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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빌립보서는 가장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표현이며,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기록이다. 본 서신에 흐르는 두 가지 주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고한 복종(참조, 빌 2:5-11)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신 목적을 이루려는 그리스도의 종 바울의 뜨거운 열정(참조, 빌 3:2-15)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고한 복종을 논함에 있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겸손의 본질을 권면하고 그 예시로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였다. 즉 바울은 예수의 비하와 자기희생이 하나님으로서 어떻게 승귀와 우주적인 환호에 이르는 전주가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학자들은 이 점을 성육신 교리와 관련된 가장 뛰어난 표현 중 하나라고 하였다(참조, 골 1장; 히 1, 2장; 요일 1장). 다음으로 본 서신은 바울의 생애를 이끌었던 원동력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바울의 놀라운 헌신과 지칠 줄 모르는 열심이 그로 인하여 자신이 전심을 다해 믿었던 복음에 그들의 삶을 바친 역사의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삶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었다. '주님을 얻는 것', '주님을 아는 것', '주 안에서 발견되는 것', '주 안에서 세워진 목적을 이루는 것'이 모두가 그의 관심의 영역이었으며, 빌립보서는 바로 이러한 바울의 원동력을 보여주며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온전한 삶을 묘사한다. 빌립보서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곧 빌립보서는 옥중에 갇힌 전도자 바울의 처한 상황과 그가 빌립보서에서 보여주는 기쁨의 찬양시의 대조를 통해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성도의 삶의 구체적인 어려움과 위로, 그리고 기쁨을 제시하는 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Moule, Bruce). 이 글에서는 빌립보서의 배경적인 사항을 다루고 특별 주제들을 통하여 신약성경상의 빌립보서의 위치를 가늠하고자 한다.
제1부 빌립보서의 역사적인 배경
I. 저자 및 수신자
1. 저자
빌립보서의 저자 문제에 관한 한 18세기말 이전까지는 바울의 글이라는 점에 대해 큰 이의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튀빙겐 학파의 '바우어'(Bauer)를 필두로 한 일군의 비평학자들에 의해 빌립보서의 저자 문제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먼저 비평학자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에는 다분히 '헤겔'(Hegel)의 변증법적 적용이 눈에 띄는데 그들이 제기한 문제점은 대략 네 가지로 요약된다. ① 빌립보서는 교회사적으로 시대적인 부조화를 보여준다. 즉 '감독들과 집사들'(빌 1:1)에 대한 언급은 바울 사후의 교회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직분이라고 보고, 본 서신의 저자는 바울일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학자들은 행 6:1-6; 11:30; 14:23; 20:27, 28을 근거로 '감독'이나 '집사'라는 직분이 빌립보서가 기록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비평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② 빌립보서에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향으로 보이는 본문들이 포함되었다는 지적이다. 비평학자들은 특별히 빌 2:5-8을 영지주의의 영향에 따른 표현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저자가 <aijwvn ; 아이온>을 종말론적인 영원한 세계로 간주하여 충만한 공허를 동시에 내포하는 세계로 설명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소피아'(Sophia)를 같은 맥락에서 취급한 것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비평학자들의 해석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Holstein). 왜냐하면 문맥상 본문은 '영원한 세계'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③ 빌립보서는 독창적이지 못하고 모방의 흔적이 엿보인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일 바울이 로마서 등을 기록한 것같이 빌립보서를 썼다면 비슷한 표현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점을 간과한 듯하다. ④ 빌립보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 볼 때 교리적으로 전혀 다른 요소들을 포함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 지적조차도 설득력은 없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이 체계적인 교리서나 그것에 대한 해설서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각 교회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 따른 지극히 개인적인 서신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빌립보서는 보다 적용 범위가 넓은 사적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한편 비평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에 앞선 외증과 내증이 빌립보서의 바울 저작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먼저 내증으로는 바울의 이름이 언급된 빌 1:1을 비롯하여 언어, 문체, 사상 등 어느 것이고 바울의 것이 아니라고 할 만큼 모호한 것이 없이 분명하게 바울적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학자들은 빌립보서의 내증 면으로도 그 순수성을 인정할 만하다고 하였다(Calvin, Holstein).
