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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48
1월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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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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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Pjc1fC0Y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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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무렵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근사한 설렁탕집>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습니다. 점심을 한 끼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뺑뺑 돌아다녀도 문을 연 음식점이 없더군요. 아이들은 보채고, 큰 마음먹고 한번 쏠려고 했었는데...
"이를 어쩌나? 집에 돌아가서 라면이나 끓여야 하나?"하고 고민하던 중에 아이 하나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는 근사한 설렁탕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우리는 로또복권에 당첨이라도 된듯이 크게 떠들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눈치 없는 한녀석이 "신부님!" 하고 크게 소리치다 보니 사장님이 제 신분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불쌍하게 생긴 아이들 얼굴과 그에 못지 않은 제 얼굴을 연신 바라보시던 사장님은 크게 선심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저희 앞에 놓여진 음식을 보고 저희는 깜짝 놀랐습니다. 옆 식탁과는 완전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밥도 꾹꾹 눌러 담아주셨지만, 설렁탕 그릇 밑에 깔린 고기의 양이 벌써 달랐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큰 파전까지 하나 서비스로 주셨는가 하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10000원이나 디스카운트를 해주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죄송했지만, 불쌍한 저희들을 위해 각별한 마음을 써주신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열심히 기도하신 다음, 당신의 구원사업을 협조해줄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평소에 눈여겨 보아두셨던 사람들 명단을 몇 배수로 뽑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심사숙고를 거듭하십니다.
그것도 부족했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산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사업에 잘 협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식별하기 위해 밤새워가며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가련한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 "측은지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은 덕중의 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지심으로 우리가 구원됩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덕 역시 측음지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영육간의 고통들, 영육간의 배고픔과 목마름, 좌절과 한계, 너무도 무거운 십자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십니다. 하루 온 종일, 당신 백성을 향한 구원사업에 매진하십니다.
밀물처럼 다가오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단 한명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다 대면하십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 눈물 흘리시고 잘 해결되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청하십니다.
당신 홀로 힘으로는 중과부적임을 절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자질을 똑같이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우리의 협조를 강력히 요청하고 계심을 저는 강하게 느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의 두손이 되어드리고, 두 발이 되어드리는 하루이길 빕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되어드리고, 주님 기적의 능력이 되어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가진 바를 기꺼이 내어놓고 나누는 하루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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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훌륭한 리더는 조직체계를 만든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qElDm87cP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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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리더란 첫째,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옳은 신념을 굽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편애하지 말아야 합니다. 편애는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는 가장 무서운 행동입니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는 ‘시스템을 만드는 리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어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났을 때 짓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시스템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 수도회를 세운 것과 같고, 마더 데레사도 사랑의 선교회를 세운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이어갈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리더가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역량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는 리더가 사라지면 금방 와해됩니다. 또 리더가 아무리 카리스마가 넘치더라도 혼자 힘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끌 때 처음엔 혼자 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장인이 와서 모든 백성의 송사를 본인 혼자 다 처리하려 하지 말고 그 권한을 천 명, 백 명, 오십 명, 열 명에 해당하는 리더를 뽑아 그들에게 맡기라고 충고합니다. 모세는 그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훨씬 편하게 좋은 결과를 얻어냅니다.
사람은 한 조직에서 참모형이 있고 리더형이 있습니다. 참모형 리더는 참모로 있을 때는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자신이 모든 일을 다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참모들은 뒷짐만 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두세 사람이 합친 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반면 리더형 인간은 남 밑에서 일을 할 때도 리더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최선을 다하지만, 지도자가 되면 훨씬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유비와 제갈공명을 예로 들자면 유비는 리더형 인간이고 제갈공명은 참모형 인간입니다. 유비가 만약 남의 밑에 있었다면 그는 중간급 정도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조라는 엄청난 사람이 판치는 곳에서 한 나라의 왕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실력으로는 제갈공명이 더 뛰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 뛰어난 것에 비해 사람들을 일치시킬 능력이 부족했음을 알고 유비의 대를 이어달라는 청을 거절합니다. 만약 유비와 제갈공명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삼국지의 이야기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야 많이 있겠지만,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과 사장실장인 시마 사토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손정의 사장은 비전을 제시하고 무작정 나아갑니다. 그래서 무모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이 중간에 시마 사토시는 그 무모한 도전을 시스템화하여 전략을 짭니다.
