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의 이중성
(로마서 9:32~33)
이제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 특별히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한번 스캔들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려 합니다. 어떤 나라는 비교적 스캔들이 적고 조용한 국가가 있고 어떤 나라는 스캔들이 많고 떠들썩한 국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참 말 많은 스캔들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입니다.
작년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가운데 고유정 사건이 있습니다. 전 남편을 살해하고 토막내어 시신을 훼손하여 유기한 것도 모자라 현 남편의 아들마저 살해한 사건입니다. 또한 현재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공황과 공포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계적인 스캔들인 것입니다.
스캔들(scandle)의 사전적 의미는 ‘추문, 불명예, 창피, 부정 사건’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에 이 스캔들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스캔들의 정확한 명사는 ‘스캔달론’이며 동사는 ‘스캔달리젠’입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 어원은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장애물은 쉽게 피할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장애물이 아니라 거의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을 뜻합니다.
스캔들의 헬라적 어원은 ‘다리를 절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리를 저는 것은 불편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스캔들은 불편한 것입니다.
프로이드 학파는 이 스캔들을 반복의 강박이라고 해석합니다. 또한 스캔들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스캔들은 어떠한 공동체라도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스캔들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스캔들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스캔들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18:8~9“너희의 손이 너희를 스캔들에 몰아넣거든 손을 자르고, 너희 눈이 너희를 스캔들에 몰아넣거든 너희 눈을 빼버리라”
그래서 오늘은 이 스캔들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캔들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스캔들의 이중성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둘째, 스캔들의 해석의 이중성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셋째, 스캔들을 제거하는 스캔들로 전개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스캔들의 이중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캔들은 부정적인 스캔들이 있고, 창조적인 스캔들이 있습니다. 부정적 스캔들은 갈등 유발적이고, 관계 파괴적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스캔들이 일어나면 국가, 공동체,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반면에 스캔들도 창조적인 스캔들이 있습니다. 이런 스캔들은 갈등에서 화평으로, 심판에서 용서와 사랑의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부정적 스캔들의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바로 로마서 14장 13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여기서 ‘거칠 것’은 스캔들을 의미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정적 스캔들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반면에 창조적 스캔들에 대한 성경 구절은 로마서 9장 33절입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거치는 반석’은 스캔들의 ‘바위’를 의미합니다. 그 스캔들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스캔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 스캔들은 창조적이며 좋은 스캔들이라 그것을 믿으면 우리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스캔들이 터지면 잘 안 믿으려고 합니다. 이 스캔들은 믿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스캔들은 반드시 믿어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이 십자가 스캔들을 다니엘서의 예언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해줌으로써 메시아 출현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꿈에 큰 신상을 보았는데 그 신상은 머리는 금, 가슴은 은, 배는 동, 다리는 철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돌이 나타나 그 큰 신상을 부숴버립니다. 그 신상을 구성한 금, 은, 동, 철은 지난날의 강대국들, 예를 들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를 지칭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딪히는 큰 돌이 나타나 그들을 부숴뜨리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부딪히는 돌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스캔들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스캔들 자체도 이렇게 이중적이지만 스캔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이중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캔들 자체를 부정적으로 늘 해석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캔들을 늘 자기에게 교훈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례로 고유정 사건을 보면서 어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가정의 소중함, 그리고 사람이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성경에서도 이렇게 교훈적으로 해석하는 신앙 영웅들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 시므이가 압살롬을 피해 피난 가는 다윗을 향해 조롱과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아비새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다윗에게 말합니다. 이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하16장 10절 “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이 말씀을 보면 다윗 왕이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의 조롱과 저주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치욕적이고 모욕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신앙적으로 잘 해석한 것입니다.
또한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칠 때 바다 한가운데서 큰 태풍을 만나 희생제물로 뽑혀 바다에 던져진 사건 역시 스캔들을 신앙적으로 잘 해석한 예입니다. 요나서 2장 3절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는 바다에 광풍이 일어난 것이 자신이 하나님게 불순종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스캔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그 스캔들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스캔들을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석을 잘 해야 됩니다. 이제 사순절의 시작이 도래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그 해석에 따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아니면 멸망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스캔들을 제거하는 스캔들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쁜 스캔들을 제거하는 좋은 스캔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스캔들을 막아주는 좋은 스캔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처럼 큰 부정적인 스캔들과 고유정 사건같이 부정적 사건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만 보면 사회가 참 어둡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 이랜드 그룹이 마스크를 나누어 주라고 10억 원을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다른 모든 기업들도 연쇄적으로 많은 돈을 기부했고 연예인들은 물론 많은 교회도 기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대구로 달려가 치료와 방역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보면 마음이 훈훈해지고 사회가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어두움을 완전히 물리친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여태까지 부정적인 스캔들만 일으켰다면 이제부터는 좀 창조적인 스캔들을 만드십시오. 갈등을 화해로, 미움을 사랑으로, 분열을 하나 됨으로 하는 그런 스캔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늘 창조적인 스캔들을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여 영접하고 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교정시키기 위하여 조그마한 사건 하나를 일으키십니다. 바로 나귀 새끼를 타고 뒤뚱뒤뚱거리며 입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왕되심을 겸손하게 섬기러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닌 간소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과 스캔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십니까? 또한 앞으로 여러분은 어떤 사건과 스캔들을 만들어 나가시겠습니까? 아무쪼록 여러분의 삶을 구원으로 이끄는 창조적 스캔들을 많이 만들어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