다음으로 외증은 매우 광범위하다. ① 초대교회 교부인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는 자신의 고린도서 주석에서 빌 1:27과 4:15을 인용하여 고린도서를 설명하였다. ②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자신의 '서머나 서신'의 4장과 11장에서 빌 4:13과 3:15을 인용하였으며, 인용구들이 바울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③ '이레니우스'(Irenaeus)도 자신의 저서에서 빌 4:18을 인용하였는데 그 또한 인용구가 바울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④ '폴리캅'(Polycarp)도 자신의 서신에서 빌 2:17; 4:10 등의 내용을 암시하였으며,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의 서신을 상고하라고 권면하였다. 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터툴리안'(Tertullian)도 본 서신에서 상당 부분을 인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빌립보서의 저자로 인정하였다. ⑥ 고대 수리아역이나 라틴역을 비롯하여 무라토리 단편에 이르기까지 빌립보서는 정경으로 언급되었으며, 심지어는 '말시온'(Marcion)의 정경에도 바울서신의 하나로서 빌립보서가 언급되었다. 이렇게 볼 때 비평학자들이 주장하는바 본 서신의 바울 저작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는 근거를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계속 보일 경우 오히려 헤겔의 변증법을 성경 해석에 여과 없이 적용하였다는 비난만 받게 될 뿐이다. 빌립보서는 바울서신의 하나로서 바울이 기록한 서신이며 그 순수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2. 수신자
빌립보는 동마게도냐 평야에 위치하였으며, 항구 도시 네압볼리 및 에게해로 나아가는 입구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빌립보는 교역상으로나 전략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 주변에서 풍부한 양질의 금속이 산출된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중요성을 한층 증대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곳의 역사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인 마게도냐 왕 '빌립 2세' 이후 부각되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도시의 본 명칭은 크레니데스로 '작은 우물'이라는 의미를 지녔었는데 B.C. 358년 빌립 2세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 명칭도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이 지역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많은 외침을 받아 오다가 B.C. 42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같은 역사의 불안정은 이 지역의 정신적 종교적 삶에서도 드러난다. 종교 생활의 특징은 광범위한 종교 혼합주의였으며, 로마의 신상들이 헬라 신상들 곁에 서 있었다. 또한 로마인들은 헬레니즘에 동화되어 다신교적 우상 숭배에 빠졌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를 부추긴 요인 중의 하나가 상인들의 유입으로 인한 제의들의 유입이었다. 즉 일련의 민간 교단과 제의 공동체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디오니소스, 사자 숭배 혹은 그 밖의 제의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의 작은 공동체로서 유대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공동체는 성 밖에 '강기테스'라는 기도처를 마련하였으며(참조, 행 16:13), 이곳은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행 16:12)였다. 이같이 종교적 혼합 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유대교로부터 시작된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특기할 만한 장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교회가 빌립보 성 안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형성 과정에서 로마 교회가 더 오랜 기원을 가질 수도 있지만 마게도냐의 로마 식민지는 유럽에서 제일 먼저 선교된 곳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빌립보 교회 설립의 의미를 한 꿈의 환상을 기록함으로써 강조하였다. 행 16:11 이하에 따르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제2차 전도여행 때에 드로아로부터 사모드라게섬을 거쳐 네압볼리에 이른다. 이들 일행은 네압볼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빌립보에 이르러 단지 수일 간만 머물렀다. 그들은 빌립보에서 유대인 회당을 발견하지 못한 채 성 밖에서 유대인의 기도처를 찾다가 안식일에 강가에 모인 일군의 여인들을 만나는데 그 중에서는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인 루디아도 있었다. 이 여인은 실제로 유대교와 몇 차례의 접촉이 있었던 이방 여인이었던 것 같다(Haenchen). 어쨌든 이 여인은 자기 가족 전체를 세례 받게 한 첫 사람이었으며, 또한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손님으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바울의 빌립보 전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바울의 연대기 추정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대략 49-52년 가을 사이로 추정된다.
빌립보 교인들은 처음부터 사도 일행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 자신의 생계를 보조하게 하였는데 이는 단지 소수의 교회들에게만 허용했던 명예로운 특권이었다. 또한 이 점은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 사도 사이에 마음으로부터의 일치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빌립보서는 빌립보로부터 바울에게 보내진 성금과 직접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그가 설립한 교회들에서 헌금을 모을 임무를 부여받았는데(참조, 갈 2:10), 이 행사에 빌립보 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 고린도후서에서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가장 가난한 가운데서도 넘치는 자비를 보여주었다고 칭찬한다(참조, 고후 8:2). 빌립보 서신이 다른 바울서신에 비하여 비논쟁적이고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바울은 본 서신을 집필할 당시 빌립보 교인 다수가 자기를 따른다는 것에 대해 확신하였다(참조, 빌 4:15, 16). 물론 빌립보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화합과 평화를 교란시킨 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본 서신의 분위기로 보아서 그 일은 이미 결말이 났으며 그 결과로 인해 바울은 더 많은 지지자를 얻은 것으로 나타난다. 여하튼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이 교회의 아름다운 봉사 정신에 대해 칭찬한다.
빌립보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이 이후에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의 순교 여행 중에 빌립보에 잠시 머물면서 빌립보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고, 빌립보 교회에서는 안디옥에 위문편지를 보내는 등 많은 관심과 위로를 표명하였다. 또한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에게 '이그나티우스'가 쓴 편지를 보내 달라고 청하였으며, 이에 대해 '폴리캅'은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와 함께 친히 자신의 편지도 보내 주었다. 이처럼 설립자인 바울을 비롯하여 교부요 순교자인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의 관계 이야기는 빌립보 교회의 헌신적인 봉사를 더욱 빛내 주는 요소라 하겠다.
