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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다리는 모세
24: 12-18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13. 모세가 그 종자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찌니라 하고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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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여호수아만 산정으로 올라감
지난주에 배운 24장의 앞부분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법도와 율례를 백성들에게 낭독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그 명령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함으로서 언약의 체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이 1:1의 관계로 맺는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언약이며, 당신이 보내주실 구주의 공로와 피의 대가로서 은혜를 주시겠다는 일방적 언약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산으로 부르시는 내용인데, 25장에서 31장까지 기록될 성막과, 거기서 드릴 제사제도에 대한 상세한 규정들을 주시고, 십계명을 새긴 돌 판을 주시기 위해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을 밤낮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율례와 법도를 받습니다. 모세를 부르신 목적은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네게 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언제나 마음 한 가운데 간직할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내가 네게 율법과 계명을 주리라는 말씀입니다.
신28에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과 계명은 사람에게는 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고,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요즘은 설교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도 청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 초점이 맞추기도 하고, 설교를 듣는 사람도 귀를 즐겁게 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설교는 살고 죽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요, 생명을 걸고 받고 행하여야 하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 가볍게 듣고 즐기는 코미디가 아닙니다.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네게 주리라.”고 하시어, 모세가 받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써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 등에서는 흙을 뭉쳐서 아직 굳기 전에 쐐기문자로 새긴 다음에 그것을 구워서 책처럼 사용하였습니다. 애굽에서는 파피루스라는 갈대를 짓이겨 만든 거친 종이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돌 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에서 쓰지 않던 독특한 기록 매체였습니다. 돌에다 새긴 말씀은 흙이나 갈대 종이에 기록한 말씀보다 오래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어떤 누구의 말보다 가장 오래토록 기억해야 하고 새겨 놓아야 합니다.
신 6:8-9에 “너는 또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잠 3:3에는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고 하셨습니다.
고후 3:3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깊이 새기고 영원히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내용은 두 가지인데 “율법과 계명” 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말씀은 법칙과 교훈이라고 번역을 해도 되는 말입니다.
출20장 1절에서 17절까지는 십계명, 즉 계명을 주셨고, 20장 18절에서 23장까지 에서는 그것에 근거한 세칙 즉 율법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절대적인 원칙이기 때문에 그것은 법칙이라 하고, 그것의 해석인 율법은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과 일과 죽음에 관한 절대적인 법칙이거나 그것을 풀어 설명하고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인 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이 칠십년을 살아도 항상 불안하고 불행하며 희망 없이 살다가 죽음 앞에서 절망하게 되는 이유는 사람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 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 인생의 법칙과 삶의 교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 어디서 왔음을 알고, 받은 생명과 기회를 먹고 마시는데 소비하지 않고 주님의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위해서 바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천국의 새 몸을 기대하면서 찬송 부르며 주님께로 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법칙과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이 당시의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모세의 율법이 함무라비법전을 베낀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1901년 프랑스 학술조사대에 의해 이란의 고도 스사에서 발견 되었는데, 이것은 높이 2.25미터, 둘레가 약 1.9미터 크기의 흑색 돌기둥에 새겨진, 기다란 서문과 282조의 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법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민법에 관한 부분이며, 특히 가족 관계의 법률이 전체 282조 중 68조로, 약 4분의 1이나 됩니다.
그중에는 모세의 율법과 비슷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함무라비의 법은, 출애굽기 21장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는 내용과 같고, 도둑질, 살인, 간음, 헛된 명세, 거짓 증거 등을 하지 말라는 내용 등도 구약 율법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법은 절대법과 상대법이 있다는 점에서 당시 세상의 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요즘은 하나의 법을 제정하게 되면, 그 법을 어떻게 지키라는 시행령이 따라옵니다. 십계명은 절대법이요, 율법은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를 규정한 시행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함무라비 법전 등 이방인의 법에는 단지 시행령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과 함무라비 법전은 너무나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인간의 삶의 원칙을 사람과의 관계에 두지 않고 그들을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그래서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핵심계명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 하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여섯 가지 인간에 대한 계명들도 앞에서 명령한 신에 대한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 등 당시 이방세계의 법전에는 이런 절대 원칙이 없고, 가족을 어떻게 대하며, 이웃관계의 분쟁은 어떻게 해결하라는 등의 시행령격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서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주신 특별한 것이고, 이것은 온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절대적인 말씀입니다. 그래서 21세기에 사는 우리도 이 말씀을 새겨두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는 모세
명하신대로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장로들을 산 중턱에 머물러두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데, 여호수아만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장로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었지만, 모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종자였습니다. 종자란 히브리말로 더불어 섬긴다. 시중든다는 뜻이고 분신이었습니다.
출17 장에서 이미 보았듯이 모세가 산위에 올라가 기도할 때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론과 훌 보다도 훨씬 더 모세에게 가까운 분신이었습니다. 출33:11에 보면 모세는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봉사하고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곤 했으나, 여호수아는 언제나 회막 문에서 떠나지 않고 거기를 지켰습니다. 여호수아는 언제 어디서나 모세를 따라다니고, 모세의 심부름을 하고, 모세를 대신하는 분신이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도 모세와 함께 산 정상까지 동행한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종업원이냐 사장이냐를 보고 차별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를 보십니다. 사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나라와 관계없는 사람이고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사장이라면 멸망할 물건에 불과하지만, 세상에서는 종살이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종이 되어 산다면 하나님은 그를 영광스럽게 여기고 귀히 쓰십니다. 주의 종과 뜻과 삶을 같이하는 동반자가 되어, 하나님 앞까지 동행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 34장에 보면, 모세는 느보산에서 죽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그때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모세의 후계자로 지명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당시에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도 있었고, 존경받는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다 제쳐두고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통치자 자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친히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니까 두려워말라.”고 용기를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주 훌륭히 통치자 직무를 감당하여 가나안땅을 정복하게 하고 그 땅을 분배하여 주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앞에서는 출신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평생을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스스로 종자가 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여호수아는 본래 이름이 호세아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름을 여호수아로 고쳐 주었습니다(민13:8,16). 호세아는 ‘돕는다.’ 라는 뜻에 불과하지만,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이후의 일을 충성된 여호수아에게 맡기려고 작정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의 자리에 까지 동참시켜서 훈련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종처럼 되어 섬기고 협력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그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아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자리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6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는 구름가운데서 하나님만나기를 기다리며 6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이 시대 성도들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를 만나러 올라와서 기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백성들에게 가르칠 율법과 계명을 주리라는 약속만 있었습니다. 그럴 때,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고,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보이는 것이 없으니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나 기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믿고 나타나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믿음이 있습니까? 주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믿음의 사람입니다.
