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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허>의 '사랑의 테마', 이 곡이 끝난 후에도 다른 동영상과 음악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 <벤허>의 전차경주 장면
[ ‘벤허’의 거장이자 완벽주의자 윌리암 와일러 ]
1902년 독일 알사스 율하우젠(현재는 프랑스) 출생의 윌리암 와일러는 스위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Wilhelm Weller였습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창립자인 칼 라예믈의 사촌뻘되는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린 와일러의 장래를 부탁했으며 이에 따라 와일러는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뉴욕 사무실에서 주급 25달러를 받으며 메일 보이로 일하던 그는 1923년 LA로 이주한 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무대 청소와 세트 이동 등 허드렛 일부터 시작했고 보조 편집자를 거쳐 연출부 스탭이 되었으며 1925년 단편 웨스턴 <The Crook Buster>를 연출함으로써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최연소 감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최연소 연출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스튜디오의 일부에서는 한때는 그를 가르켜 "쓸모없는 윌리"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 와일러 감독 작품 <빅 컨츄리>에서 그레고리 펙과 진 시몬즈
192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A House Divided>,<Tom Brown of Culver>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유니버설 스튜디오내의 실력파 감독으로 부상하였습니다.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한 장면을 여러 번에 걸쳐 재촬영하는 그의 고집은 이때부터 정평이 나기 시작했으나 그 결과는 종종 수상이나 평론가들의 호평으로 이어지곤 했죠.
1930년대 중반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떠나 MGM의 사무앨 골드윈과 새로이 영화작업을 시작했으며 1936년 <These three>를 첫 작품으로 하여 베티 데이비스에게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안겨준 <지저벨(Jezebel)>,에밀리 브론테 원작인 <폭풍의 언덕>,와일러 첫 번째 오스카 감독상 수상작인 <미니버 부인(42년)> 그리고 감독상과 작품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 7개 부문을 석권한 <우리 생애 최고의 해(46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명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 폭풍의 언덕
* 우리 생애 최후의 해
1953년에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로맨스 무비의 금자탑으로 손꼽히는 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펙 주연의 <로마의 휴일>을 감독했으며,1956년에는 게리 쿠퍼 주연의 <우정어린 설복>으로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와일러는 1959년, 아카데미 최다부문 수상이라는 기록을 수립한 불멸의 걸작 <벤허>를 완성하고 "오! 신이시여,정영 제가 이 작품을 만들었단 말입니까?"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멘트를 남겼습니다.
* 우정어린 설복
이후 오드리 헵번 주연의 로맨틱 코메디 <백만달러의 사랑>과 바바라 스트레이전드 주연의 뮤지컬 <화니 걸(68년)>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1981년 LA에서 심장마비로 영면하였습니다.
[ 대표작 소개 ]
< 우리 생애 최고의 해(46년도) >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전쟁에서 돌아온 3명의 제대군인들이 일상적 삶에 적응하면서 겪는 문제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중년의 중산층 은행가부터 하층계급 청년을 통해 세대의 폭과 높고 낮은 사회계층의 문제, 전쟁 부상자 문제 등 복합적 문제를 다루는 이 작품은 2차 대전 후의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병사들이 겪는 갈등과 좌절, 그리고 치유되지 않는 상혼...귀환하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세 병사(장교,상사,사병)는 우연히도 고향이 같습니다. 사회에서 뒤바뀐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요?
이 영화는 아카데미 영화상이 시작된 이래 9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그 당시 아카데미상 최다획득의 기록을 세웁니다. 감독은 윌리암 와일러, 그는 10여년 뒤 다시 한번 기록을 갱신하게 되는데...11개 부문에 걸쳐 아카데미상을 받게 된 <벤허>가 그것입니다.
이 영화의 제작자 사무엘 골드윈은 1944년 여름 타임지에서 전쟁 귀환병들의 사회문제를 다룬 기사를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충격은 작가 맥킨레이 캔터에게 전파되어 '나를 위한 영광'이란 전쟁문학을 낳게 되는데 이것을 각색한 것이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였습니다.
흑백 스탠더드 172분짜리 대작인 이 영화를 감독한 윌리암 와일러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3회 수상했고, 주인공 프레데릭 마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이어 두번째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호머 역(양팔이 없는)의 해럴드 러셀은 실제 상이용사였는데 관객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줍니다.
"전에 있던 두 손에 싫증이 났어요. 손을 씻는 것도 귀찮고 그래서 최신 모델로 바꾼 겁니다."라고 영화 속에서 너스레를 떠는 그는 의수의 쇠갈고리로 전쟁의 비극을 몸서리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로 그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과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상이군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준 공로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쇠갈고리 두 손으로 글씨를 쓰며 성냥을 그어 담배도 피워 뭅니다. 무엇보다 가슴 찡한 라스트 씬은 결혼식장에서 쇠갈고리 손으로 반지를 끼워 주는 장면, 또 피아노도 치고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대사도 나옵니다.
< 벤허(59년도) >
"오! 하느님, 진정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단 말입니까?"