II. 기록 장소와 연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 4권의 서신은 소위 옥중서신으로서 바울이 로마에 투옥된 기간 중에 기록하였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그리고 빌립보서를 제외한 세 서신들은 거의 동시에 쓰여졌다고 본다. 빌립보서는 일반적으로 네 서신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진보적인 학자들은 빌립보서를 네 서신들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으로 생각하고 로마의 옥중 초기에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Lightfoot). 하여튼 전통적인 견해나 진보적인 견해 모두 바울의 빌립보서 기록 장소를 로마로 본 것만큼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의 기록 장소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는가 하면 기록 연대에 있어서도 무려 1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견해와 진보적인 견해를 나누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1. 전통적인 견해
빌립보서는 로마에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복음의 수용과 전파에 있어서 능동적이면서도 당을 짓는 일과 분열 야기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투옥된 3년여 간에 자연적으로 증가하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비록 투옥되었지만 로마에 왔다는 사실이 각처에 퍼져나가면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고무시켰기 때문이다(참조, 빌 1:12이하). 뿐만 아니라 로마교인들 사이에서는 사도 바울에 대한 적개심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참조, 빌 1:15 이하). 따라서 빌립보서가 기록된 시기는 로마의 교인들이 부흥하고 그 부흥의 와중에서 바울에 대한 적개심이 생길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후가 될 것이다. 또한 빌립보서에는 사도 바울과 로마까지 동행했던 아리스다고와 누가(참조, 골 4:10 몬 1:24)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으로 보아서 그들은 빌립보서가 쓰여지기 전에 로마를 떠났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빌립보서는 골로새서와 빌레몬서 등보다 늦게 쓰여진 것이라고 추정한다(Hodge).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본 서신의 연대 결정 문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잠시 동안 로마를 떠날 수도 있었고, 에베소서에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이 언급되지 않은 점도 반박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된다. 또 빌레몬서와 골로새서 등과 같은 시기에 기록된 것이 확실한 디모데서에도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아리스다고와 누가에 대한 언급 유무로 빌립보서의 연대를 결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겠다. 하지만 전통적인 학자들은 빌립보서의 기록 연대를 바울의 로마 투옥 말기로 추정하는데 여기에는 보다 강력한 근거들이 제시되었다. 먼저 그들은 바울이 죄수로서 투옥 중에 있었으며(참조, 빌 1:7, 13, 14, 17), 옥중 생활에서의 바울의 생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생사의 문제가 불확실한 가운데 외부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였기 때문이다(참조, 빌 1:20 이하; 1:30; 2:17). 그러나 '맨슨'(Manson) 같은 이는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투옥 중이 아니라 자유의 몸이었다고 한다. 그는 바울의 형 집행이 이미 끝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간주하며, '나의 매임'(빌 1:7)이라는 말은 각 곳에서의 계속되는 시련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빌 1:7, 12 이하, 16 이하, 30 등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확실히 옳지 않다. 오히려 이 구절들은 기록 당시에도 바울이 여전히 감옥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전통적인 학자들이 근거로 삼는 일은 바로 빌립보서가 감옥 생활 말기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바울이 감옥으로부터 자유의 몸이 될 가능성도 있으며 이 점은 빌립보 교인들이 열망하는 바이다(참조, 빌 1:19, 24, 25). 반면에 치명적인 판결, 곧 사형 선고요(참조, 빌 1:20-23; 2:17), 순교의 면류관(참조, 빌 3:11)일 수도 있다. 빌립보서는 바로 확정되지 않은 투옥 생활을 하는 바울의 불안정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빌립보서의 기록 연대는 로마에 도착하였다는 흥분이 가라앉은 투옥 생활 말기로 봄이 좋겠다. 두 번째로 바울의 감옥 생활 장면에 대한 빌 1:13의 언급은 빌립보서의 기록 연대를 투옥 생활 말기로 확증한다. 곧 그가 엄격한 제한과 절박한 위험의 상황 속에서 빌립보를 기록하였다는 점은 본 서신 자체가 증거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기록 장소는 여러 곳이 제시되었지만 다른 곳에서의 투옥 생활은 투옥 기간이 짧고 빌립보서를 기록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할 때 로마 감옥이 어울린다. 따라서 빌립보서의 기록 연대는 바울이 로마에서 투옥 생활(61-63년)을 한 지 오랜 기간이 지난 63년경이 되겠다.
2. 진보적인 견해
비평학자들 사이에서 본 서신의 기록 장소와 기록 연대를 규정하는 문제는 매우 다양한 견해차를 보여주는데, 빌립보서가 편집되었다는 가정과 더불어 이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졌다. 특히 편집 비평학자들은 빌립보서를 A서(참조, 빌 1:1-2:30; 4:2-7, 10-20)와 B서(참조, 빌 3:1-4:1, 8, 9)로 나누고 A서만을 옥중서신으로 간주한다(Gnilka, Bornkamm). 더욱이 이들은 이 옥중서신의 기록 장소를 에베소로 추정한다(Feine, Lake, Lemerle, Bonnard, Robinson). 그들이 에베소를 본 서신의 기록 장소로 추정하는 이유는 바울이 이미 에베소에서 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전제하고 있으며, 또한 에베소에서의 투옥을 극히 가능한 것으로 나타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참조, 롬 16:7 고전 15:32). 그런데 바울서신이나 사도행전을 통틀어서 바울의 에베소 투옥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은 바울의 에베소 투옥에 대한 직접적인 논증보다는 오히려 가이사랴나 로마에서 본 서신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논증하였다. 먼저 로마의 경우는 빌립보와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진 관계로 디모데와 같은 바울의 편지 전달자가 쉽게 왕래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라는 점을 든다(Haenchen). 그리고 가이사랴의 경우는 바울이 하루 이상 감금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빌립보서의 기록 연대 논의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편 편집 비평학자들 내에서도 빌립보서의 에베소 기록이라는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학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들은 빌 1:15-17을 근거로 사도와 그가 감금된 지역의 교회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에베소 교회와 바울의 관계를 고려할 때 에베소는 빌립보서를 기록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Lohmeyer, Schmid). 또한 '해리슨'(Harrison)은 에베소 집필의 경우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이 빌립보서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또 바울이 이미 로마에 도착했다고 본다면 이 난점은 해소된다는 것이다. 즉 그의 요지는 에베소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하였다면 그 시기는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 참석하기 이전이 되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언급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해리슨'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총독부 법정에 섰다면 언제든지 가이사에게 공소장을 올려서 자신의 위험을 연기시킬 수 있었을 것인데 빌립보서에서는 위급한 죽음의 위기에 대해 우려하는 언어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곧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가이사에게 공소장을 씀으로써 목숨을 연장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로 얻었다(참조, 행 22:28; 25:10-12; 28:16-22). 그러나 '로마이어'나 '해리슨'의 견해에 대해 '미카엘리스'(Michaelis)는 바울이 에베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에 에베소 교인들 사이에서 격정적인 분열을 비롯하여 일련의 타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대제국의 식민지 하에서 가이사에게 낸 공소장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보다는 취하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지적한다. 곧 에베소에서 바울이 공소장을 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죽음의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른다고 답변하였다. 이렇게 볼 때 편집 비평학자들의 견해는 빌립보 A서가 에베소 투옥 기간 중에 기록되었으며 그 시기는 55, 56년 사이로 요약된다. 반면에 소위 빌립보 B서는 자유를 얻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에 머물면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소위 빌립보 B서의 내용을 드는데, 그 내용은 매우 공격적이어서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어울린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가정이 가능하다면 빌립보 B서의 기록 연대는 바울의 고린도 체류 기간인 56, 57년 사이가 된다.