예를 들어 손 사장이 몽골에서 일본으로 전기를 끌어오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 시마 사토시는 중국 시진핑 주석을 만났고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대선 후보인 박근혜 측근, 문제인, 안철수까지 다 만나고 다녔습니다. 보스가 꿈을 꿀 때 그 꿈의 실행 계획을 짜주며 일반 직원들도 그 꿈이 황당무계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참모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손발이 잘 맞으면 못할 게 없지만, 참모 스타일이 지도자가 되고 보스 스타일이 참모가 되면 손발이 맞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참모도 되고 리더도 되어야겠지만, 리더가 되었을 때 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온 예화를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마을 촌장이 물을 공급해주는 사람과 계약을 원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딱 2명 하고만. 에드가 먼저 땄고, 신이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며 두 개의 양동이로 호수에서 물을 날랐습니다. 빌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드는 경쟁자가 없어서 더욱 신나게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빌은 양동이 두 개 대신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자 네 명을 모으고, 일할 사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달이 지나고 건설 팀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동안 빌의 팀은 아주 두꺼운 강철 송수관을 건설해서 마을과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빌은 일을 하건 안 하건 매일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에드는 평생 일만 했고 겨우 먹고 살았습니다. 이야기 끝.
에드와 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하려는가, 아니면 시스템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을 뽑아 교회라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개인의 힘만을 믿는다면 그건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 자신 밑에 있는 사람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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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정을 시작하시며 열둘을 부르시어 당신의 모든 제자들 가운데 그들에게만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대로(1,34.39)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 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12 제자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고, 세관원도 있으며, 혁명당원 즉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그리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음 사람들이 있다. 마치 구약에서 성조들이 시련을 이겨냈을 때,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과 같이, 즉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마태오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라고 한 것은 그 회개의 표시로 자신의 이름에 세리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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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열두 사람을 뽑아 당신의 제자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깊은 친교를 나눕니다. 열두 제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똑똑하지도 않고, 이른바 ‘스펙’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을 성숙시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성격이 급하고 또 어리석으며, 어떤 때는 현세의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친교를 통하여 죄의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배웁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 죄를 지은 베드로가 우리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사람임을 알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의 고향을 떠나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주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어떤 합당한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가득한 마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과 회개와 뉘우침 그리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현실적 삶의 풍요로움과 마음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더욱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신자들은, 미사 전례 때 참회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통하여 매번 파견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은총이고 감사기에, 미사의 마지막에 하는 응답으로 이렇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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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도>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면서, 그 교회의 주춧돌로 삼기 위해서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4)
1) 열두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뽑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특별한 ‘장점’과 ‘자질’이 있었기 때문에 뽑으셨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 사랑, 희망, 희생정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 열정 등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뽑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열정(뜨거움)입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함’을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이 말씀은 뜨겁든지 차든지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미지근한 것은 찬 것과 같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뜨겁지 않은 것은 모두 찬 것입니다.) 사도들은 대단히 열정적인(뜨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아도 그렇고, 그들의 죽음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도 바로 그 ‘열정(뜨거움)’입니다.
2) 사도들에 관해서 말할 때,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들의 부족한 점, 실수, 잘못 등을 언급하면서 그들도 우리처럼 부족하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만 말하고 그들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는다면, 또 사도들을 세속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대단히 불공평한 일이고, 의도적으로 사도들을 깎아내리는 죄가 될 뿐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사도들의 부족한 점, 실수, 잘못 등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그들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들도 자신들의 부족한 점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고, 결국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3) 사도들의 직업, 학력, 출신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부러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업, 학력, 출신 같은 것은 보지 않으시고, 사도가 될 만한 자질만 보시고 그들을 뽑으셨습니다. 좋은 예가 마태오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직업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자질만 보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고, 그것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과 집착은 특정 직업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4)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배반자 유다 대신에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의 장면을 보면, 바로 그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열두 사도의 임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는 임무’입니다. 이 증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증언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일도 복음 선포에 포함됩니다.)
