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의 핏자국이 결국에는 폭죽 가루로 남았습니다>
영화 : 바다가 들린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가 과연 재미있을까?"에 대한 고민에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을 꺼리는 편이라, 영화의 아무 부분이나 재생하여 5분 정도 본 뒤, 느낌이 좋으면 영화를 시청한다. 영화 제작자에게 무례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본 영화 중에 재미가 없었던 것은 손에 꼽힌다. 이 영화도 같은 방법으로 보기 전, 아무 부분이나 클릭하여 재생했는데, 다짜고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뺨을 때리더니, 곧이어 남자 주인공도 여자 주인공의 뺨을 때리는 것이었다. 강렬한 인상 탓에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 날 저녁, 나도 다짜고짜 밥솥의 뺨을 때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영화를 시청했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의 강렬한 느낌을 감상문에 강렬하게 적으면 좋을 것 같아, 감상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영화는 1993년 영화로, 전형적인 일본풍의 영화이다. 성인인 남자 주인공 타쿠가, 20대 동창회에 가기 전, 자신의 고교 생활을 돌아보면서 영화의 도입부가 전개된다. 일본에서 도시와 시골의 경계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도쿄에서 전학을 온 여자 주인공 리카코가 "도쿄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로 전학 첫 날부터 조명 받는 것을 보아 타쿠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어느정도 시골 지역인 고등학교에 다닌 것으로 보인다. 리카코는 전학 오자마자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이들, 특히 남자 학우들의 시선을 끈다. 타쿠의 단짝 친구인 마츠노는 이런 리카코에게 한 눈에 반한 것인지, 혹은 그녀의 팔방미인과 같은 부분에 매료된 것인지, 타쿠에게 자신이 리카코를 좋아한다는 것을 밝힌다. 타쿠는 리카코에 대한 마음이 없으니 응원해주겠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리카코에게 끌리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수학여행에서 리카코와의 얘기에서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마음이 샘솟아난 타쿠는, 장난의 운명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비행기를 타기로 한 리카코의 친구가 사정이 생겨 리카코와 단둘이 해외여행을 하게 되고, 연이어 호텔에서 둘이 숙박까지 하게 된다. 허나 리카쿠는 일반적인 "연애"에 대한 개념이 타쿠와는 전혀 달랐다. 타쿠와의 지난 일들을 친구로서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겼고, 타쿠는 자신의 마음이 농락 당한 것만 같아 그녀에게서 정을 떼게 된다. 그러나 둘이 해외 여행을 간 사실은 리카코의 친구에 의해서 학교 내에서 일파만파 퍼지게 되고, 타쿠와 리카코의 소문은 급격히 안 좋아진다. 타쿠는 리카코를 찾아가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면서 따지며 싸우게 되고, 리카코와 타쿠는 사이 좋게 서로 뺨을 한 대씩 때리며 관계가 소원해진다. 이후 타쿠의 이미지는 점차 회복되는 듯 했으나, 리카코는 "남자를 후리고 다니는 여학우"의 이미지로 전락하게 된다. 어느 날 타쿠는 리카코가 여러 학우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모습을 발견하지만, 돕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리카코가 당당하게 여학우들을 일침하여 내쫓는 모습을 보고, 타쿠는 리카코에게 다가가 "멘탈이 강한 것 같다. 대단하다." 라고 말을 건넨다. 그러나 리카코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타쿠의 뺨을 한 대 때린다. 리카코는 때린 직후,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는 표정으로 당황하지만, 눈물을 훔치며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나고 리카코와 타쿠는 그렇게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고, 각자 졸업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 고교 동창회가 열리게 되고, 타쿠와 리카코는 거기서 만난다. 그러나 상처 뿐인 기억임에도 그 둘에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둘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동창회 이후 얼마나 지났을까, 지하철에서 타쿠와 리카쿠는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이후 영화의 막이 내린다.
요약하면서 스토리를 너무 막장으로 바꿨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스토리는 위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1900년대 후반의 학생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점, 또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문화가 반영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나 또한 영화를 보면서 스토리가 조금, 사람에 따라서 많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스토리보다는 전체적으로 스토리부터 결말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교훈에 중점을 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다툰 기억이 있고,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누군가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마저도 우리의 학창 시절이고 예전 이야기이고 추억이고, 나중에는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웃을 수 있는 거리가 된다. 만약 평생 다투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사소한 말다툼 하나에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해질 것이다. 허나 다퉈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 따위는 금세 털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울어봤기에 울지 않기 위해 애쓴다. 피를 흘린 기억이 있기에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허나 우리는 그 핏자국이라고만 생각했던 기억들이 사실은 폭죽 가루였음을 깨닫게 된다. 때가 한 번도 묻지 않은 하얀 디딤판을 밟고 올라서면, 내 신발에 묻은 먼지가 디딤판에 짙게 남는다. 어느 순간 디딤판에서 떨어지게 되면, 내가 디딤판을 밟고 올라가면서 생긴 먼지가 눈에 띄게 된다. 하지만 먼지가 자욱한 디딤판은 몇 번이고 올라갔다 떨어져도, 원래부터 더러웠으니 디딤판의 먼지가 묻는 것이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안 좋은 일들이 생기면, 폭죽 가루 만들었다고, 디딤판 좀 거칠게 썼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