III. 기록 목적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에바브로디도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빌립보 교회로부터 매우 흐뭇한 선물을 바울에게 가져왔다. 실로 그 선물은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넘치는 감사를 표시할 만큼 귀중한 것이었고, 그 선물을 들고 온 에베브로디도 자신도 귀중한 선물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변함없는 동역자요 조력자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형편에 대한 보고를 가지고 왔다. 그가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빌립보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가난을 구제하는 일에 넘치도록 힘써서 그리스도인의 놀랄 만한 모범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회 내에는 개인적인 알력이 존재했고 개 같은 자들과 행악자, 그리고 손할례당과 같은 위험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었다(참조, 빌 3:1-3). 따라서 바울은 이 같은 빌립보 교회의 사정에 대해 조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근황에 대해 빌립보 교인들이 매우 염려한다는 사실을 전하였으며, 자신은 바울의 옥바라지를 위해 보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긴 여로에 지친 에바브로디도는 심각한 병에 걸려 고통을 받았으며, 고향인 빌립보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였다. 바울은 그가 몸조리하여 회복되는 대로 그를 돌려보냈지만 그를 보낸 빌립보의 지도자들은 그가 결코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써야만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에 전달한 서신에서 바울이 목적한 바는 대략 네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해서 감사를 표시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전달된 선물만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믿음의 행실을 인해서도 감사하였다(참조, 빌 1:3-11; 4:10). 두 번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영적 지침을 제공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서신 가운데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그들의 시민권을 행하라고 권면한다(참조, 빌 1:27-30). 또한 생각과 목적으로 하나가 되라고 가르쳤으며(참조, 빌 2:2),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자세를 본받으라고 강조하였다(참조, 빌 2:14-16). 반면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다(참조, 빌 2:14-16). 반면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다(참조, 빌 3:1-3). 그는 교인들에게 유대주의자들이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과거의 자랑에 젖어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바울 자신을 본받으며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라고 권면하였다(참조, 빌 3:4-16). 이처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용기, 하나 됨, 낮아짐, 유용함, 순종, 완전함, 거룩함, 견고함, 그리고 주 안에서 기뻐하며 신뢰할 것 등에 대해서 가르치고 강조하였다(참조, 빌 1:27, 28; 2:2, 3, 4, 12; 3:12, 17, 20; 4:1-3). 세 번째로 바울은 본 서신을 빌립보 교인들의 생각과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기 위하여 썼다. 빌립보 교인들은 대전도자인 바울의 투옥 사실에 대해 매우 염려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처지가 비록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복음을 위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자신을 위해 슬퍼하거나 염려할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위로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하여 빌립보 교인들이 그를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도록 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썼다. 그는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갑작스런 귀환에 대비하여 빌립보 교인들이 뜨겁게 그를 영접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Ⅳ. 특징 및 구조
1. 특징
빌립보서의 특징은 사도 바울의 개성과 성품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그리고 격식을 차리지 않은 편지투로 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어진 사랑의 편지라는 점이다. 다른 바울서신에서 자주 나타나는 책망이 본 서신에서는 적은 대신 보다 많은 찬양과 기쁨으로 내용을 가득 채웠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특징적인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교제'와 '복음'이다. 먼저 '교제'라는 말은 헬라어로 <koinwniva ; 코이노니아>인데 근본적으로 그것은 '어떤 사람과 함께 어떤 것 안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서로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것 안에 참여한다는 그 의미는 공중 집회에서의 다정한 분위기라는 의미처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개인적인 교제를 가리키는 현대의 유행적 개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로마이어'가 지적하는 것처럼 객관적인 일, 곧 교제를 가능하게 하고 실행하게 하는 기초와 규범을 제공하는 무엇이다. 또한 '라이트푸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복음을 돕기 위해 행한 성도의 협력이다. 물론 이들 신학자들의 지적은 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염두에 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제'라는 말을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 준 헌금 모금과 연관짓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제'라는 말의 영역이 교회의 재정적 지원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말은 보다 포괄적이며 구체적인 의미 영역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구체적인 재정 지원을 포함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후함(관대함)과 사랑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제만'(Seesemann)은 '교제'를 복음 전파로 인하여 처음 회심한 날에 생겨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동일시한다. 한편 이 말은 '성령의'라는 수식어를 가질 때 구체화된다. 즉 성령에 의해 만들어진 교제, 성령께서 가능하게 해주신 교제, 혹은 성령 안에서의 교제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때문에 이 단어가 갖는 포괄적인 의미는 성령 안에 참여함이 된다. 그리고 그 표현 양식으로서 '성도 서로 마음으로 느끼는 긍휼'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으로써 얻는 부활에의 참여'를 들 수 있다. 따라서 '교제'는 고난과 긍휼이라는 구체적인 신앙 양태와 결부된 성령 안에의 참여이다. 빌립보서에서 두 번째로 특징적인 용어는 '복음'이다. 이 말은 헬라어로 <eujaggevlion ; 유앙겔리온>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위탁한 복음 전도에 대한 사도의 봉사와 활동을 가리킨다. 바울은 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 디모데나 여자들을 포함하는 다른 여러 사람들에 의해 도움을 얻었다(참조, 갈 2:7 빌 2:22; 4:3).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구속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처음 그 도시를 방문했던 그 날부터(참조, 빌 4:15) 빈번한 헌금과 '교제'로(참조, 빌 1:5)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도와 왔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복음에의 협력에 감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투옥으로 인해 근심하는 교인들에게 복음을 위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들어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즉 자신의 죄수가 되어 감금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하고, 열방을 향해 승리적으로 전할 임무를 받았던 복음을 더 빨리 전하게 하시려고 새로운 음성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기뻐한다(참조, 빌 1:12 살후 3:1). 또한 바울은 복음을 위해 일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그런 이유로 해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되 단순히 진심과 우정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영접하여야 한다고 한다(참조, 빌 2:29).