5)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가 배반자가 되어서 사도단에서 탈락한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잘못 뽑으셨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것이 원래 하느님의 계획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도 사도로 뽑힐 때에는 분명히 뽑힐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탈락한 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일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끝까지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모두 순교했는데, 그것도 그들 자신들이 선택한 일입니다.) 순교자가 되든지 배반자가 되든지 간에 아무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은 각 개인이 각자 스스로 선택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배반자가 지옥에서 겪는 고통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후회’와 ‘절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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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교황님께서 성탄 미사를 봉헌하면서 코로나19 백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신은 부유한 나라의 국민에게만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공기를 모두가 공짜로 이용하듯이, 햇빛을 모두가 공짜로 받듯이, 바람을 모두가 공짜로 느끼듯이 백신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무료로 백신을 맞도록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작은 연못이 있었습니다. 연못 속에는 붕어가 두 마리 살았습니다. 어느 날 붕어는 서로 싸우고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물은 더러워졌고, 결국 연못에는 한 마리의 붕어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분명히 보았습니다. 바이러스는 여권이 필요 없었습니다. 바이러스는 국경도 필요 없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멀리 이동하였습니다. 우리 모두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 백신은 공공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7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법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례성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이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사입니다. 견진성사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 신앙이 깊어져 열매를 맺는 성사입니다. 고백성사는 허물을 벗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일치의 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성사입니다. 혼인성사는 하느님의 축복 속에 성가정을 이루는 성사입니다. 신품성사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제를 선발하는 성사입니다. 충실한 성사생활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켜주는 강력한 백신입니다.
교구 성소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후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단, 감실, 성작, 성합, 제의와 같이 전례에 필요한 성물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의자, 컴퓨터, 세탁기, 운동기구와 같이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기숙사를 축성할 때 후원자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기숙사 현관 입구에는 후원자들의 명단을 적은 동판을 만들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에, 자선과 나눔을 한 사람들의 명단에, 누군가를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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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강검진’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작년에도 건강검진을 받았고 대체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시력, 청력이 조금씩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위에도 염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꾸준히 운동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과음이나 과식을 하지 않으면 나름대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국교회에 대하여 ‘건강검진’을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굳이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셔도 우리는 현재 한국교회에 대해서 나름대로 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인 청년, 학생들이 교회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청년들에게 교회가 큰 매력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공부 때문에 바쁜 것 같습니다.
10년 후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일미사 참례 비율입니다. 예전에는 70%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10년 후에는 17%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의 재정을 살펴보면 이웃을 위한 나눔이 적다고 합니다.
국립 현충원에는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에는 각자의 이름과 직책 등이 적혀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동작동에 있는 국립묘지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하얀 비석에 검은 글씨로 이름이 적혀있는 묘비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것이 참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얼마 전 큰 병원에 갔었습니다. 병원 현관에 병원 건립을 위해서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에, 자선과 나눔을 한 사람들의 명단에, 누군가를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운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잊고, 모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4번에 걸친 커다란 박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교우촌을 이루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저에게도 신앙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매일 기도하였고, 주일 미사는 꼭 참례해야 했고,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에는 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증언한 분들입니다. 오늘 나는 어느 자리에 서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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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은 늘 먼저>
마르코 3,13-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그분은 늘 먼저>
내가 원하는 그분은
나를 먼저 원하시는 분
내가 사랑하는 그분은
나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
내가 믿는 그분은
나를 먼저 믿으시는 분
내가 찾는 그분은
나를 먼저 찾으시는 분
내가 부르는 그분은
나를 먼저 부르시는 분
내가 함께하는 그분은
나와 먼저 함께하시는 분
나를 보내시는 그분은
나보다 먼저 가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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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이유를 아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언행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기 시작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유심히 보시고 마음에 두신 열두 명을 뽑아 제자로 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운 목적이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 3,14-15)
바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고 열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셨고 이런 목적에 부합되게 제자들을 실습시키시고 파견도 하셨습니다.
마르코 복음 6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원래 뽑은 목적대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하시지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6,8-9)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파견된 제자들은 돌아와서 그에 걸맞는 결실들을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10,17)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셨는데 제자들이 말씀은 전하지 않고 딴짓만 하다가 돌아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당부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
그 말씀의 실천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안티오키아, 터어키, 그리스, 로마, 아시아 그리고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서 우리에게까지 이렇게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당부하셨지만 제자들에 의해 말씀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뜻을 살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단지 나의 수신과 내 마음의 평화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살고 그 말씀이 너무 기쁘고 복되어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온 세상에 말씀을 전하는 것, 이것이 세례를 받는 목적이며 세례를 받은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신자들을 도와주며 미사 전례 중에 하느님을 만난 신자들을 파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복음의 선포로 귀결이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언행 속에서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체험입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무서움에 숨어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뜨겁게 만날 수 있었지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2000년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발걸음에 성령이 함께 하셨고 또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끝도 없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역사인 것이지요.
