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이 끝나고 민주당은 야당의 길로 들어섰다. 나눠먹을 게 많았던 여당이 아니었지만, 야당으로 들어서도 계파 간의 갈등은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됐다. 이 때문부터 민주당은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통합’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떻게 통합하든 이해관계가 상이한 각 계파들은 언제나처럼 갈등의 모습을 보여왔고 당은 언제나 무기력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였다. <편집자주>
분열된 당 그대로 다시 합쳐놓은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당끼리 다시합체 ‘통합민주당’…계파갈등 잠재
손학규까지 영입해서 이념스펙트럼 굉장히 넓어져
계속된 선거패배에 계파충돌…심각한 ‘추태쇼’까지 [주간현대=김범준 기자] 노무현 정권 말기 열리우리당은 극심한 계파갈등으로 큰 내홍을 겪으며 일부 세력들의 탈당 러시가 시작된다. 새천년민주당 탈당쇼를 벌여 만들어진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또다시 탈당쇼를 벌인 것이다. 이렇게 생긴 당이 또 다른 제1야당 분열의 상징 ‘대통합민주신당’이다.
이름뿐인 ‘대통합’ 이름은 ‘대통합민주신당’이지만 이 당은 전형적인 ‘모래알’ 모임이다. 창당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태생자체가 계파갈등으로 무너진 당을 다시 합쳐놓은 꼴밖에 안 됐기 때문이다.
먼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였던 김한길파(23명)가 2007년 2월 탈당, 이후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원내교섭단체)을 구성했다가, 4월 국민중심당 일파였던 신국환 의원과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이때 김한길파 23명 중 6명이 창당에 반대하여 중도이탈, 신국환 의원에 막바지에 합류한 유필우 의원 등을 더하여 간신히 원내교섭단체 20석을 형성한다.
이후 이인제를 받아들인 민주당과 함께 6월 말 합당하여 중도통합민주당을 만들었으나, 7월 말 김홍업 등이 탈당하고, 다시 8월 초에는 김한길파가 도로 탈당하면서 중도통합민주당은 도로 민주당으로 돌아갔다.
바로 탈당 이틀 후인 8월5일 열린우리당과 중도통합민주당의 탈당파, 손학규 세력 등이 결합하여 창당한 것이 바로 대통합민주신당이다. 보름 후인 8월20일 자신들이 탈당했던 열린우리당과 도로 합당하며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진수를 보여줬다. 문제는 이들도 돌고돌아 결국 다시 모이게 될 걸 알고 이랬다는 것이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계파갈등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열린우리당이 가만히 있는다고 뭔가 바뀔 상황이 아니었다. 당원의 구성이나 형태가 열린우리당의 후신, 통합민주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위치이며 실제로 비슷하다.
이 같은 ‘기이한’ 연속 탈당쇼로 인해 초대 한국 민주당의 계파가 부분적으로 2008년 통합민주당에 들어갔다. 족보상 한국 민주당의 계파를 이어받으려고 벌인 일이란 설이 있을 정도로 기이한 연속된 탈당쇼였다는 평가다.
17대 대선의 예정된 대패로 역대 대선 최대 격차, 민주당계 후보 최소 득표 등의 대기록을 세웠다. 실제로 대선후보로 나섰던 정도영 후보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출구조사 발표가 나오는 순간 더 지켜볼 필요도 없이 게임이 끝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고, 거의 득표율 예상치가 두 배 차이까지 벌어졌다. 한편 민주당으로 독자출마한 이인제 후보 역시 득표율 1%도 기록하지 못하며 그야말로 굴욕을 당했다.
문제는 통합을 외친 ‘대통합민주신당’도 그 짧은 기간 동안도 경선갈등 등으로 크게 몸살을 앓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짧게 존속한 여당(6개월)이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입당한 적은 없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온갖 이합집산과 내부·외부 분열을 거듭한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재창당했고, 최고 파벌을 형성한 정동영이 17대 대선에 출마해 기록적인 참패를 당해버렸다. 또 다른 야권의 한 축이었던 새천년민주당에선 이인제가 후보로 나섰다가 더욱 처참한 지지를 기록했다. 이에 대선 때 무산되었던 합당협상이 오간 끝에 결국 2008년 새천년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은 합당, ‘통합민주당’으로 거듭났다.
