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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꽃이 피었습니다!
내 안에 하늘 기쁨이 넘친다.
어제 희망공동체에서 받은 기쁜 소식으로 그 동안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부담과 피곤이 풀린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희망공부방에 와서 공부했던 어린이가 청년이 되고
그가 희망하던 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이 온 것이다.
영민하지는 않지만 겸허하고 성실하고 우직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작은 청년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인도광야에서 믿음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긴 순례의 여정에 오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먼 갈 수 없는 험난한 길을 자원하여 떠난 것이다.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누리며 살길 기도한다.
그가 날마다 주님의 얼굴을 보며 맑은 눈빛으로 살아가길 기도한다.
가난과 고독을 즐기며 세상의 가치에 눈길을 주지 않고 의연히 길 가길 빈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 고난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핍박에 굴하지 않는 정의의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길 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신학교에 가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느냐고?
세상은 정치 지도자, 각종 지식인들과 학자, 탁월한 기업인, 스포츠맨들과 예술가, 언론인 등을 최고로 여기며
존경하며 영웅으로 우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권력과 지식, 물질과 재능은 그 본성상 자기 존재 확보와 영속을 위하므로 배타적이며 위선적이며 폭력적이다. 그들은 세상과 삶을 양육강식 프레임으로 고착화시키며 끝없는 대결과 대립을 유발한다. 역사의 수많은 전쟁과 충돌, 내전과 폭동, 대량학살과 인종 청소, 민족주의와 각종 근본주의, 나라의 흥망, 기업의 성쇠가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목회자의 길은 그렇지 않다. 목회자의 길은 태생이 십자가를 지향한다. 하강! 낮아짐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소수의 교회와 목회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인구에 회자되며 모두가 싸잡혀 비난과 모욕을 당하지만 그래도 성직, 하나님의 종, 목회자는 출발이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소명을 받을 때 이미 세상과 자신의 욕망에 대하여 죽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죽음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의 가치를 전도시키는 영원한 혁명을 겨자씨처럼 죽어서 수행한다. 물론 육을 가진 인간이 완전히 죽을 수가 없으므로 그 부작용과 부패와 악한 구조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사무사(思無邪) 의 의식으로 성직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있는 곳에 위로와 희망이 있고 세속의 가치에 도전하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 목회자는 세상의 모든 어둠과 죄악을 이기고 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꽃이다. 비록 꽃이 아침에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 마르고 시들어도 새 목회자들이 계속 꽃 피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인도에 와서 절망한 것은 인도인들의 피속에 새겨있는 카스트 DNA 때문이었다. 그들은 복음이 말하는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의 평등과 공생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세뇌되었다. 수천년 동안 힘의 구조에 길들여진 그들은 신의 죽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며 비웃는다. 나의 힘과 능으로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의 의식과 사고, 습관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두려움으로 백기를 들고 나오려고 하였다. 그 때 우상과 카스트 세계에서 노예처럼 살다가 카스트 없는 평등과 평화의 종교를 찾아서 개종한 인도 목사님과 형제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두려움을 떨치며 섬김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인도 목회자를 돕고 목회자를 배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3백 여 명 가까운 청년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목회자의 길로 가도록 격려하였다. 떠돌이로 순회를 하면서 신학생들이 일어나도록 청소년들을 격려하였고 되는대로 최선을 다하여 지원하였다.
그런 중에 나의 거룩한 욕망이 커지는 순간이 왔다. 첸나이와 데칸고원 시골 마을에 선교센터를 세운 것이다. 데칸고원에 위치한 그 곳 빈민가는 나에게 쇼크 그자체였다. 그러나 내가 기도하며 결정하고 들어간 곳이기에 당시 한 달 삭월세 값이 한국 돈으로 1000 ~ 2000원인 그 곳의 열악한 환경을 탓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린이들과 함께 빈민 단지를 샘이 넘치고 꽃이 피어 낙원이 되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환상을 그렸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이 일을 감당해낼 지도자로 어린이 10명을 목회자로 키워내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반드시 자기와 세상에 대하여 죽고 낮은 곳에 거처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순간 희망공동체에서 10명의 목회자를 배출하는 것이 나의 기도, 나의 꿈, 나의 희망이 되었다.