그러면 성체 안에서 만나는 주님, 그리고 말씀 안에서 체험한 주님을 실제로는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복음을 전하면서 만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사가 끝나면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사제는 신자들을 파견합니다만 신자들은 입으로만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그것으로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님이 내 삶과 가정과 사회 속에서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을 전하지 않는다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주님의 몸을 모시는 미사 전례가 다 끝나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묻는 여러분에게 저는 언제나 이렇게 제시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또 파견하셨듯이 여러분들을 파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로서의 첫째가는 사명인 복음 선포를 위하여 노력할 때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올 일 년 동안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는 명확한 답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적어도 일 년에 한 명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하느님의 말씀이 내 삶을 움직이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하였다면 어떻게 그런 분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함으로써 그분은 더욱 크게 살아 움직이고 살아 계신 주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도 함께 주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축복의 근원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의 참 자녀로 거듭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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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종주 베드로 신부님]
오래 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살인범 유영철에 관한 일들을 기억하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어렵게 자라 부유층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과 한 여성에 대한 배신감을 연쇄 살인이라는 그릇된 방법으로 표출했던 우리 사회의 가슴 아픈 사건이었지요.
그런데 이 연쇄 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팔순 노모와 부인, 그리고 4대독자인 아들을 모두 잃은 분이 한 분계셨습니다.
이 분은 수원교구 고정원 루치아노 씨로, 얼마 남지 않은 아내의 회갑 선물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가 유씨에 의해 가족이 무참히 살해된 현장을 목격하고 분노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런 그분이 몇 해 전 유영철이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며 경찰청에 그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보내고 현재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사형의 부당성에 대하여 호소하고 계십니다.
루치아노 씨가 보통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이런 관용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세례를 받게 된 후부터였다고 합니다. 영세 후 그분의 마음에 서서히 ‘용서해야겠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후 ‘유영철도, 또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며, 그 뒤론 사형제도 폐지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아 악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뽑으신 열두 사도는 선을 통하여 악을 바로 잡는 사람들입니다. 그 선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기까지 보여주신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기 위하여 제자가 되었다면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으로 갚아야 할 것입니다. 루치아노 씨가 우리에게 보여준 하느님의 뜻도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감옥에서 루치아노 씨의 탄원서를 접하고 감동하였던 유영철 씨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죄의 편지를 루치아노 씨에게 보내었습니다.
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다음 생엔 성직자로 태어나 봉사만 하는 삶을 살고 싶군요.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사는 삶도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걸 많이 느끼곤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연쇄살인범의 고백이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회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 저희들도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제 것 우리를 지배해왔던 악으로부터 탈피하여 선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이는 더 나아가 다른 이웃들에게도 선으로 대하겠다는 결심을 요구합니다.
악으로 갚은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갚음으로서 한 사람의 회개를 이끈 루치아노씨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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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사회 심리학 교수 폴 피프(Paul Piff)는 ‘모노폴리’를 이용한 실험을 했습니다. 모노폴리는 주사위를 던져 판 위를 이동하며 도시를 사고 건물을 짓는 보드게임입니다. 솔직히 이 게임을 잘 모르겠지만 설명을 들으니, 저 역시 어렸을 때 많이 했던 ‘브루마블’ 게임 같은 것 같습니다.
그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동전을 던져 소위 ‘금수저’ 참가자와 일반 참가자로 나누었습니다. 금수저 그룹은 일반 그룹보다 두 배에 달하는 자금을 받았고, 보드판을 한 바퀴 돌아 출발점을 지날 때마다 받은 보너스도 두 배였습니다. 그리고 주사위도 두 배로 더 던져서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는 혜택도 주어졌습니다. 과연 어느 팀이 이겼을까요?