계22:12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고 하셨고, 계22:20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시면서,
암4:12에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예비하고 있습니까?
재림하시는 주님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서 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날의 만남이 두려움과 절망이 되지 않으려면 재림을 믿고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만나기 원하십니까?
지도자 없는 민중의 모습
14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불려 산 위로 올라가면서 장로들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습니다.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 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라고 백성들에게 주의 주고, 통치를 아론과 훌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론과 훌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산위에서 기도할 때에 우편과 좌편에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려 그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도왔던 분들로서, 모세의 오른팔과 외팔과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백성들의 문제를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없는 동안 아론과 훌은 그 일을 과연 잘 했을까요? 어떻게 해야 그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일까요? 모세가 산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받는 기간 동안, 그들은 이미 받은 말씀을 되새기게 하여야 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올 모세를 기다리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32장에 보면, 반역하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이 떼를 지어 아론에게 와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
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영도자 모세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하니, 이제 우리를 인도할 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신을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이때 아론은 그들에게 변변한 책망한번 하지 못하고 그들의 세력에 눌려서 이것이 너희를 인도할 신이라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실망스러운 모습입니까?
모세가 산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만나는 기간은 단 40일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내려왔을 때, 이미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음란한 짓들을 하면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으니, 40일도 못 견디고 우상숭배의 수장이 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공부했거니와, 모세가 율법을 낭독하였을 때 백성들이 뭐라고 대답했었나요?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30일도 못 참고 벌써 하나님을 배신하고 모세를 배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면서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정말 그럴까요?
만약, 한 달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면, 한 달만 설교를 듣지 않고 혼자 생활한다면 여러분의 믿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잊어버리고 내가 주님 앞에 했던 고백도, 약속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길로 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단 두 주일만 결석해도 교회와의 거리,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론은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하라고 위임을 받았음에도 백성들의 악하고 배신적인 요청에 책망한번 하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우상을 만들어 주고 말았고, 모세가 와서 책망하자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32:24)
출4:에 의하면 아론은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와 싸울 때 모세의 대언자 노릇은 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지도자로서는 영 아니었습니다. 말을 잘 한다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믿음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견고한 비전이 있어야지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종자 여호수아는 지도자 감이었지만, 출신이 좋은 아론은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40일 이라는 기간의 의미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을 덮었습니다. 그 산위의 영광이 산 아래 백성들이 보기에는 맹렬한 불꽃같이 보였고, 구름이 6일 동안 산을 가렸습니다. 산 아래 백성들은 매우 두려워했고, 모세가 어찌 되었는가에 대하여 매우 궁금해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산에 올라갈 때 식량을 챙겨가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구나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것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몹시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7일째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고, 거기서 모세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하나님과 40일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 40일 40야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모세를 산위에 40일 동안이나 머물게 하셨을까요? 다 해봐야 몇 백자에 불과한 십계명을 적어 주시고, 성막을 짓는 모양과 자재와 규모를 설명해 주시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이 40일은 성경에서 항상 의미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시는 기간입니다. 노아 시대에는 심판의 홍수를 40일40야 퍼부어서 패괴한 세상을 정리하셨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땅을 탐지한 날도 40일간 이었고, 왕상19:에 보면 아합에게 쫓겨서 로뎀나무 아래 숨어서 절망하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나 음식을 먹이고, 호렙산으로 가라 하셔서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걸어간 기간도 40주40야였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신 날 수도 40일이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드러내 보이시며 땅 위에 머무르시던 기간도 40일이었습니다.
이 40일간은, 인간의 육체로 말하면 한계점에 도달하는 기간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40일을 굶으면 대부분 죽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으면 살아남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기간이 되고, 하나님께서 새 일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믿음 깊은 분들이 가끔 40일 금식기도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은 아주 죽어지를 바라는 것이고, 대신 하나님이 일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죽음의 한계를 넘었고, 앞으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는 기간이 바로 40일이고, 누구라도 이 두 가지만 경험한다면 크게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힘은 하나님과의 충분한 교제를 통해서만 공급됩니다. 일주일에 주일날 대예배 딱 한번만 참석해서 말씀 듣고서 어떻게 신앙인답게 사는 힘을 공급 받을 수 있을까요? 만약 한 달에 몇 번씩 결석한다면 기본신앙이나 유지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성도에게 필요한 영적인 능력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깊이와 길이에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생명 걸고, 사업 걸고 주님과의 교제를 힘씁시다. 사업에 손해가 온다하여도 주일 성수를 해야 하고, 환자의 경우는 병이 악화된다 할지라도 주일날은 내 하나님을 찾아뵈어야 한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뵙고 말씀을 듣는 것이 힘이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할 때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삶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이는 일을 무엇보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히10:24,25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는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노력하며, 주신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받은 말씀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