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의 4개의 방
교황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 그리고 클레멘스 7세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궁 2층의 네 거실이 ‘라파엘로의 방’이라 불리는 것은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찬 방이기 때문이다. 그 네 구역은 콘스탄티누스의 방, 헬리오도루스의 방, 서명의 방과 보르고 화재의 방으로 구성되어있다.
전사(戰士) 교황으로 불렸던 율리우스 2세(1503~1513)가 보르지아 아파트라는 건물로 거처를 옮겨 2층에 증축된 4개의 방으로 자신의 거처를 정했으나, 방에는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 프란체스카 등이 그린, 그의 정적(政敵)이었던 교황 알렉산더 6세를 미화한 벽화로 가득하여, 자신의 방에 맞는 그림을 그려 줄 사람으로. 바티칸의 예술고문인 브라만테로부터 25세의 라파엘로(1483~1520)를 추천받았다.
교황은 시험적으로 라파엘로에게 자신이 서류 결재를 하는 서명의 방 천장화를 그리게 했고, 그의 천재성에 만족한 교황은 건물 전체의 장식을 맡기면서 기존의 페루지노와 시뇨렐라가 완성한 벽화들을 죄다 뜯어내라는 명령을 했다. 이를 시행한 라파엘로는 스승 페루지노가 그린 ‘보르고 화재의 방’의 천장화만 남기고 전체를 제자와 함께 다시 그리면서, 1508~1512년까지는 서명의 방을, 1512~1514년에는 엘리오도르의 방을, 1514~1517년까지는 보르고 화재의 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1517부터 콘스탄티누스의 방에 그림을 그리다가 1520년에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나머지는 제자들이 그의 스케치에 따라 1524년에 완성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
콘스탄티누스의 방에는 로마 시대에 기독교가 박해에서 벗어나 국교가 되는 사건의 순간들을 표현한 그림들로 꾸며져 있다. 방 입구 바로 오른쪽 벽에는 ‘콘스탄티누스 세례’, 맞은편에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십자가가 나타나다’, 창문 전면 벽에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주제로 그림이 있다. 천장은 1585년에 토마스 라우레티가 그린 ‘기독교 사상의 승리’라는 그림이다.
천장 가운데의 ‘기독교의 승리’라는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모셔져 있던 건물 중앙에 이교도 신상을 끌어내리고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세움으로써 로마 문명의 핵심을 기독교가 차지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는 312년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 북부 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황제 패권 다툼이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줄리노 로마노가 그린 작품이다. ‘십자가의 출현’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센티우스와의 대결에 앞서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의 형상을 보고 승리를 미리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서명의 방
라파엘로의 방이 유명한 것은 서명의 방의 벽화로, 그리스의 아테네를 배경으로 한 라파엘로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아테네 학당’ 때문이다. 아테네 학당은 아치 뒤의 벽 좌우에 학문과 예술을 주관하는 신인 아폴론과 아테나 신상을 배경으로 삼고. 정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치했다. 레오나르드 다 빈치 얼굴을 그려 넣었다는 플라톤은 왼손에는 자신의 대화편을 들고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이데아를 설파한다. 젊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을 논하면서 지상을 가리키고 있다. 라파엘은 서양 철학에서 두 개의 기조인 플라톤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붉은색 옷과 청색 옷으로 대비시켜 조형과 조화의 미를 구축했다.
우측 아래에 허리를 굽히고 칠판에 콤퍼스를 돌리고 있는 인물은 유크리트이다. 유크리트의 얼굴은 당대 최고건축가인 브라만테의 얼굴을 그렸다. 플라톤의 좌측에 서 있는 대머리 남자가 유명한 소크라테스이다. 계단에서 상체를 드러내고 햇볕을 쬐고 있는 인물은 당연히 디오게네스다.
1511년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1차 부분 공개 때, 아테네 학당을 그리고 있던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가 작업 중에 교황을 위시한 타인의 출입을 금한 ‘천지창조’를 훔쳐보고,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헤로클레이토스의 얼굴을 미켈란젤로의 얼굴로 그렸다. 이 부분은 그림이 완성되고 난 1년 쯤 뒤에 그린 것이다. 한쪽 벽 전체(높이579cm. 너비823cm)를 가득 메우고 있는 그림이라 그 크기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나 섬세한 붓 터치에서 작가의 부드러운 심성을 느낄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기법을 모방하여 그림을 그린다.’면서 라파엘로를 폄하했으나, 인간성이 좋았다는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꺼려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술적으로는 대선배인 미켈란젤로를 존경했다한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를 26세에 완성했으며, 라파엘로도 아테네 학당을 26세에 완공했으나, 조각과 건축 및 회화의 모든 영역을 달관한 미켈란젤로가 장수를 누린 반면, 37세에 요절한 화가 라파엘로의 예술의 무게추는 당연히 미켈란젤로에게 기운다.