2. 구조
빌립보서의 구조에 대해서는 편집을 가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두 가지의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편집을 가정하는 경우 빌립보서는 A서(참조, 빌 1:1-2:30; 4:2-7, 10-23)와 B서 (참조, 빌 3:1-4:1, 8, 9)로 크게 양분되며, A서의 경우 사상 전개는 서두(참조, 빌 1:1, 2), 애정 깊은 서언(참조, 빌 1:3-11), 투옥 중인 사도의 상황(참조, 빌 1:12-16), 교회가 행해야 될 과제(참조, 빌 1:27-2:18), 앞으로의 계획(참조, 빌 2:19-3:1; 4:2-7, 10-20), 그리고 통례적인 인사와 축복(참조, 빌 4:21-23)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B서의 사상 전개는 신랄한 경고(참조, 빌 3:1-4), 교회의 모범인 바울 자신(참조, 빌 3:5-11), 빌립보 교인들은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내용(참조, 빌 3:12-21), 그리고 마지막 권면(참조, 빌 4:1, 8, 9) 등이다. 반면에 빌립보서의 편집 가정을 부인하는 전통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도표 1>과 같이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장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 제2장은 그리스도와 같이 됨, 곧 영적 교제를, 제3장은 영적 예배를 통한 그리스도의 얻음에 대해, 제4장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족과 성령을 통한 은혜에 대해 다룬다 (참조, 빌립보서 도표1).
제2부 빌립보서의 특별 주제들
I. 기독론적 찬양시(Christuspsalm)
기독론적 찬양시(참조, 빌 2:6-11)는 전 신약성경을 통하여 가장 영광스러운 구절 중 하나이다. 이 부분은 교리의 축소형이며,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도 개개인에 관한 집약된 진리와 교훈이다. 또한 성도의 일상생활의 지침서이며, 성도의 행동에 대한 장엄한 총서이고 드러내 놓고 권하는 바울의 훈계이다(Jensen). 그런데 이 찬양시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의 찬송가였다고 보기 시작하면서 이 찬양시가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된다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문제점 중에서 우선 이 찬송시가 주제 면에서 그 자체로 완결된 구조를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곧 이 찬양시는 문맥에서 분리될 수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바울이 이 찬양시를 전승들 속에서 끌어들인 인용구로서 바울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그리스도론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Bultmann, Lohmeyer, Jeremias). 심지어 그들은 이 찬양시가 바울에 의해 변화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많은 여지를 남겨 두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찬양시가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에 대한 뛰어난 찬양을 통하여 그리스도론의 한 지평을 연 것만은 틀림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독론적 찬양시의 배경, 곧 삶의 자리(Sitz im Leben)와 연결된 바울의 그리스도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종교사적 배경
1) 헬라적 요소
한때 이 찬송시를 헬라 로마 시대의 이상적인 지배자 상으로 설명했었던 적이 있다. 대표적인 해석자로는 '보른호이저'(Bornhaeuser)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이 찬양시를 시대적으로 해석하여 '칼리쿨라'의 신격화에 대한 시사로 파악하였다. 후에 같은 계통의 비평학자인 '에르하르트'(Ehrhardt)는 이 찬양시를 헤라클레스 신화와 연관지으려고 시도하였다. 그가 근거로 삼는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알렉산더 대왕에 대하여 '땅의 모든 것이 한 로고스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시아인의 모습을 띠고 이 땅에 내려왔으며, 만약 신이 알렉산더의 영혼을 그렇게 빨리 돌이켜 부르지만 않았다면 그는 영영히 인간의 빛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에르하르트'는 제우스의 아들이며 모든 인간들 중 최고의 선인으로서 벌거벗은 채 방황했던 헤라클레스에 관한 신화가 알렉산더에게 전용되었다고 본다. 그는 또 플루타크가 세계의 정복자인 알렉산더조차도 로고스에 종속시킨 것은 알렉산더에게 금욕과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헤라클레스 신화의 전용이 바울에 의해 예수에게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신학적인 주안점은 간과된 채 지배자의 윤리적인 문제와 결부된 해석으로서 신학자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2) 유대적 요소
'로마이어', '쿨만'(Cullmann), 그리고 '보나르'(Bonnar) 등이 이 찬양시를 유대교 묵시문학적인 표상 세계에 뿌리를 둔 천상적 인자의 묘사라고 보는데, 말하자면 그들은 이 찬송 시에 묘사된 예수를 아담과 관련된 사람의 아들로 생각한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이 찬송시가 여호와의 종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쿨만'에 의하면 이 찬송시 전체는 고전 15:45 이하와 롬 5:12 이하에 완벽하게 상응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의 배경 하에서만 이 찬양시가 올바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 찬양시에 묘사된 예수가 단지 하나님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똑같은 현상을 가졌다는 의미하고 설명한다. 때문에 그는 빌 2:7에서 '자기를 비어'라는 표현을 하늘 인간이 지상의 인간으로 되는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들의 견해는 개연성을 갖지만 예수가 지신을 비운 그 '비움'의 내용을 전혀 밝히지 못함으로써 타당성을 잃었다.
