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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8일(성령강림절 후 아홉 번째 주일)
고린도전서 10:23~24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 적 주제설교
김규태 목사
Where?
어느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하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BMW가 두 대나 있습니다.” “그래요? 시골에도 부자가 많나 보죠?”
“사실은 Big Mouth Woman(BMW)이 두 분 계신다는 말이에요. 그분들이 교인들의 삶에 어찌나 간섭하는지, 옷을 입는 문제에서부터 자동차, 집, 교육, 가정, 자녀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분들의 입방아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어요.”
교회마다 이런 분들로 인해서 큰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분들로 인해서 교회에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분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나름대로 논리도 있고 타당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비판을 잘하는 분들은 ‘다름’과 ‘틀림’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기준이 올바름의 기준이라고 착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삶의 배경과 성장 과정과 달란트와 주께 받은 사명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비판을 잘하는 분들은 이것을 도외시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되고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고, 기도해 줘야 합니다.
-출처: 한기채, 「산상수훈, 삶으로 읽다」(토기장이, 2021);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3년 11월호), 43쪽에서 재인용.
혹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의 잘못이나 부족함이 보인다면 어떤 태도를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재판관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형제에 가깝습니까?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과연 성도들이 우상에게 제사 지낸 고기를 먹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항구도시에서는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바다에 인접한 마을에서는 해마다 풍어제(豊漁祭)를 지냅니다. 사람들은 풍어제를 지내면서 한해 물고기가 많이 잡히고, 어부들이 안전하기를 빕니다.
고린도에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대규모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대부분 고기를 시장에 싸게 팔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방금 제사 지낸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를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금 전에 우상에게 제사 지낸 고기를 먹는 것이 좋습니까,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우리가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지기에, 우상의 제물이 나를 더럽힐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분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믿음이 장성한 사람들이고,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 자유 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What's Problem?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런 믿음과 자유를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던 습관이 있어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에 대해 자유 함을 가지지 못한 예도 있었습니다.
과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바울은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을 먹는 일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성만찬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일은 주님과 연합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할 때, 제단에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고전 10:18).
바울은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어찌 우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있으며,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할 수 있겠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쯤이 되면, 아마 여러분은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두 가지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쪽의 입장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받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의 입장은 음식을 먹는 일은 단순히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대상과 연합하고 참여하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들이 일치를 보지 못하고, 교회 내에서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학과 전통들이 존재합니다. 어느 것이 더 옳고 좋은지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문제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여러 요인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고, 다양한 성경 해석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선교 초기에 교회는 제사 문제로, 첩 문제로 세상과 갈등을 겪어야 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문제로, 후에는 사상문제로, 최근에는 동성애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의심 없이 믿어야 하지만,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판단의 근거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참고할만한 것들은 가령 이런 것들입니다. 과연 오랫동안 ‘교회 전통’은 이와 비슷한 문제를 어떻게 판단해 왔는지,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이죠.
또 우리는 ‘경험’이 주는 지혜를 존중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가 나에게 어떤 지혜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what?
데이 C 셰퍼트의 '세 가지 황금 문'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를 말할 때는 세 가지 황금 문을 지나야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 황금 문은 “그것은 참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참말인가? 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 문은, “그것은 필요한 말인가?”입니다. 아무리 참된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상황에 맞지 않고 불필요한 말이라면 가급 적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상황에 꼭 필요한 말이라면 우리는 용기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 문은 “그것은 친절한 말인가?” 하는 겁니다. 아무리 진실 된 말이고, 필요한 말이라도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전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말이 이 세 가지 황금 문을 지나왔거든,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하지 말고 분명하게 외쳐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세 가지 황금 문’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우리의 언어가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기보다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나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될 때, 결국 그 유익이 나에게로 되돌아오기도 하지요.
이 같은 원리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도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바울은 우상에게 재물로 드려진 고기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바울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인이 시장에서 고기를 산다면, 그것의 출처를 묻지 말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대부분 우상에게 재물로 드려지고 난 후 헐값으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땅과 땅 위에 충만한 모든 것은 우리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위해 고기의 출처를 묻지 말고 자유롭게 사 먹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어느 불신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우상에게 재물로 드려진 고기를 대접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경우라도, 그리스도인은 자기 양심을 위해 그것의 출처를 묻지 말고 먹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함께 식사하던 중에,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바울 선생님, 이것은 조금 전에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졌던 것인데 드셔도 되겠어요?” 만약 여러분은 그 질문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의 양심을 위해 그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를 먹는 일이 다른 사람의 신앙 양심에 걸림돌이 되거나, 교회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을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될 수 있으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에는 내가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윤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정죄하기보다는 그런 사람을 배려하고, 나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이유도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연세대에서 철학을 가르치시는 김형석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젊은 시절,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1942년 크리스마스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이분이 이부자리도 개지 않은 채 성경을 읽는 데 골몰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1~32, 공동번역)라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이분은 그 말을 몇 번 되풀이하여 읽다가, 낮은 책상에 성경을 편 채로 엎어 놓고 다시 자리에 누웠습니다. 이분이 그 말씀을 회상하며 정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잠시 후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층에 있던 친구였습니다. 그는 아직도 누워 있느냐며 앉을 자리도 변변치 않은 좁은 방에 들어오더니 낮은 책상에 걸터앉았습니다. 친구는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읽던 성경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는 “진리?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라고 중얼거리더니, “이렇게 자신에 넘치는 말을 누가 할 수 있지?”라고 반문했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그리스도니까 그렇지!”라고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이 둘은 함께 아침을 먹고 산책에 나섰습니다. 친구가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후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 친구가 “김형, 나도 교회에 나가야겠어요. 만일 예수께서 나에게도 진리와 자유를 약속해 주실 수 있다면 그에게로 가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친구는 평생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한순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진리와 자유를 찾고 있었던 그였기에, 그날 아침의 사건이 그의 일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김형석, 「예수를 믿는다는 것」(두란노, 2021);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4월호), 269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서 그들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결론은 명확해졌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지식 위에 사랑을 더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권리를 다른 사람을 위해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8:13).”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위하여 나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굳은 결심이 필요합니다.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은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how?
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전해드리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어느 주일, 찬양 시간에 나는 맨 뒤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심한 분노와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배 방식이 너무 저속하고 미국 남부식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예배 방식은 뉴욕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면 아무도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찬양 팀을 향해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인정의 우상이 내 삶에서 성령을 소멸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나를 깨우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느껴졌습니다.
“이건 네 교회가 아니라 내 교회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만을 하면 내가 하려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너희 교회가 뉴욕 시민들에게는 존경받겠지만 내 눈에는 차지 않는 교회가 될 것이다. 내 말씀보다 뉴욕의 문화적 취향을 더 따르는 교회가 될 것이다.”
실로 충격적인 꾸지람이었습니다. 너무도 생생한 느낌과 그 음성에 담긴 진리를 통해 내 눈이 열리며 내 안의 왜곡된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우상이 문화적 우상들과 결합하여 우리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깊이 회개하고서 마음속 그 우상을 부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포기하면서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회개한 덕분에 성령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뒤로 인정의 욕구에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우상의 힘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내 마음속에 자리한 더 큰 목소리와 더 큰 책임이 그 우상의 힘을 흩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분을 올바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욕구입니다.
-출처: 존 타이슨, 「선한 능력, 아름다운 저항」(두란노, 2022);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3년 11월호), 87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옳은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먼저 구하셨습니다.
우리의 갈망은 주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갈망은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갈망은 형제의 덕을 세우고, 형제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더 알아가기를 갈망하게 될 때, 우리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는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형제를 용납하고,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섬길 능력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