당연히 금수저 그룹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게임 후 승리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머리를 잘 써서.”, “특정한 부동산을 잘 구매했기 때문에” 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받은 특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당연히 받고,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받은 혜택은 당연하고, 좋은 결과가 일어난 것은 자신이 잘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반대로 나쁜 결과를 얻게 될 때는 운이 없거나, 다른 누구 때문이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부정적 생각과 긍정적 생각 때의 뇌 혈류량을 측정해보니, 긍정적 생각을 할 때의 뇌 혈류량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받은 특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지금의 나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기에 지금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과 재주 때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하느님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파견으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받아서 주님처럼 놀라운 표징을 세상에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남들보다 많이 공부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많은 봉헌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제자들은 교만하지 않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착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고, 순교의 길을 행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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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데이비스 대학의 심리학자 로버트 에몬스는 192명의 학생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A 그룹은 기분 나쁜 일에, B 그룹은 감사한 일에, C 그룹은 일상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일주일 뒤, B 그룹의 행복도가 가장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혹시 몰라 1년 동안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결과는 역시 B 그룹의 행복도가 제일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B 그룹은 질투를 느끼거나 신경질을 내는 경우가 줄었고, 좌절감을 겪는 일도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질투, 신경질, 좌절감 등... 우리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좌절을 헤쳐나갈 힘은 눈앞의 시련에 감사해 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솟아납니다.
감사를 하면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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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남철에 쇳가루가 붙어있듯>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는 말씀대로 입니다.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새워 기도하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 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 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써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 사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주어집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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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聖召의 신비>
-주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신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그림처럼 묘사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다.’는 서두의 대목도 깊은 묵상 자료가 됩니다. 여기서 택한 강론 제목 ‘성소의 신비-주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신다-’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는 것은 호숫가에서 하시고, 기도하시거나 당신 제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하실 때에는 군중에게서 떨어져 산으로 오르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산과 호수 사이임을 봅니다. 참 상징성이 깊습니다.
산이 참 많은 나라 한국이요 산이 들어가는 지명도 많습니다. 제 경우만 해도 예산禮山의 봉산鳳山이 고향이고 중고등 학교는 덕산德山에서 나왔습니다. 예禮와 덕德의 고향이라 해서 예산, 덕산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고향도 예산입니다. 얼마 전 감동깊게 읽은 추사 김정희 평전이었습니다. 책 표지의 글귀도 잊지 못합니다.
‘추사 김정희;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이어 한자 산숭해심山崇海深이란 말마디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바로 추사 김정희의 인물됨됨이와 동시에 저는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명당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 산을 배경으로 하여 강이나 하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을 꼽습니다.
그러고 보니 산의 기도처와 호숫가의 가르침터를 지닌 예수님은 명당에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더불어 공자의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즉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산과 호수를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삼 요셉수도원이 불암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주님의 큰 천복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늘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불암산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호수나 바다는 없어도 저는 푸른 하늘을 바다처럼, 흰구름을 바다의 섬처럼 생각하며 바라보기도 합니다. ‘하늘과 산’에 이어 ‘하늘과 강’의 비유 역시 제가 좋아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하느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강’처럼 내적여정의 삶을 살아가는 분도 수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안식년도 대부분 남산南山아래 장충동 수도원에서 보냈으니 산과는 떨어질 수 없는 팔자인가 봅니다. 작년 애송하던 '꽃과 산'이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을 가다니요/그냥 있으세요/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열두사도를 뽑으십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소의 신비요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성소를 판단할 수도 없고 성소의 호오나 우열을 비교할 수도 없음을 봅니다. 다 각자 하느님만이 아시는 고유의 성소요, 성소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열두사도의 면면이 참 다양하기가 흡사 하나하나가 고유의 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유상종, 예수님은 자기에 맞는 비슷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하느님의 안목으로 있는 그대로의 고유한 사람을 뽑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시야와 통찰은 얼마나 높고 깊은지 말그대로 하느님을 닮아 산숭해심입니다.
문득 어제 읽은 천년고찰 실상사에 관한 기사가 생각납니다. 산속에 있는 절이 아니라 유일하게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은 절입니다. 혹자는 실상사를 두고 “어디를 가든 내가 풍경의 중심이 되는 땅”이라 하니 흡사 주님 안에 있는 성소자들인 우리를 상징하는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그 현실에 중심이 된다는 뜻으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말마디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실상사 종무실 안내판의 글씨 내용도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미쳐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홀로도 빛나고 함께도 빛나라!”. 또 주로 산을 촬영하는 작가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산을 내버려 두고 건들이지 말라”, 그대로 산과 같은 형제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말마디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서로 내버려두고 건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열두 사도에 대한 복음 말씀도 사도들은 물론 우리의 신원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우선 제자로서 주님과 함께 머물러 배우는 관상의 시간에 이어 파견되어 사도로 활동하는,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 밖으로는 예수님의 활동을 위임받는 활동의 사도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관상의 제자들로 미사참여후 활동의 사도들로 삶의 제자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사도의 활동에 앞서 제자의 관상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새계약의 대사제 예수님은 복음의 예수님보다 더 심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사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열두 사도보다 더 잘 배워 깨달아 깊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네가지 새계약의 특징은 그대로 대사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1.새계약은 외적인 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지는 내적인 법을 뜻한다.