또 다시 외친 통합 하지만 통합민주당으로의 합당은 더욱 많은 계파 분열을 의미했다. 당시 민주당 내부에서는 과거 열린우리당을 주도했던 개혁적 중도 세력들과 새천년민주당을 주도했던 중도 보수 세력, 한나라당에서 탈당해 온 인물들 등이 공존하고 있어 진보와 보수가 뒤엉킨 상태였다.
특히 당의 주요 인물인 손학규 전 대표 또한 보수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던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온 인물이라 당의 성향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사실 이런 다양한 출신 성분이 새천년민주당 이래 민주당계 정당의 오랜 갈등 원인이었다.
당시 당의 주요 계파를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정세균을 필두로 한 486 지도부 계열 ▲정동영을 맹주로 한 전북 출신 + 이종걸을 위시한 개혁성향의 정동영 계파 + 천정배 등 비주류 개혁파 ▲범친노계열(안희정·이광재·백원우·조정식 등) ▲구 새천년민주당계 세력(추미애 등) ▲한나라당 탈당파를 포함한 손학규계 세력 등등 복잡한 스펙트럼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알력이 심한 것은 정세균 계파와 정동영 계파인데, 재보궐 선거 당시 정동영의 비공천과 그에 따른 무소속 출마 강행 이후 더욱 골이 깊어졌다. 정동영 의원 계파는 열린우리당 당시 김근태 계파에 비해 보수적인 계파였으나 맹주인 정동영의 입장변화에 따라 가장 진보적인 계파가 되었고, 이종걸이나 천정배 계파와도 손을 잡게 되었다. 반면 정세균 계파는 486과 범 친노와 좀더 접점이 있었다. 당시 양대 계파였던 김근태 계파는 18대 총선의 수도권 대규모 낙선으로 세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이처럼 수많은 이념이 다른 계파가 모인 통합민주당은 이념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었다. 강령 역시 ‘중도 개혁주의’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등으로 좌충우돌했으며, 같은 지도부와 같은 구호 아래 내용이 변한 것들도 있다. 때문에 “민주당에 이념이 어디있는가. 계파만 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큰 틀에서 중산층과 서민, 중소기업을 대변하고 햇볕정책에 우호적이며, 호남에 기반을 둔 개혁적 자유주의 정당이라는데는 큰 이론의 여지는 없다. 위의 논쟁도 보통 자유주의를 좌우 구도에서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가깝다.
결국 이 같은 계파정당 행보를 이겨내지 못한 통합민주당은 18대 총선에서는 충북에서 선전했으나 수도권의 뉴타운 바람으로 81석에 그치는 참패를 했다. 이는 한나라당이 얻은 153석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되는 기록적인 패배다.
이에 2008년 8월 패배 수습을 위해 당명을 짧게 줄여 민주당으로 변경했다. 2010년 현재 지도부와 의원층 지분은 구 열린우리당측과 구 민주당 측 간에 6:4~7:3 정도로 나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갈등의 흔적은 치유되지 않았으며, 민주당계의 정통성을 두고 다투었던 상대와 같은 당에서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세력들이 빠져나갔다.
대표적으로 2010년 유시민을 위시한 친노계 신당파(국민참여당)와 한화갑의 구 동교동계 일파(평화민주당)가 전직 대통령들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이탈했다. 민주당에 잔류한 인사들은 이 같은 분당적 행보를 적대적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며, 친노계 사수파와 잔류 동교동계는 이들에 대해서 더 부정적이었다.
잠깐의 단결 ‘지방선거’ 2010년 6월2일 치러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무상급식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지지를 호소했으며,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등과 추진한 야권연대(진보신당은 제외)가 효과를 거둬 큰 승리를 거뒀다. 다만 서울시장과 경기지사에서 패배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절반의 승리, 미완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도지사선거에서 친노파들이 승승장구한 데다 전라도 지역당에서 충청도, 경상남도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에서 친노 계열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예상외의 대승이라 지지세력들은 이 결과로 민주당이 자만에 빠져서 또 망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 생겨났다. 결국 6·2 지방선거 이후 비주류들은 당의 혁신을 부르짖으며 정세균 대표와 각을 세웠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은 지방선거의 승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미래를 대비하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정부만 때리면 되겠지’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당내 계파갈등도 지속적으로 불거져 정세균 대표 등의 주류세력과 그 외 비주류세력의 미묘한 충돌은 지속됐다.