이 말은 바로 이 영화를 감독하였던 윌리암 와일러 감독 스스로가 이 영화의 시사회 때 외쳤다고 하네요. 그 만큼 이 영화는 오늘날까지의 영화사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영화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 오늘날까지도 대중 예술로서의 영화적 특성에서 이 영화를 능가하는 작품을 거의 찾아 보기 힘들 것입니다.
<미니버 부인>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로 이미 아카데미 감독상을 2번이나 탄 인물이었지만 스펙타클한 서사극 분야에선 신인이었던 와일러서는 실로 일생 일대의 대작을 만든 셈이었습니다.
10년의 제작 기간, 등장 인물 12만 5천명, 대사를 하는 사람만 해도 500여명, 400여일의 촬영, 지구를 한바퀴 반을 돌만큼의 필림 소모,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인 전설적인 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전차 경주 장면을 위해서 1만 5천명이 4개월 동안 연습했다는 기록도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이 전차경주 장면과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함들의 격전 장면은 영화사에 영원히 빛날 명장면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벤허로 출연하였던 찰톤 헤스톤은 그 당시 신인측에 속하였지만 그의 개성과 태도는 영웅적이고 당당한 모습의 유태 귀족의 역할에 아주 적합하였습니다. 카리스마스적인 그의 모습은 당대 어떤 배우보다 벤허 역에 어울렸습니다.
벤허의 맛수인 메살라로 나오는 스티븐 보이드 역시 대단한 카리스마스를 풍기며 멋진 연기를 해냈습니다. 벤허를 이글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생애 최고의 연기였을 겁니다.
또한 <쿼바디스>, <엘 시드(벤허보다 나중에 나왔습니다)>의 음악을 담당했던 미클로스 로자의 음악도 간과할 수 없는 장점으로 한 영혼의 방황을 분위기 있게 추적하면서 신의 섭리를 경건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Ben-Hur : A Tale Of Christ"/1880년)의 저자인 류 월레스(1827-1905, 미국 인디애나)도 비슷한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됩니다. 일리노이스주의 주지사 아들로 태어나 멕시코 전쟁과 남북 전쟁에 참전해 북군 장군이 된 후, 뉴멕시코 주지사(1879년)와 터키대사도 역임한바 있는 그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단적으로 신약성경의 허구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네요.
오랜 연구와 조사 끝에 오히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거듭나면서 이 명작을 1880년에 탄생시켰습니다. 2년 후, 연극무대를 통해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 작품은 이후 20년간 롱런을 하면서 무대극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직도 걸음마 단계였던 활동사진의 완전 초창기인 1907년에 드디어 첫 번째로 영화화가 되긴 했지만 곧바로 저작권 소송문제로 비화하는 사건을 초래했습니다. 오늘날 원작소설에 지불하는 저작 판권료의 최초의 선례를 만든 이 사건은 결국 15분짜리 단편 무성영화(Ben Hur, "Sidney Olcott"감독)를 만든 영화사가 월레스의 유족들에게 당시에는 엄청난 거금이었던 2만5천 달러를 지불함으로써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1925년에 드디어 "Ben Hur" 라는 제목으로 장편 영화("Fred Niblo"감독/ 143 분/ 흑백, 무성)가 만들어지면서 바로 일년 전에 합병 창립이 된 MGM 영화사(메트로+골드윈+메이어, 3개사가 합병)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됩니다.
다시 영화 <벤허>로 돌아가서...
10년간의 오랜 제작 준비기간을 거쳐 전작과 마찬가지로 (부도위기 속의) 같은 영화사에 의해 같은 이탈리아에서 1958년 내내, 강행군이 된 이작품은 로마 근교의"치네치타" 스튜디오 외에도 무려 300여개의 세트장에서 한 대당 10만 달러가 넘는 65mm 카메라들에 의해 촬영이 되었는데, 그 찍은 필름의 길이만 해도 지구를 한 바퀴 반을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CG(컴퓨터 그래픽)가 당연히 없던 시절이다 보니 손으로 일일이 그려 넣은(로마 시내와 전차 경기장의 배경과 같은) 특수효과는 手工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도 대단한 장면들을 창조했습니다. 한편 전례가 없었던 총 1,500만 달러가 넘는 사상초유의 제작비 조달 외에도 너무나 힘든 일이 수두룩하게 이어졌는데...
