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1776년 즉위 후 24년간 조선을 다스리며 강력한 정치 개혁을 추진한 왕이다. 특히 수원화성은 그의 개혁 의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업적이다. 수원화성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단 2년9개월 만에 완공된 계획도시이자 군사 요새로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이유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기 위해서다. 그는 묘를 옮겨오면서 그 주변을 발전시키기 위해 상업과 농업을 활성화해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였으며, 수도 한양의 남쪽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조는 화성건설에 조선의 첨단 과학 기술을 총동원하여 성곽, 수문, 포루, 각루 등 방어 시설을 체계적으로 배치하였고, 주변 도로와 상업지구까지 계획된 도시 구조를 갖추었다. 특히 정조는 화성주민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감면라는 혜택을 주어 인구 유입과 경제 활성화를 유도하였다.
화성 율릉과 건릉
융릉은 황제로 추존된 정조와 헌경황후 홍씨의 능이고,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능이다.세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무덤을 현 동대문구에 조성하고 이름을 수은묘라 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묘를 원으로 높여 영우언이라 하였고, 1789(정조13년) 영우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원의 이름을 현릉원으로 바꾸었다. 1815년(순조15년) 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현륭원에 합장되었고, 1899년(광무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며서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건릉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현릉원(융릉) 동쪽 언덕에 조성 되었다. 그러나 1821년(순조21년)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치를 때건릉자리가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효의왕후를 합장하였다.
릉을 들어서는 입구부터 소나무가 울창하다.
홍살문은 신선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의 문이다.
판위는 왕이 능이 있는 구역에 들어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공간이다.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이다.
수락간은 제향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이다.
일반적인 왕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봉분은 일직선으로 배치되기 마련인데, 융릉은 특이하게도 정자각과 봉분의 축이 약간 틀어져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지금 봉분 자리가 좀더 명당이라서 방향을 틀어놓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건릉과 같이 정자각 앞쪽을 굉장히 넓게 조성한 것도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이다.
융릉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장조의 황제와 헤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동대문구)기슭에 수은묘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세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으로 높였으나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 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릉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비각은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로 건릉 비각에는 1개가 아니라 2개의 표석이 세워져있다.
현릉원 표석
이 표석은 현륭원이었을 때의 표석으로 비석에는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朝鮮國 思悼莊獻世子 顯隆園)"이라고 새겨져 있다.
융릉원 표석에는 "대한 정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 大韓 莊祖懿皇帝 隆陵 獻敬懿皇后 祔左)"라고 새겨져 있으며, 제작년도는 광무 4년(1900년)이라고 되어 있다.
곤신지는 1789년(정조13년) 현릉원(융릉)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후 이듬해에 조성된 원형의 연못이다. 조선 왕릉 중 드물게 원형으로 조성한 곳으로 '용의 여의주' 형상이라고 한다. 이 연못은 남서 방향으로, 이 자리는 융릉의 생방(능, 묘자리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이기 때문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금천교는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물길을 건너는 돌다리다.
홍살문은 신선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의 문이다.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이다.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길은 왼쪽은 제향을 지낼 때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갔던 향로이고, 오른쪽은 왕이 제향을 올릴 때 다니던 길이다.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선황제와 그 부인 효의선황후의 합장릉이다. 본래 융릉의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가, 효의왕후가 승하한 뒤 정조의 능을 융릉 동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비각은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로 비각에는 1개의 표석에 세워져 있다.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大韓 正祖宣皇帝 健陵 孝懿宣皇后 祔左)'라는 글귀가 전서로 음각되어 있다.
제향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던 수락간 건물이다
재실은 왕릉 관리자가 지내는 업무 공간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향나무(수령 140년)
향나무 잎이나 줄기에는 α-pinene이나 limonene 등의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향료로 쓰인다.
백송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수원화성이 완공된 뒤, 연무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220여 년 전 정조대왕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훈련하던 곳인 수원화성 연무대(동장대)에서 국궁 활쏘기를 체험할 수 있다.
화성 어차는 연무대-화홍문-장안문-화서문-매향교-연무대로 돌아오는 코스다. 화성어차 표는 연무대 매표소에서 구매한다.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행리단길은 서울 경리단길처럼 개성 넘치는 맛집과 카페가 몰려 있는 곳으로 화서공원에서 수원 화성 화홍문에 이르는 총 612m 거리를 이르는 말이다. 행궁동과 경리단길을 합쳐 행리단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화성행궁 지역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노후화된 주택과 한옥이 많은 지역인데 이러한 노후화된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독특한 취향의 카페나 음식점 편집숍 등이 생겨나면서 젊은이들의 대표 거리이자 수원의 대표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행리단길 주변에는 조선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축조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사적 제115호 화령전 옆으로 자리한 멋들어진 은행나무들도 만나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