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讀書)를 하는 데는 모두 방법이 있다. 대체로 세상에 도움이 없는 책은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예사롭게 읽어도 되지만, 만약 백성이나 나라에 도움이 있는 책이면 문단마다 이해하고 구절마다 탐구해 가면서 읽어야 하며, 오창(午牕)에 졸음을 쫓는 방패로 삼기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반곡(盤谷)이 이 책을 만든 것은 어찌 겨우 그 고생한 것이나 설명하고 그 공로만을 드러내어 그 자손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겠는가. 이는 국가에 경계를 제시하고 후세에 귀감을 남기려고 함일 것이니, 이 《난중일기》를 읽는 자는 마땅히 그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호)의 《징비록(懲毖錄)》과 백사(百沙 이항복(李恒福)의 호)의 《임진록(壬辰錄)》은 상세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두 상공(相公)은 모두 조정의 대신으로서 혹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고 서쪽으로 나가 진중(陣中)에서 전략을 짜냈고, 혹은 왕명을 받들고 남으로 내려와서 문서상으로 공로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온 나라의 대세(大勢)를 논평하고 팔도의 많은 기무(機務)를 조정함에 있어서는 그 업적이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고기도 놀라고 산짐승도 도망간 상태라든가 비바람을 맞으며 들에서 밥해 먹고 지새우는 고초에 대해서는, 생동감 있게 기록한 이 기록만은 못하다. 그것뿐이 아니다. 벼슬이 낮으면 비록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함정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다만 머리를 숙이고 받들어 시행하면서 그 실패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거리가 멀면 비록 가슴에 품은 지식이 천지(天地)를 돌리고 일월(日月)을 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입을 봉하고 할 말을 못하고서 그 분수를 지킬 뿐이니, 이를 ‘유분(幽憤)’이라고 한다. ‘유분’이 있는 자는 당세에는 쓰이지 못하고 오로지 그 포부를 필묵(筆墨)으로 발설하여 후세에 시행되기를 바랄 뿐인데, 이를 ‘고심(苦心)’이라고 한다. 소인(小人)의 아첨하는 행위를 모르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지사(志士)의 유분과 고심을 모르면 역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니, 대체로 이《난중일기》를 읽는 사람은 먼저 그 유분과 고심에 대해서 눈을 밝게 떠야만 아마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고려(高麗) 말기의 왜구(倭寇)가 바람을 타고 갑자기 이르러서 엄습(掩襲)한 것과는 같지 않다. 병술년(1586, 선조 19)에 온 일본(日本) 사신(使臣) 귤강광(橘康廣)은 화단(禍端)의 기미를 보였고 신묘년(1591, 선조 24)에 온 평조신(平調信)은 침략의 기미를 드러냈었다. 그리고 조헌(趙憲)은 초야에서 가슴을 쳤고, 황윤길(黃允吉)이 경연석(經筵席)에서 성실하게 보고하였던 일이 있었으며, 조정에서도 역시 변방의 일을 깊이 걱정한 나머지 김수(金晬)를 골라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제수하고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내려보내는 등 기미가 이미 발생하였고 화근이 이미 드러났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돌 하나라도 쌓고 창 하나라도 만들어서 성문에 침입할 왜적에 대한 대비는 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의 일을 나는 들었다. 변방의 사건을 말하면 허풍을 떤다고 하고 군사 일을 말하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하여, 주사(籌司 비변사(備邊司)의 별칭)의 좌석에서는 당황한 얼굴빛으로 서로 돌아보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도 밖에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태평하다고 하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귀를 대고 소곤거리지 아니한 적이 없으면서도 밖에 나와 손님에게는 걱정이 없다고 하였고, 지방의 관리들도 그 영향을 받고 그 뜻에 맞추어 날마다 음악이나 연주하며 기생과 즐기면서,
“이것이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법이다.”
하며, 궁벽한 곳에서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미 귀신처럼 당시의 정세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반곡공(盤谷公)은 그러한 때를 당하여, 그의 뛰어난 재능으로도 역시 돌 하나라도 쌓고 창 하나라도 만들어서 눈앞에 닥친 화액에 대비할 수 없었던 것은 진실로 온 나라에서 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선산(善山 정경달(丁景達)이 당시에 선산 군수로 있었음)에서만 하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가 군사를 징발할 때는 사운(四運)의 법을 설치하고, 적을 방어함에 있어서는 사채(四寨)의 장수를 두는 등 그 임기응변은 그와 같이 기묘(奇妙)하였으면서도 임진왜란이 나던 4월 15일 이전에는 손가락 하나 못 놀리고 털 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은 위에서 싫어하는 것을 아래에서 감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체로 재난이란 숨겨서는 안 된다. 병을 숨기는 자는 그 몸을 망치고, 재난을 숨기는 자는 그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대체적으로 숨기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내 마음으로만 알고 있는 것을 나의 형제들이 모른다면 형제에게는 숨겨도 되는 것이고, 형제들만 알고 있는 것을 나라 사람들이 모른다면 나라 사람에게는 숨겨도 되는 것이며, 나라 사람만 알고 있는 것을 상대 나라에서는 모른다면 상대 나라에게는 숨겨도 되는 것인데, 그 당시는 그렇지가 않았다. 평수길(平秀吉)이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를 단련시킨 것이 10여 년이었으므로 일본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대체로 일본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숨기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적으로 숨기는 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된다.
[주-D001] 조헌(趙憲)은 …… 쳤고 :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전해인 1591년에 일본(日本)의 사신(使臣) 평조신(平調信) 등이 오자,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을 융숭하게 대우하려 하므로, 조헌이 소(疏)를 올려 왜사(倭使)를 베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청하였으나, 그 말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그가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러자 조헌이 통곡을 하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년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고 탄식하였던 일을 가리키는데, 당시 조헌은 수차 과격한 소를 올려 조정의 득실을 논하다가 추방당하여 시골에 와 있던 때였다.《燃藜室記述 卷15~16 宣祖朝故事本末》
[주-D002] 황윤길(黃允吉)이 …… 일 :
1591년에 황윤길이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갖다 와서, 왜적(倭賊)이 침범할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한 것을 말함.《燃藜室記述 卷15 宣祖朝故事本末》
출전: 《다산시문집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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