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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역신문사 인터넷판 칼럼코너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한 번 들어보세요.
『일본의 오사카 고등법원의 형사부 총괄 판사였던 오카모도 겐은 36년 동안이나 재직했던 판사직에서 최근 퇴임했습니다. 큰 사건들을 맡아 처리해 오던 유명한 판사였던 그가 정년퇴임까지 5년이 더 남았는데도 일을 그만두자 사람들은 변호사개업을 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엉뚱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바로 집 근처에 있는 요리학원이었습니다. 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음식점을 내겠다는 각오로 60살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을 나갔습니다. 그는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과 함께 칼 쓰는 법과 양념을 만드는 법, 야채를 써는 방법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년 만에 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내더니 자신이 일하던 법원 앞에 두 평 남짓한 간이음식점을 내었습니다. 유명한 판사였던 그를 알아보는 손님들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판사직을 그만 두고 음식점을 낸 것을 궁금해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재판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언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는 그 일을 36년이나 해 왔던 것이죠. 재판관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식당 주방장이 되더라도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남에게 죄를 정하고 벌을 주는 일이 싫어서 남은 여생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척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작은 음식점 이름은 ‘친구’입니다. 그 이름 속에는 그의 음식점을 찾는 사람들 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그의 오랜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친구를 많이 두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허물없는 친구, 셋을 두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어떤 인터넷 글 게시판에 성공한 인생에 대한 기준을 이렇게 적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10대 - 돈 많은 아버지를 뒀으면 성공한 인생 / 20대 - 명문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면 성공한 인생 / 30대 - 연봉 많은 대기업 회사원이면 성공한 인생 / 40대 - 술자리에서 2차를 쏠 수 있으면 성공한 인생 / 50대 - 공부를 잘하는 자녀가 있으면 성공한 인생 / 60대 - 아직도 직장에서 돈을 벌면 성공한 인생 / 70대 - 병 없이 몸 만 건강하면 성공한 인생 / 80대 - 아직도 본처가 밥을 차려주면 성공한 인생 / 90대 - 전화가 걸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성공한 인생 / 100세 - 자고 나서 아침에 눈을 뜨면 성공한 인생』
일본에서 유명한 판사로서 아직도 여전히 일한 힘과 여력이 있는데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위해 조기퇴직하고 사람들과 편한 관계속에 살아가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기고 혹은 각 연령대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르다고 말하는 인터넷 글을 올리는 사람... 두 사람의 각자의 입장에 있어 성공의 기준이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말 인생 성공에 대해 각자의 생각이 너무나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다양한 입장속에서 우리는 신앙인이기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역에서 성공한 인생인지 성공하지 않은 인생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내 입장에서, 사회적인 입장에서 성공을 했다 성공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했는 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보실 성공한 인생에 대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여다보며 인생이 하나님의 성공가운데 멋진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공한 사람 첫째는, 이슬같고 단비같은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미가 5장 7절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여기서 “야곱의 남은 자”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위해 특별히 남기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메시야의 기르시는 목장에서 살며 그 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야곱의 남은 자들’이 ‘많은 백성 가운데 있다’는 말은 어느 지역에 모여서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이방민족들에게 끌려가서 그 곳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있고 혈통으로는 이방인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 택한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기르시는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야곱의 남은 자’의 특징은 이슬과 단비같은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슬”과 “단비”로 비유되는 이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슬과 단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슬”과 “단비”와 같은 하나님의 택함은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을 기대하거나 세상의 어떤 권력을 의지하거나 어떤 요행함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야곱이 남은 자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온건 겸허했고 특별히 청백리로 유명했던 반석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조선시대 종으로 태어나면 대대손손 자녀들은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이 반석평은 머리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주인마님의 아들이 공부하는 방 문지방에서 엿들은 것을 낮에는 종노릇하며 일하고 밤에는 엿들은 것을 익혀서 글을 깨치고 책의 내용을 다 기억하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줬습니다.
