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 십자가에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말씀/ 마가복음 15:1-47 요절/ 마가복음 15:39 | 2024. 9. 22 | |
마가복음 제 24 강 |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가복음은 핍박과 시련과 실패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를 범한 중죄인으로 판결하고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사형집행권은 로마 정부에 있었기에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것입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신21:23).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로마 정부에 반역했다는 정치적인 죄를 씌워 빌라도에게 끌고 갔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인하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아셨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의 별칭이요 영적인 왕,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모든 나라들과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왕, 만왕의 왕이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고소했습니다. 그 고소 내용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세금을 내지 못하게 했다, 전 지역에 걸쳐서 폭동을 사주했다 등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또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빌라도는 그 고소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변호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사야 53장 7절에 예언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고자 이미 결심하셨기에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과 평안은 어떤 범죄자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신 것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빌라도는 심문을 통해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유월절 기간에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특사제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기에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 달라고 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고 살인죄로 체포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당황하여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그러자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종교지도자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했고 군중들은 힘이 있어 보이는 그들에게 완전히 조종당했습니다. 십자가형은 반역자들에게 내려졌던 로마 정부의 형벌로 로마 시민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악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어찌하든지 풀어주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총독 자리를 잃을까봐 두려웠습니다. 무리들은 폭도들로 변해갔습니다.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
빌라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무리를 만족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양심을 속이고 합리화 시켰습니다. 정의를 행하지 못하고 실리를 따랐습니다. 그의 양심은 예수님이 무죄하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만족을 주기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실리보다 정의를 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불의와 타협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자녀들을 어떤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등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실리보다는 정의를 택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이가 예수님에게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꾹 눌러 씌웠습니다. 군인들은 고통하는 예수님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갈대 막대기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침 뱉으며 꿇어 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어 경배하는 척하며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50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조롱과 모욕을 당할 때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습니다. 학교에서 폭행과 폭언이 종종 일어납니다. 갑질하는 상사로 인해 직장을 그만 두기도 합니다.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아야 할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쌍욕과 막말을 들을 때 깊은 상처가 생기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피조물 가운데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조롱과 모욕을 당할 대상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실수하고 잘못을 하더라고 욕하거나 비하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중받고 사랑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하고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상처를 나음 받은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의 상처, 영혼의 상처를 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 시절, 모든 시절의 상처를 짊어지심으로 나에게 놀라운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내 대신 조롱과 모욕을 당하심으로 나의 모든 수치와 상처를 씻어주시고 한 영혼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군인들은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십자가 형장으로 갈 때 죄수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십자가는 죄수에게 ‘너는 이미 죽었다’라고 말해 줍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채찍질처럼 죄수를 빨리 죽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 이후 계속 혹사 당하고 채찍질 당해서 기력을 다 쇠진하셨기에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군인들은 구경 나온 구레네 사람 시몬을 끌어다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가까이서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도 구원 받고 초대교회에 아름다운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해골의 곳이라는 뜻을 가진 골고다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군인들은 마취제인 몰약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님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의식과 맨 정신으로 고통을 당하고자 하셨습니다.
저자 마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아주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형의 처형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은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요 또한 당시 독자들이 십자가형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죄수들의 옷에 대한 권한은 군인들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보다 돈을 귀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들은 인간성 상실이라는 비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돈이 된다고 하면 나쁜 짓도 서슴치 않고 청부 살인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어느 때보다 고소 사건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돈이 우상이 되어 돈 때문에 부부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싸우고 원수가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돈의 우상, 탐욕의 우상, 성공의 우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 참된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실의 삶이 고달플지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남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뺏어갈 수 없는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삼시 다시 말해 오전 9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죄목이 기록된 죄패가 일종의 경고로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붙여졌습니다. 그 죄패에 씌어진 죄목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이 죄패는 당시 통용어인 아람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기에 누구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왕이요 세상 만민이 왕이십니다. 이 때 강도 둘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운데 세워짐으로 중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지나가던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였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를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예수님을 향한 이런 말들은 사탄이 심어준 말들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시험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처럼 예수님은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자기를 구원하는 데 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이 남아 있을 때까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예수님의 인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부모나 친구들로부터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용쓰지 말고 너나 구원해라. 네 앞가림이나 잘하고 네 문제나 해결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한 영혼의 구원보다 먼저 내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야 되겠다며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를 희생함으로 남을 살리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서는 녹아져야 하고, 촛불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태워져야 합니다. 한 알의 말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느냐는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한 생명을 살리고 가족들도 살리고 내 자신도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구경꾼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동안 세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때 온 세상이 캄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자연까지도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중대한 사건인지 증거하였습니다.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가장 큰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모든 자연이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제구시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의 첫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몸으로 당하는 고통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아버지 하나님과의 분리는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힘들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런 버림과 고통을 당하셔만 했습니다.
죄는 나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옵니다. 더 나아가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만듭니다.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버림과 배반의 쓰라린 경험이 있을 겁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부모로부터 버림 받을 때 그 상처와 고통과 슬픔은 오래가고 치유되기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을 때 내 인생이 다 끝장 난 것 같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 당할 때 친구가 아니라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인간관계가 원만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 나를 무시하고 비난하는 사람, 나를 피하는 사람에 대해서 미움과 분노가 쌓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버림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값을 대신 치루시고 죄용서와 자유와 평화를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이 세상 천지에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을 속죄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나 같은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어떤 몹쓸 죄를 지었을지라도, 현재 어떤 어둠과 상처가 있을지라도 개의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성소 휘장의 찢어짐은 십자가 위력을 보여줍니다. 휘장은 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죄의 장벽이 무너지고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위력은 그 현장을 지휘하고 지켜본 백부장에게 나타났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그 백부장은 수많은 죄수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죄수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온유한 모습을 보았고,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다 이루었다” 복음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자세히 관찰한 백부장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적 귀가 열리고 영적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믿고 입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에게 구원의 빛이 임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고백함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자 마가는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마가복음의 주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마가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들과 세상 만민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때 죄사함과 새생명을 받고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