3) 전승사적 요소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와 승귀는 구약성경에서 '의인'의 순종과 비견된다. 때문에 '슈바이처'(Schweitzer)는 보다 폭넓은 구약성경의 지평 위에서 이 찬송시를 본다. 특히 그는 이 찬송시를 비하와 승귀라는 성경적 도식에 편입시켜 파악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구약성경에서 의인의 순종에 접목시켰다. 또한 그는 예수의 순종을 십자가상에서의 고난을 수용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바로 이 점이 구약성경에서 보여주는 완전한 순종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비하가 자기 자신을 낮춤으로써 올리워진다는 구약성경의 도식에 기반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점은 여호와의 종과 연결지음으로써 보다 명백해진다. 고난의 종을 그리스도와 연관지음으로써 그리스도론을 설명해 가는 학자로서 대표적인 학자가 '예레미아스'(Jeremias)이다. 그는 이 찬양시가 사 53장의 고난의 종 본문에 따른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사용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슈바이처'가 파악한 바와 같이 비하와 승귀의 도식, 그리고 그리스도의 자발성, 순종과 죽음의 언급들이 모두 구약성경에 종속된 단어들임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여러 가지 난제를 안고 있다. 우선 사 53장과 빌 2장의 중심 사상이 다르다. 또 비하, 승귀, 순종과 죽음이 사 53장에 종속된 단어들이라면 사상적인 유사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더욱이 빌 2장에서 사용된 단어들은 매우 일반적인 언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의 노래로부터 빌립보서의 그리스도론을 연역하는 것은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구약성경의 전승사적 유산을 신약성경이 분명히 받아들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어휘들이 나타난다는 점만으로도 구약성경과 빌 2장의 그리스도론은 분명히 어떤 연관을 갖는다 하겠다.
4) 이상과 같은 연구 결과에 따라 학자들은 빌 2장의 그리스도론과 찬송시가 바울 이전에 하나님의 전승군을 이루었던 것이 바울에 의해 채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바울서신 전반에서 발견되는 언어와 신학적 논거들을 비교 검토한 결과 바울의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물론 빌 2장의 찬송시에서 독특한 표현들이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바울서신들에서도 독특한 표현이 단회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여러 번 발견되는 점을 고려할 때, 몇몇 독특한 표현을 가지고 바울의 것이다 아니다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더욱이 표현의 장중성이나 운문성을 들어 바울의 것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로마서와 같은 장중하고 심오한 교리적 결정체를 무슨 수로 설명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바 신학적 논거라는 점에서는 일고의 가치를 갖는다. 즉 그들은 바울의 신학을 결정짓는 요소가 십자가와 부활의 도식인 반면 찬양시는 비하와 승귀라는 구약성경적 도식에 기반을 두었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그들이 비하의 도식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에까지 소급, 확대된 점은 바울의 신학적 논거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Kasemann). 이 점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세상의 주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상이 비록 없지는 않지만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상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바울 신학의 전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이 찬양시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원적 의미가 언급되지 않으며 구속되어야 할 교회 혹은 개인에 대한 전망이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찬미하면서 그의 구원론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인 '우리를 위해'라는 표현을 생략했다든지 교회에 대한 전망을 단념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주장에 따라 이 찬송시를 고찰한다 할지라도 이 찬송시를 비바울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면에서도 고려한 바이지만 신학적인 논거에 있어서도 바울은 언제든지 사상적 기조를 바꾸지 않은 채 여러 가지 양태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 구원론 등을 피력한 바 있기 때문이다. 곧 이러한 논거들은 개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졌던 것이지 바울 자신의 신학적 논거의 변화는 없었다. 따라서 이 찬송시에서도 바울이 비록 세상의 주에 대한 사상을 전면에 부각시켰다고 해서 비바울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욱이 바울에게서 비록 상대적으로 덜 나타나는 사상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주라는 사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란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2. 찬양시의 구조와 내용
1) 연의 구성
빌 2:6-11은 운문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을 지녔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운문적이며 독립적인 찬양시를 원래의 운율과 연에 맞게 재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로마이어'와 '예레미아스'의 재구성이 학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먼저 '로마이어'의 구성 양식을 살펴보면 그는 이 찬송시를 여섯 단락으로 세분하고 3연씩 두 부분을 내용상의 단락으로 나누었다. 그가 이같이 구분한 근거는 빌 2:8을 분수령으로 하여 전반부와 후반부에 각기 두 개의 접속사로 연결된 점을 들었다. 다음으로 '예레미아스'의 구성 양식은 성경문학에서 가장 쉽게 발견되는 평행법에 근거하여 구분하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즉 그는 '로마이어'의 연 구성을 비판하고 평행법이 결정적인 요소라는 가정 하에 네 개의 행을 가지는 세 개의 연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첫째 연에서 하나님을, 둘째 연에서 사람을, 그리고 셋째 연에서 현존 방식을 보여준다고 파악함으로써 이 찬양시를 완결된 하나의 찬송으로 보았다. 더욱이 그는 7절에 이미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암시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8절의 그리스도의 순종을 유도하였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연 구성에 있어서 보다 폭넓은 지지를 받는 견해는 '로마이어'의 구성 양식이다.