한 청년의 신학교 입학은 십여 년 전의 감회를 일으켜 나를 울컥거리게 만들었다.
그 빈민가에 발을 디딘 것은 2007, 8년 정도로 기억이 된다.
데칸고원에 위치한 작은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그 빈민가는 그 시(市)가 길거리에 사는 사람들을 치우기 위하여 주 정부와 협력 하에 거대한 빈민 주택단지로 만든 곳이었다. 시(市)가 집을 지어준 것이 아니고 빈민들에게 한 세대 당 14평의 땅만 무료로 주고 알아서 집을 짓고 살라 고 하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땅을 받은 사람들은 기쁨으로 집을 짓 고자 하였지만 당시 돈 100만 원이 없어서 절반의 사람들이 건축을 포기하고 시내 거리로 다시 나갔다고 하였다. 남아 있는 사람 중에는 은행 융자로 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었고, 천막을 치고 살면서 3,4년에 걸쳐 집을 지은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는 건축비가 올라서 130만원에서 150만 원 정도가 되었다. 집이라고 해야 빨간 벽돌을 개발새발 쌓아올리는 단칸방으로 창문 두 개와 출입문 하나가 다인데도 주택단지에 절반 정도도 밖에 집이 들어서지 않았다.
주택단지라고 하지만 거대한 저수탑이 두 개 뿐이고 나머지 전기, 교통, 시장, 학교, 병원, 약국, 어린이집 등이 너무 열악하였다. 게다가 두세 집 건너 짓다가 만 건물들이 허물어 진채로 버려져 있고 기존의 집들조차도 너무 허술해서 폐가처럼 보이는집이 많았다. 길에는 쓰레기가 산적해 있고 공터 마다 가시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마을은 흡사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곳에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후에 그들의 초청으로 마을를 방문하였다. 마침 폭우가 쏟아진 뒤여서 길은 진창이었고 군데군데 웅덩이 마다 온갖 똥과 오물들과 비닐 쓰레기들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길이 미끄러지고 위험하였으나 몇 가정을 방문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마을의 역사와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돌아오는 길 내내 사람이 쓰레기처럼 방치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참 불편하였다. 그러나 한두 사람도 아니고 당장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으므로 마음에 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다음해에 코코넛 나무를 심으러 들어갔고 그 다음 해에는 염소를 나누러 들어갔다. 그리고 2011년에 시정부와 그 지역 노회 비숍으로부터 그 빈민가에 건물을 짓고 빈민 복지를 위해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기도와 망설임 끝에 빈민가로 들어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무엇을 우선 순위로 두고 일해야 좋을지 몰라서 지역 주민들의 당면 문제와 필요를 파악하고자 300세대를 방문하여 리서치를 하였다. 그리고 내용을 분석하여 그들의 복지를 위하여 해야 할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설계도에도 없는 공부방을 추가하게 되었다.
리서치 결과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백 명 중 다섯 사람만 월급을 받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머지 청장년들은 날품팔이라는 것이었다. 날품팔이!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외상으로 술을 마시다 싸우고 다투는 삶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알코올 중독이나 다양한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들 대부분도 남편을 따라 논밭이나 건축현장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이 한 칸 구조였기 때문에 어느 집이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책상과 밝은 전등을 가지고 있는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나 아이들이 많아서 마을에 들어가면 금방 아이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들은 부모를 따라서 날품팔이로 논밭이나 건축 현장에 가서 일하거나 아니면 개점휴업 상태인 로칼학교에서 곧잘 뛰쳐 나와 거리에서 방황하였다. 애절한 것은 자녀들이 버리고 떠난 손자들을 할머니가 키우는 조손(祖孫) 가정과 자녀들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독거노인들이었다.
