것이다.
[일상문화 속 교회 이야기] 수화
청각장애인 첫 체계적 언어, 프랑스 신부 노력으로 탄생
프랑스 에페 신부는 청각장애인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찬양하길 바라며 수화를 개발했다.
소리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청각장애인들은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이사 12, 6)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말할 수도, 노래할 수도 없다. 들리지 않는 말, 수화(手話)는 바로 청각장애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탄생했다.
사실 ‘손짓’이 의사소통의 수단이 됐던 것은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 손짓이 음성언어처럼 구체적인 의사전달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8세기 프랑스의 샤를 미셸 드 에페(1712~1789) 신부가 손짓을 정형화된 언어, 수화로 만들면서다.
세상에 첫 선을 보인 수화는 청각장애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개발됐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파리의 빈민가에서 활동하던 그는 우연히 자신들만의 손짓으로 소통하고 있는 두 수녀를 만났다. 두 수녀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에페 신부는 수화를 개발하고자 마음먹었다. 청각장애인들과 대화할 수 있다면 그들도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고, 하느님 나라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당시에도 청각장애인들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자연적 수화’(gesture sign)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어휘나 표현이 제한적이었고 산발적으로 개개인이 사용하고 있어 ‘언어’로서 역할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에페 신부는 이 자연적 수화를 바탕으로 기호로 여러 개념을 나타내는 방법을 고안하고, 프랑스 문법에 맞는 표현과 문자표현법 등을 더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언어로 만들었다. 그는 1760년 최초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무료 학교를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말과 신앙을 가르치며 ‘청각장애인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됐다.
청각장애인들의 신앙을 향한 에페 신부의 마음에서 출발한 수화는 오늘날 수많은 청각장애인들이 소리 없이도 들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청각장애인들의 신앙생활에는 많은 불편과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의 작은 관심과 노력이 더해진다면 청각장애인들도 더 기쁘게 하느님을 ‘소리 높여 환호’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