2) 찬양시의 내용
① 비하
본문의 주요 관심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활동해 들어오는 사건 쪽에 있으며 그것에 집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신적 본체와 능력의 현존 방식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찬양시의 출발점은 역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본질을 지시하며 이는 구약성경적 감각에 속한다 하겠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형상과 질료를 헬라적인 사유처럼 전혀 분리시키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통일체로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존재는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양식에 의해 규정되고 각인되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유일무이한 방식을 취한다 하겠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본성에 보다 가깝지만 본성과는 일치하지 않는 개념이며, 그리스도의 선재를 묘사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의 동등함으로 표현된 문맥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강력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맡기었다고 할 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부성으로부터 나오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유보된 권한을 결코 침범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순종은 이미 선재자이신 그리스도에게 고유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문제는 하나님과 동등한 선재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비하의 길을 어떻게 감당하셨는가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해 비평학자들은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인간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하여 비하의 길을 취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웠다'고 할 때 그것은 종의 형체, 곧 종의 현존 방식이라는 표현에서 보다 더 구체화된다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과 같은 형상을 취하셨다는 종결어로 비하의 길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의 비하의 길은 단순히 윤리적인 교훈을 주고자 하는 의도로만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비하의 길을 택한 것, 곧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만 설명될 수 있을 뿐더러 세상을 변화시키는 행위, 종말론적인 사건 이외의 것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하의 현존 양식은 어떠한가를 살펴보자. 이 찬양시는 하나님의 현존 양식에서 종의 현존 양식을 취한 근본적인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먼저 결정적인 신성 대신에 결정적인 종 됨이 나타난다. 놀라운 점은 곧장 인간 됨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종 됨을 먼저 말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종 됨의 현존 양식은 인간으로서의 현존이 종의 처지로서 이해되었다는 것일 뿐 구약 성경에서 지시하는 의인의 길은 분명 아니다. 따라서 종교사적인 맥락에서는 그리스도의 비하를 이사야서의 고난 받은 종과 결부시키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한다. 즉 이 찬송시에서는 그리스도의 비하를 '하나님-종'이라는 대립적, 대조적인 개념으로서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비하는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죽은 사건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 '틸만'(Tillmann) 같은 신학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겸손에 대한 귀감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한 결과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학자들은 지상적이며 우연적인 인간 실존의 제한성에 대한 실천적인 순종의 가장 강렬한 표현은 죽음이라고 보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그 한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낮춤의 주요 목적이 구원받을 개인 혹은 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단순히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오히려 바울의 신학에서 벗어난 것이 된다 하겠다. 하여튼 이 찬송시의 주된 주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승천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의 비하는 여전히 구원적인 죽음으로 파악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비하는 종말론적 구원 활동을 십자가로 구체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속 사건이라 하겠다.
② 승귀
찬송시의 9절에 이르러 대역전이 시작된다. 곧 자신을 낮춘 그리스도는 가장 낮고 깊은 지점으로서 무덤에 들어갔지만 그의 이름은 높여졌고 하늘과 땅과 땅 밑의 모든 자들이 그의 무릎 아래 꿇어 엎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승귀의 과정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의 승귀 과정에서 모호한 점을 드러낸다. 즉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생기는 모호한 점이 그것이다. 이 점에 대해 비평학자들은 '문체의 단절'이라고 파악한다(Gnilka). 하지만 이 점은 단순한 문체의 단절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상이한 두 표상 방법이 서로 융합된 형태라고 봄이 좋겠다. 물론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비하만큼이나 그리스도의 승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찬송시에서는 그 점을 회피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승귀 과정에서 하나님이 능동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올리워짐에 대한 공간 설정의 문제이다. 전제된 세계상에 상응하여 본다면 그리스도는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 높여진다. 그리고 그 아래 놓인 모든 만물들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종속된다. 이것을 이 찬송시에서는 이름을 높인다는 표상을 통하여 잘 드러내 준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 앞에 모든 무릎이 꿇리울 것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절대 주권을 가리키는 헬라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민족을 단순히 유대적인 구상 속에서가 아니라 우주적인 범위에서 찾는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즉 이 점은 바울의 이방 선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의 전 과정을 통하여 영광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이 부분은 이 찬송시의 '송영'(Doxologie)으로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하나님께 집중시키려는 바울의 의도가 깔려 있다(참조, 롬 15:7 고전 3:23; 11:3; 15:24). 즉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그리스도를 주로 세우심 안에서 정점을 이루는 구원 사건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3. 결어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하의 승귀의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존재의 단계(Praexistenz), 인간 존재의 단계(Menschsein), 그리고 승귀의 단계(Postexistenz)로 제시하였으며, 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 즉 그의 주된 관심은 지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구원 행동이었다. 사실 이 찬양시의 해석사를 통해 볼 때 많은 오해와 그리스도론에 대한 위협이 시도되었던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비롯한 이방의 성도들에게 제시하고자 했던 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그리스도 구원 사역이다. 따라서 이 찬양시에 대한 어떠한 위협적인 해석의 시도도 이 찬양시의 장중하고 직선적인 그리스도론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2000년의 교회사가 말해 주는바 이 찬양시의 기독론적 가치와 무관하지 않다. 비평학자인 '예레미아스'조차도 이 찬양시를 가리켜 '후대 기독론의 근거가 되는 가장 오래 된 문서'라고 불렀다. 또한 전통적인 학자들은 이 찬양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바울 교리의 표준 어구(locus classicus)라고 부른다. 그 만큼 이 찬양시는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교리에 근본적으로 중요하며, 그의 선재성과 성육신 및 승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는 점에서 고도로 발전된 기독론을 보여준다 하겠다.