공동 제작자인 샘 짐발리스트는 그만 긴장의 연속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제작 마감 2달 전에 로마에서 죽는 불상사까지 발생을 한걸 보면, 얼마나 힘든 역경 속에서 이 대작이 탄생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 로마의 휴일(53년도) >
와일러는 23세의 어린 나이에 서부영화로 감독 데뷔를 한 이후, 그의 생애 최고작인 된 <벤허(1959년)>에 이르기 까지 70편에 가까운 명작들을 만들어 내었지만, 아무래도 코미디와는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프랭크 카프라 감독이 이미 사양한바 있는 이 작품(로마의 휴일)을 선뜻 맡게 된 것은 이 영화 각본의 원작자인 달톤 트램보가 처한 곤경을 친구로서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할리우드에 매카시 선풍(빨갱이 색출 광풍)이 한참일 때,친구 달톤이 좌익분자, 블랙 리스트에 첫 번째로 올라, 1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가명으로 집필한 이 작품의 고료 5만 달러가 당시에 트램보의 가족들에게는 매우 절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이안 맥클라렌 헌터라는 이름으로 된 탁월한 시나리오를 읽은 와일러 감독은 이 영화에는 남녀 주연배우가 특히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당시의 여러 스타급 배우들과 접촉을 하였으나 이내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선 남자 주인공으로 쉽게 응하였던 캐리 그랜트가 대본을 읽고 난 후, 출연을 포기하였으며(이후 그레고리 펙이 출연을 승락합니다), 진 시몬즈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출연료 협상이 역시 순조롭지 않자, 와일러 감독은 아예 신인 여배우를 물색하게 되었고, 그래서 입소문을 타고 뉴욕에서 할리우드 영화계로 알려지기 시작한 오드리 헵번과 드디어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전 세계 영화계의 1950년대는 마릴린 몬로나 브리짓 바르도같은 글래머 스타일의 여배우들이 환영을 받던 시기였는데, 170Cm의 껑충한 키에 가슴과 엉덩이가 빈약하기 짝이 없는 깡마른 이 반 글래머적이고 반 할리우드적인 24세의 신인, 헵번을 주인공으로 기용한다는 것이 그때로서는 굉장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러기에 그레고리 펙도 인정을 한 와일러 감독의 선견지명은 오히려 더욱 더 높이 평가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미국 아카데미상의 의상부문에 무려 24번이나 후보가 되었고, 또 평생에 7번이나 수상을 한 할리우드의 명 디자이너, 에디츠 헤드가 창조해낸 헵번의 단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살린 의상이야말로 신데렐라 탄생의 아주 중요한 요인으로서 인정을 받습니다. 이후에 헵번은 프랑스의 의상업체 지방시와의 협력으로 오드리 헵번 룩이라는 전 세계적인 독특한 새로운 유행 패션까지도 창조하게 됩니다.
미국인들이 무척이나 선호하는 파리를 배경도시로 한 수십 편의 할리우드 영화들과 같이, 로마에 더욱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가게 만든 이 작품 역시,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콜로세움, 진실의 입, 나보나 광장, 포로 로마노, 천상의 성,소망의 벽, 바티칸 등의 관광명소들에서 촬영을 함으로서 관객들에게 대리관광의 즐거움도 선사하였지만, 당시 할리우드로서는 보기드문 100% 현지촬영도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트 촬영은 로마의 씨네시타 스튜디오에서 했지만...
어린 두 딸을 트레비 분수에서 조(그레고리 펙)가 카메라를 빌리려고 하는 학생들로 직접 출연시킨 완벽주의자, 와일러 감독은 어느 장면에서는 무려 46회나 재촬영을 거듭하였다지만, TV 쇼의 명 사회자이기도 했던 레드 스켈톤의 옷 속에 손을 감추는 개그를 흉내 낸 '진실의 입' 앞에서의 장면은 단 한번 만에 오케이사인을 주었다고 합니다.
1954년 제26회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무려 10개 부문에 후보가 되어, 의상 디자인상, 여우주연상, 스토리 저작상, 3개를 수상한 이 작품에서 다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아무래도 컬러로 제작을 할 수도 있었는데,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낸다고 일부러 흑백 필름으로 촬영을 한 점과 좀 더 인상적인 영화음악을 선사하지 못한 점 등이 될 것입니다.
* 윌리암 와일러 감독의 주요 작품
1. 진정한 해방 (The Liberation Of L.B. Jones) 1970년 미국
2. 화니 걸 (Funny Girl) 1968년 미국
3. 백만달러의 사랑 (How To Steal A Million) 1966년 미국
4. 편집광 (The Collector) 1965년 영국/미국
5. 아이의 시간 (The Children's Hour) 1961년 미국
6. 벤허 (Ben-Hur) 1959년 미국
7. 빅 컨츄리 (The Big Country) 1958년 미국
8. 우정어린 설득 (Friendly Persuasion) 1956년 미국
9. 필사의 도망자 (The Desperate Hours) 1955년 미국
10.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1953년 미국
11. 캐리 (Carrie) 1952년 미국
12. 형사 이야기 (Detective Story) 1951년 미국
13.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The Heiress) 1949년 미국
14. 우리 생애 최고의 해 (The Best Years Of Our Lives) 1946년 미국
15. 미니버 부인 (Mrs. Miniver) 1942년 미국
16. 작은 여우들 (The Little Foxes) 1941년 미국
17. 서부의 사나이 (The Westerner) 1940년 미국
18. 편지 (The Letter) 1940년 미국
19.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1939년 미국
20. 제저벨 (Jezebel) 1938년 미국
21. 출입 금지 (Dead End) 1937년 미국
22. 공작 부인 (Dodsworth) 1936년 미국
23. 이 세 사람 (These Three) 1936년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