이 때문에 지방선거에 방어전격인 7·28 재보궐에서 대참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원래 민주당이나 야당의 지역구였던 지역(서울 은평구, 충주, 인천)들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간신히 텃밭인 강원도 원주와 태백. 영월, 광주 남구만 건진것. 그나마 광주 남구도 비 민주당 단일후보로 나선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맹추격을 당해 겨우 몇 천표차로 신승 하는 ‘부끄러운 승리’도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정세균 대표는 책임을 지고 8월2일 대표직을 사퇴했으며 민주당은 10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치열한 당권경쟁이 불붙었다. 그동안 은둔 중이던 또 다른 계파 수장들 손학규 전 대표와 정동영 의원이 전면에 나섰으며 그외에 천정배, 박주선 등 여러 인사가 출마를 선언했다.
2010년 10월3일 인천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후보가 1위로 당선되어 새 대표가 되었고 정동영, 정세균이 그 뒤를 이었다. 정동영은 이로써 일시적으로 부활했으나 결국 강령에서의 ‘경제민주화’ 논쟁 주도를 제외하고는 의미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세균은 큰 세력의 후퇴를 절감했으나 또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2011년 4월26일 있었던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최대 승부처로 꼽힌 경기 분당을에서 손학규 대표가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권교체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10월26일 하반기 재보선에서는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밀려서 제1야당이 서울시장 후보도 못내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산산이 부서진 단합 이는 유권자들이 지리멸렬한 민주당을 뽑아주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여러 선거에서 민주당 독자로는 당선이 어렵다라는 것이 판명되면서 2010년 지방선거 이후로 분출된 야권 대통합 논의가 2011년 10월26일 재보궐 선거 이후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2011년 11월22일에 한미 FTA가 한나라당의 단독 강행처리로 통과되면서 민주당은 독자적으로는 사실상 산소호흡기를 뗐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간 공언한 것과는 달리 결사반대하던 FTA 통과를 막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유효한 협상 결과를 얻어낸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손학규 대표는 야권 대통합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친노 출신 시민단체인 ‘혁신과 통합’ 등과 야권 통합에 합의했다. 이는 결국 지방선거에서 승리공신 1순위 였던 친노계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의미였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는 박지원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민주당 단독 전당대회를 개최해 새 지도부를 구성한 뒤에 야권 통합논의를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주당 중심의 야권통합 추진론이 일었지만 손학규 대표의 강공 드라이브에 점점 묻히게 되었다. 당내에서 이런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겉으로는 60년 민주당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결국 계파 갈등이다.
불완전한 통합 문제의 12월11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말 그대로 ‘개판 오분전’ 그 자체였다. 통합 반대파들은 투표 자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과거 새천년민주당 시절 유시민을 폭행한 걸로 유명한 ‘난닝구 사건’의 주범이 재등장하여 쇠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또한 한 반대파 당원은 인분을 퍼붓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 왼쪽부터 이인제 의원·정세균 전 대표·박지원 전 대표. © 주간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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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투표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의결 정족수 논란으로 개표결과 발표가 몇 시간 중단되고 전당대회장에서 당무위원회가 열리는 초유의 사태 끝에 통합이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반대파들은 무효소송을 내었으나 무산되었다. 이에 역설적으로 12월11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민주당이 왜 사라져야 하는지 가장 잘 보여준 한바탕 쇼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 같은 ‘추태쇼’를 보여준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통합움직임을 시작했다. 2011년 12월16일, 민주당과 시민통합당은 공식적으로 합당을 결의했으며, 민주당, 혁신과 통합(시민통합당), 시민단체, 한국노총, 창조한국당과 국민참여당의 진보소통합(통합진보당 결성) 반대파들이 모여서 원샷으로 통합 전당대회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임시로 붙여진 이름은 ‘민주진보시민통합정당’ 이었다.
당초 일각의 민주당부터 진보신당까지 야5당의 전면통합은 민노·국참·진보신당 탈당파가 선을 그어버리면서 통합진보당의 창당으로 물 건너간 셈이고,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창조한국당은 결국 빠졌고, 탈당한 유원일 의원도 19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결국 민주당은 마지막 최고위원 및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합당을 결의하면서 2008년 대통합 민주신당과 새천년 민주당의 통합으로 생성된 민주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012년 1월 15일 신당의 전당대회를 개최해 새 통합신당의 지도부를 선출되었다.
물론 새 통합신당의 당명이 민주통합당 민통당으로 결정되어 약칭 민주당이라 했다. 이로써 60년 전통의 민주당은 계속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같은 어설픈 통합으로 계파갈등 불안요소는 남아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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