II. 빌립보 교회의 적대자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영적 지침을 쓰면서 대적자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경계하였다. 그 하나는 유대주의자들을 조심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탐욕과 방종을 일삼는 쾌락주의자들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점에서만 보면 고린도후서에서 발견되는 바울의 대적자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빌립보서에서 바울 사도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적대자들 중에는 비그리스도교적 유대인들은 제외된다. 왜냐하면 빌립보 교회의 동요는 적대자들의 설교 내용이 그리스도로부터의 이탈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유대교에 사로잡힌 유대주의적 그리스도교로의 회귀를 꾀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는 유대적 그리스도교도들의 유대화 경향과 탐욕과 방종을 일삼는 쾌락주의자들 및 그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유대화 경향
빌립보 교회의 적대자들에게 있어서 유대화 경향은 뚜렷하게 드러났다(참조, 빌 3:1-3). 바울은 그들을 '개', '행악하는 자', '손할례당'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설교에서 할례를 주요 주제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식적이지만 유대교의 신앙 유산을 영예로운 것으로 자랑했고 그중에서도 할례를 가장 드러내놓고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바울이 자신도 똑같이 유대교 특권들을 지닌 자라고 밝히면서 그들의 형식적인 할례를 비난할 때에도 전제된 사실이 유대교 특권들을 지닌 자라고 밝히면서 그들의 형식적인 할례를 비난할 때에도 전제된 사실들이다(참조, 빌 3:4-7). 또 바울이 그들의 형식주의를 비난하면서 이스라엘과 히브리인을 언급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이 두 개념 모두 유대교의 설교에서 자랑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즉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교인들은 주변 세계와 대결하는 데 있어서 유대적 표상들, 관습들, 전통들을 옹호하며 이방 세계 청중들을 납득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적합하고도 유익한 무엇으로 전도해 나갔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유대적 전통들을 고집하고 자랑하면서도 이방 세계의 관습들을 합리적으로 수용하며 포교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과 히브리인이라는 개념은 흔히 경멸의 어감으로 사용되던 유대인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이스라엘 민족과 민족 종교가 지닌 정통성과 역사성으로 인해 이방 세계에서 호감어린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이 두 개념을 사용한 것은 유대인들이 갖는 편협한 선민의식을 질타하고 직접적으로는 그들의 교만을 비난하는 의도가 있었다. 하여튼 이 유대주의자들이 보여주는 형태는 단순한 선민의식만이 아니라 율법을 절대화한다든가 형식적인 제사 의식에 얽매이는 등 고후 11:12 이하에서 보여 지는 적대자들과 같이 극단적인 유대주의를 지향하였다. 한편 이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빌립보 교회에서 자생된 것은 분명 아닌 듯하다. 아마도 이들은 외부로부터 빌립보 교회로 들어왔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외부적으로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집단적인 부류로서 디아스포라 유대인계에 퍼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비록 팔레스틴과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으나 옛것을 되잡으려는 아집에 집착했다. 토라를 풍유적으로(Allegorisch) 해석하는 등 포교 방법에 따라 관리하였다. 바울은 이를 육에 신뢰를 두는 자들의 거짓된 신앙이라고 생각하였다.
2. 쾌락주의적 경향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을 경계함과 아울러 배를 자신들의 신으로 삼는 쾌락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권면하였다(참조, 빌 3:19). 여기에서 '배'는 육체적인 욕구를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쾌락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귀한 몸을 탐식과 방종에 버려둠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한편 학자들은 이 쾌락주의적 경향을 가리켜 영지주의적 영향이라고 생각한다(Gnilka, Bornkamm). 이들 비평학자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십자가와 부활로 부정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육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된 방종적인 도덕의식이다. 아직 빌립보 교회의 적대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결정지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설교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점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신인으로 선포한다는 점이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성보다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더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바울과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예수를 부인한다는 점이 아니라 지상의 그리스도를 영적 그리스도로 과대평가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의 근본적인 특징은 역사적인 예수와 영인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거부하고, 그 결과 계시의 역사적인 현실성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의 대적자들은 이 영지주의적 특징에 견주어 볼 때 그들이 영지주의자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지상 예수에 집중한 나머지 영적 그리스도와 부활을 부정한다 할지라도 영적 그리스도만을 부각시키는 영지적 설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영지주의자들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의 설교가 거짓 교훈이 아니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히 그들은 자기 스스로 이미 완성되었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열광주의자들과 쾌락주의자들을 완전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그들은 지상의 존재 방식과 천상의 존재 방식을 갈라놓는 곳에 위치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완전자라는 의식에 도취된 것이다.
3. 바울의 권면
유대화를 꾀하는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집함으로써 윤리적인 완전주의를 생각했다면 쾌락주의자들은 십자가나 계시의 현실성을 무시함으로써 현재의 삶 안에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간략하고도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곧 바울은 그들이 사용했던 '완전함'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5, 16)고 권면하였다. 물론 바울이 이러한 권면을 한 것이 적대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삶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진정한 완전함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인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언설은 적대자들이 추구하는 표면적이며 피상적인 완전함에 대한 충분한 반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이 권면은 적대자들에게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성숙은 부활과 십자가를 자신의 삶의 법으로 고백하는 마음 안에서 성취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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