건물을 짓기 전에 그 땅을 주선한 그 노회의 비숍에게 그곳에서 하고자하는 사회복지 서비스에 대한 총체적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500여 평이 넘는 넓은 땅에 한쪽에는 2층 건물을 지어 사무실과 어린이집과 공동식사와 직업훈련을 비롯한 사회복지 서비스 시설로만 쓰기로 하였다. 반대편에도 2층 건물을 지어 아래층은 공부방을 두고 위층은 예배당으로 쓰기로 합의하였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굳이 기한을 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시간을 정하고 싶었다. 하나는 인도교회가 우리가 곧 떠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협력하게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희망공동체 캠퍼스의 재정을 우리가 언제까지고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계약서에 사용기간을 20년으로 명기하려고 하였다. 20년 정도 적당히 하고 건물 상태가 적당히 양호할 때 넘겨주고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나를 제외한 모두가 20년은 너무 짧다며 25년으로 하자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운영 부담이 없는 사람들이라 5년을 쉽게 여긴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계약기간을 25년으로 적었다. 그러면서도 가능할 때 언제든지 인수인계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우리 건물과 캠퍼스는 빈민가에 세워진 최고의 건물이고 최고의 공원이었다.
처음부터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이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고 놀랍다.
봉헌을 앞두고 고도(孤島)와 같은 빈민가에서 건물을 세워주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 건물이 주민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 자리요, 누구나 환영 받는 편안한 쉼터이며, 아이들에게 꿈 터이며, 배움터가 되길 간절히 빌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축복의 자리요, 변화의 자리요, 혁명의 자리가 되길 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운영비를 차고 넘치도록 공급해주시라고 간구하였다. 운영비가 없으면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 복지시설로서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기에 운영비는 항상 나의 관건이었다.
희망공동체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였을 때 다짐하였던 것처럼 거대한 빈민단지를 낙원으로 만들 생각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그 낙원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희망공동체에서 사랑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이 만드는 것이어야 했다. 기도하는 중에
이 빈민가에서 10명의 목회자를 배출하면 그들이 그 일이 완성될 것이라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곧 바로 하나님께 ‘10명의 학생들을 신학교에 보내면 그들이 이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곳에서 미련없이 철수하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그 일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믿고 그 때부터 신학교 지망생이 많이 빨리 나오기를 기도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공부방 학생카드를 작성하면서 학생들의 희망과 꿈에 대한 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신학생은 내가 서둔다고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너무 어이없게도 나는 희망공동체 출범 1년 반 만에 비자 문제로 한국에 나오게 되었다. 낙원은 커녕 ‘10명의 목회자 배출자체’가 물 건너갔다는 생각을 하며 절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의 약속이 무효화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희망 어린이집’ 사역을 맡은 이선교사님으로부터 ‘사티쉬’라는 아이가 스스로 찾아와서 목사가 되겠다고 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눈이 번쩍 뜨여서 로칼 텔루구 미디엄스쿨에 다니는 그 아이를 잉글리쉬 미디엄스쿨로 전학을 시키고 장학금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무모한 모험이 성공하기를 그가 학교에 잘 적응하길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해마다 학생카드를 받아서 목회자 지망생을 찾아내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2019년에는 모제쉬, 케지아, 요엘, 에스겔, 그리고 밧뚜를 목회자 지망생으로 확보하였다. 이들은 나의 기쁨이고 나의 희망이며 나의 자랑이었다. 내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이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런 중에 희망공부방 1기생 전원이 10학년 국가시험에 합격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빈민가에서 10학년 학생들이 국가시험에 합격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웠다. 그런데 우리 1기 졸업생 6명 모두가 우수한 성적으로 다 통과를 하여서 희망공동체의 사기가 빈민가에 차고 넘쳐흘렀다. 나의 기쁨이 배가 된 것은 6명 중의 3명이 목회자 지망생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신명이 나서 모두에게 특별 장학금을 보내 격려하였다.
그 다음 해에 사티쉬가 97점이라는 놀라운 점수로 10학년 국가시험을 통과하였다. 나는 1기생들이 빠르면 4~6년 사이에 신학대학교에 전원 입학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사티쉬도 거의 비슷하게 신학교에 입학할 터였다.
인도는 고등학교에서 신학대학교로 바로 진학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전문대학교 또는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해야만 자격이 주어지므로 좀 늦어지기야 하겠지만 모두가 신학생이 될 것이었으므로 마치 우리 1기생, 목회자 지망생들이 다 신학생이 된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었다.