비록 종이지만 정말 남다른 능력을 발견한 주인 이 참판은 아무 조건 없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지인중 아들이 없고 재산도 없어 양반지위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어느 양반집에 수양아들로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종이라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과거를 응시할 수 있게 되었고 과거급제하고 조정에 들어가 지금의 법무부장관격인 형조판서까지 출세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가마를 타고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과거 자신의 주인이었던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이 거지 몰골을 하고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만를 세워 이오성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이오성에게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 낮에 한양성 큰 길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 앞에게 넙죽 절을 하고 존대말을 쓰며 상전대하듯 하니 사람들이 깜짝놀랐습니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의 옛 신분이 드러나게 된다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명성과 온갖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에 대한 은혜를 잊으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오로지 은혜를 갚아야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에 그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알게 된 신하들은 지위를 유지시키는 상소를 올리고 임금은 반석평의 지위를 유지시켜줌과 함께 옛 주인집 아들 이오성에게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한 여성이 무거운 주택 융자금을 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실직하여 더 이상 융자를 갚을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몇 달 후, 수개월 분의 납입금이 밀리게 되지만 그 빚을 갚을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빚은 늘어만 가고, 상황이 호전될 가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여성은 빚에 짓눌리고 있었는데 어느 한 친구가 그 여성의 빚을 갚아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 친구는 연체금을 다 갚고, 그 여성의 융자금을 다 갚을 때까지 매달 자기 계좌에서 납입금이 자동적으로 빠져나가도록 조처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일까요? 얼마나 감사할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고 있는 빚을 그때 그때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진실로 주목할 만한 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체금만 지불할 것을 제안하여, 우리가 지불할 금액을 제날짜에 맞추어 낼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진 빚 전체를 다 갚아 주시겠다고 제안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빚을 모두 갚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놀라운 주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짊어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단비, 우리에게 필요한 이슬을 누리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가 성공했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가 성공하는 것도 맞을 수 있지만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치이고 우리의 힘이 부족함을 느낄 때 좌절과 우울함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인간의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성공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슬과 단비같은 인생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어떤 세상의 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성공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공한 사람 둘째는, 용맹한 사자같은 대담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미가 5장 8절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세상가운데 무능한 존재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닌 사자같은 무서운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세상에 주눅들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가운데 대담하게 살아가며 강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도 적용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겠지만 영적인 의미로 말세의 상황속에서 불신앙적인 세상의 타락한 상황들, 영적인 죄악들에 대해 우리가 싸워 이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가운데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기에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8~40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007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하러 갔던 샘물교회 선교팀이 탈레반에 억류됐는데, 그중 4명이 억류된 한 팀에서 심성민씨가 피살되고 나머지 3명중 2명이 석방될 때 이지영씨가 한 명이 피살된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나는 괜찮아요. 더 아픈 동료를 석방해주세요.” 이런 말로 석방의 기회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했습니다. 이게 언론에 알려지면서 큰 감동을 주었는데, 이지영씨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이성과 상식과 경험으로 행동하는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아닐까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당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는데,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임이 맞습니다. 이성과 상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해가 되지 않겠죠. 죽음을 각오하고 아프칸에 가서 의료봉사 교육봉사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고, 모처럼 쉬는 휴일에 하루 종일 교회 가서 시간을 뺏기며 예배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한 달 동안 그렇게 수고하여 번 돈에서 십의 일을 딱 떼어내 교회에 바치는 것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몰려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교회 나와 예배드리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심한고문을 받되 비굴하게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고,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만이 아니라 감옥에도 갇혔고, 돌로 맞고, 톱으로 켜지는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추워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꼭 이렇게 해야만 하나요? 적당히 비위맞춰주다 형편이 풀리면 그때 제대로 하면 되잖아요. 사람들에게 교회 이미지가 좋아야 전도도 할 수 있으니 숨 좀 죽이다 하면 되잖아요? 직장생활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너무 의식하지 말고 말씀대로 확신있게 생활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공한 인생은 세상과 타협해서 세상에서 권력을 얻고 세상에서 재산을 얻고 세상에서 엘리트가 되고 세상에서 출세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의 주인이 나 자신이고 인생이 이 땅에서 완성된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죽어서도 저 천국에서 눈을 뜬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삶의 평가는 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이뤄진다라고 믿는 사람은 세상의 눈치를 보며 세상에 주눅들어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담대함으로 자신감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성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공한 사람 마지막 셋째는, 형통의 역사를 경험하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미가 5장 9절입니다.
“네 손이 네 대적들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성공한 인생이 되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이 모든 원수들을 진멸하는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남은 자들의 손이 대적들을 물리치고, 모든 원수를 진멸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권세를 가진 자들이 될 것입니다.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권한과 그런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우리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면 우리는 그런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가운데 성공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원수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가 능력을 키워 막강한 자리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보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우선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들을 막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우선한다면 원수를 진멸하는 권세가 당연히 우리에게 생길 수 있음을 미가선지자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원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분쟁을 경험하고 다툼을 경험하며 전쟁에 휩쓸려 영혼을 망치고 육신이 상하도록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능력을 예수님을 통해 얻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입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리이스신화에 보면 ‘다툼’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나옵니다. 어느 날 허큐리스가 길을 걷는데 그 괴물이 덮쳐 왔습니다. 그는 몽둥이로 괴물에 맞섰지만, 이상하게도 괴물은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커지고 포악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음을 알고 허큐리스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여신은 괴물을 무시하고 그냥 혼자 날뛰도록 두면, 금새 작아져서 없어져 버린다고 일러주었습니다. 허큐리스가 그 여신의 말대로 했더니 괴물은 힘을 못 쓰고 점점 작아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조그만 일에 분노하게 되고 어떤 사소한 일을 경험하며 원수를 만들게 됩니다. 세상에서 세상을 잘 살아가려고 하다보면 우리는 원수를 만들고 경쟁상대를 만들게 됩니다. 결국은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예수님은 세상이 질시와 핍박을 하며 누명을 씌우고 죽이려고 덤벼들 때 세상의 원수들에게 패배한 것처럼 보여지며 십자가 위에서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원수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었고 세상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십자가가 세상을 이긴 것이었고 결국 이렇게 예수님의 역사를 통해 전 세계는 예수님을 따른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가운데 하나님께 우리를 맡길 때 하나님께서 원수를 물리쳐주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대로 이루어가신다는 사살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모든 결과를 믿고 맡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과정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원수가 되어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맡기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원수를 물리쳐주십니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이 되어 우리가 원수갚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원수에 대한 처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메시야가 되어주실 때 그 메시야 예수를 믿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게 될 때 우리는 인생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 성공한 인생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산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서 우리의 인생이 평안을 누리고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가 담대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없고 권력이 없고 세상적인 믿을 구석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살아가면 성공하는 승리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안에 살며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믿음이 모든 형편과 상황을 이겨내는 놀라운 능력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