보르고 화재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은 교황 율리우스 2세 때에 교황청 최고 성직자 접견실로 사용되다가 레오 19세 시절부터 식당으로 사용한 방으로, 라파엘로의 제자들에 의해 완성된 4점의 역사화는 ‘사를마뉴 대제의 대관식과 레오3세 결백의 증명’, ‘보르고의 화재’, ‘오스티아의 전투’와 ‘천정 프레스코’로 그 중 화재를 신앙의 힘으로 진화하던 교황 레오 4세의 일화를 보고 그렸다는 '보르고의 화재'는 라파엘로가 직접 구상하였다 한다.
교황 연대표에 나와 있는 보르고의 화재에서 이 방의 이름이 붙여졌다. 847년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근처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교황 레오 4세는 로지아에서 장엄미사를 거행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에 기적적으로 불을 진화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4방 중 유일하게 라파엘로가 모든 그림을 다 그린 방으로, 미켈란젤로의 남성적인 천장화를 훔쳐본 라파엘로가 큰 충격을 받고 이 그림의 남자들 모습을 근육질로 그렸다는데, 살펴보면 해부학에 정통했던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비해 라파엘로는 과장된 근육과 인물들의 어색한 자세가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헬리오도루스의 방
서명의 방을 완성한 라파엘로가 두 번째로 장식한 이 방은 알현실로 사용하던 방으로, ‘452년 훈족의 왕인 아틸라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범했을 때 교황 레오 1세가 만토바의 적진지로 가서 아틸라를 설득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는 이야기를 표현한 것으로 기독교의 신성이 이교도를 물리쳤다는 것을 말하는 ‘교회의 승리’라는 교황의 뜻에 따라 제작되었다. 이 방에는 ‘볼세나의 미사’, ‘감옥으로 부터 구출되는 베드로’ ‘레오와 아틸라의 만남’과 ‘헬리오도루스의 추방’이 그려져 있으나, 마지막 그림이 유명해 방 이름이 되었다.
이교도인 시리아의 총리 헬리오도루스는 왕명으로 유대의 성전 금고를 약탈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처들어 가자, 오니아스 대사제는 금고의 돈은 고아 구제용이라며 간청했으나, 헬리오도루스가 개의치 않았다. 이에 대제사장의 간절한 기도를 올리자, 하나님이 황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그림에는 기사가 모는 말이 앞발을 쳐들고 헬리오도루스를 밟으려 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타난 젊은이가 헬리오도루스를 채찍으로 때리고 있다.
라파엘로는 그림 정중앙에 기도하는 대사제를 그려 넣었고, 오른쪽 아래 모퉁이에 쓰러진 헬리오도루스를, 그의 곁에는 막 챙겼던 금화 항아리를 넣었다. 헬리오도루스의 쓰러진 몸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아담의 창조’ 중 아담을 좌우만 바꿔 놓은 자세로,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를 자신의 창작을 훔쳐가는 자로 보았다한다.
그림 왼쪽의 가마에는 교황 율리오 2세가 앉아 있다.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되며 교회의 물건도 함부로 넘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그림은 당시 교황령을 침범한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에 대한 율리오 2세의 분노를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라파엘로는 오니아스 대사제의 모습과 교황 율리오 2세를 하얀 수염을 펄펄 날리는 닮은꼴로 그려 교회를 수호하는 교황의 위엄을 선전했다. 특히 오니아스 대사제는 로베레 가문 출신의 교황들이 즐기던 황금색과 파란색의 옷차림에 교황에게만 허용된 모자를 쓰고 있다.
라파엘로의 방은 대형 그림 때문에 더 협소해 보이며 대작을 보는 데 갑갑함을 느끼나 천장은 높은 편이고 앉아있을 수 있는 의자들이 비치되어 있다. 10대에는 피에트로 페루지노, 20대에는 다빈치, 30대에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는 라파엘로가 10대, 20대, 30대에 그린 대표작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 주위의 넓은 공간에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들이 감싸듯 전시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