그런데 뜨거운 신앙고백으로 심금을 울렸던 밧뚜가 아버지의 핍박과 강요를 견디지 못하고 힌두와 결혼해서 교회를 떠났다. 밧뚜의 소식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어서 사티쉬가 대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페인트공이 되어 돈 버는 일에 정신이 빠졌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실망이 너무 커서 그를 기대하였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모제쉬와 케지아는 신학교 진학을 목표하고 각자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2022년 코로나 팬데믹이 끝날 무렵 비자 페널티가 풀려서 오랜만에 인도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공부방을 방문하여 그리고 그렸던 아이들을 만났다. 그리고 아이들과 다시 꿈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의 꿈을 격려하며 함께 즐겁고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목회자 지망생의 꿈을 가진 학생들과 청년들을 일으켜 세웠다.
모제쉬, 케지아, 에스겔, 요엘, 작은 사티쉬 그리고 놀랍게도 페인트공으로 노동하는 사티쉬가 일어섰다. 사티쉬가 페인트공으로 전환하여 목회자 꿈을 버린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여 인터넷으로 공부하며 낮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페인트공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가 방송통신대학교를 곧 졸업하게 되므로 2023년에 신학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며 추천서를 요청하였다. 케지아도 추천서를 요청하였다. 육이사장님을 통하여 받은 추천서를 두 아이 관할 시찰회로 보내고 두 사람이 한꺼번에 신학대학교에 입학하는 놀라운 기적이 금방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하며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소속 시찰회에서 두 사람이 추천을 받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두 사람 다 신앙의 연륜이 짧고 그들이 교회에서 신앙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가족들의 신앙도 검증되지 않아서 추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태신앙이 아니고 자기 당대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그런 잣대는 너무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신학교 진학이 교회 문턱에서 걸려 넘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시찰회의 처사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 시찰회의 처사가 너무 불공평하고 불의하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상한 나의 마음을 알아챈 비숍이 노회의 목후생 추천의 기준과 전통에 대하여 거듭 설명을 해주었지만 절망감만 더하였다. 협력교회와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뛰처 나올 수도 없어서 나는 한 동안 침묵에 빠졌다.
빈민가 출신의 우리 아이들에게 성직의 길, 목회는 끝내 허용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 불의와 상징적인 횡포와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당대에 믿은 아이들에게 신학교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들이 받은 소명을 위해 어떻게 새 길을 만들 것인가?
10명의 목회자 배출이 물 건너 간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작년 10월에 시찰회 목회자에게 모제쉬와 사티쉬 추천을 다시 부탁하였다. 그러나 모제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타지로 떠났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해서 추천이 어렵고 사티쉬는 신학 공부를 할 마음의 준비와 자세가 아직 안되어서 추천할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기가 막혀서 입을 닫았다. 밑바닥 아이들의 성직의 길을 가로막는 기성의 관행의 벽이 너무 높고 두터웠다. 그런데 부탁하지 도 않았던 케지아가 시찰회와 노회에서 추천되어 4월에 안드라푸라데쉬 신학대학교로 시험을 보러 갈거라는 소식이 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며 놀라고 있는 사이에 케지아가 합격소식과 함께 합격통지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왔다. 하나님은 내가 앞세우고자 하였던 모제쉬와 사티쉬를 뒤로 물리고 케지아를 앞세워 주시기로하셨는가?
나는 케지아 보다는 모제쉬와 사티쉬에게 더 큰 기대를 걸었다. 그들은 남자이고 공부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셋 중에서 조금 처지는 케지아를 빈민가를 낙원으로 만들 첫 번째 꽃으로 피워주셨다. 세상에 보잘 것 없는 케지아를 희망공동체의 첫 꽃으로 피게 해주신 것이다.
희망공동체가 세워진 지 11년 만에 하나님께 약속드린 10명 중의 1명을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정원에 심어주신 것이다.
한 송이, 두 송이 그리고 이어서 세 송이, 네 송이가 피어날 것을 기다린다.
10송이가 다 피는 날 빈민가가 낙원으로 바뀔 것이다.
할렐루야!
내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10송이 꽃이 쉽게 빨리 피었으면 이렇게 기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을 계획하여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과 자기에 대하여 죽은 하나님의 종, 목회자 배출이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드린다.
첫 꽃으로 피어난 케지아가 너무 고맙다.
우리 신학교 지망생을 위해서 기도하며 후원해주시는 모든 분들이 너무 고맙다.
빈민가가 낙원으로 바뀌도록 새 역사를 일으켜 주실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2024년 6월 13일 묘시
우담초라하니
첫댓글 케지아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고 이끌어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