2.새계약은 옛계약과 달리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양자를 완전히 일치시켜 ‘하느님의 백성’과 ‘백성들의 하느님이 되게 한다.
3.새계약은 백성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 그분의 뜻을 직접 알 수 있게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법을 우리들 마음에 새겨 주시기 때문이다.
4.새계약의 특징은 사죄와 용서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죄를 사해 주신다.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이다.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의 새계약은 그대로 대사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부르시고 당신 관상의 제자로, 활동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중심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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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을 보여 주십니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온 때에, 그들과 맺은 계약과는 다르다."(히브 8,8-9)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예레 31,31-34 참조)을 인용하여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성조들과 계약을 맺으셨던 하느님께서 이제는 먼저 새 계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 계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히브 8,10)
이번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법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에 새겨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존재 안에 각인시키시겠다는 뜻이지요. 이는 사실 새삼스런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 존재 안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는 순간부터 이미 하느님의 마음이 스며들었으니까요.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마르 3,16)
열둘은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그대로 이어받은 완전한 숫자입니다. 야곱이라는 한 아버지의 열두 아들에게서 번성한 구약의 백성이, 저마다 다른 출생과 성장배경을 지닌 채로 예수님께 모여와 영적으로 형제자매를 이룬 새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확장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마르 3,13)
선택 기준은 에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 주도권이 철저히 예수님께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열두 사도의 선정은 편애과 불공정일까요?
사실 제자됨이 세속적 영화나 명예, 재물과 번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뒤따르는 삶이니, 모르지 않고서야 마냥 부러워할 일도 아니겠지요. 안다면 오히려 부르실까 봐 외면하거나 줄행랑을 놓을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마르 3,14-15)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입니다. 당신과 함께함, 복음 선포, 치유와 구마의 권한 부여라 요약할 수 있지요. 기존의 종교 권력은 먼저 율법 지식을 머리에 넣어주고, 율법이 정한 예식을 익히도록 이끌겠지요.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함께함, 복음 선포, 구마와 치유 권한 부여라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새겨주는 방식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공동생활에서 기도와 사랑을 배우고, 복음 선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체험하며, 구마와 치유 권한을 통해 연민과 자비를 성장시킵니다. 하느님의 법이 돌판에서 하느님 모상인 인간 내면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히브 8,13)
하느님께서 구약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새로운 계약이 에수님을 통해 펼쳐집니다. 옛 것에 매여 죽은 문자와 씨름하던 만물이 비로소 새로운 숨을 들이키는 때입니다.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의 전환이라는 '비연속성'과,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를 통해 하느님 백성을 구성하는 '연속성'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들어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새로운 법이 마음에 새겨진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이시지요. 말씀이 통째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 글을 몰라도, 신분이 낮아도, 민족이 달라도 하느님의 뜻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스러움과 부족함을 아시고도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 곁에 두시고, 얕은 지혜와 아둔한 혀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초라한 연민이나마 치유와 위로의 도구로 쓰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마다 받은 우리의 소명이 금수저, 흙수저처럼 태생적이지 않고 저마다의 영혼 깊이 새겨진 사랑의 흔적이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제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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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인간이 존재의 의미도 모르고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가!?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이자 현상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일상성everydayness’의 문제는 ‘세계 내 존재being in the world’의 핵심 특징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의 의미도 모른 채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봤다. 그래서 인간은 만족스러운 존재가 되고자 분투하는데, 하이데거는 그것을 기투project라고 불렀다. 보통 종교라든지 이데올로기(객관적인 과학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봐야 한다는 견해도 여기에 포함된다)가 기투의 수단이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이론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인간은 일상 및 도덕과 풍습, 각종 잡담(월요일 저녁의 축구시합, 드라마 재방송 따위)에 푹 빠져든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스스로 기투를 창조하는 대신 기존의 기투에 쉽게 젖어든다. 그리고 인간이 일상의 존재 방식을 의식하면, 예컨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트위터에 올릴 때면 바로 그 오랜 단조로움이 찾아온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의 한 주장일 뿐이다. 하느님의 계시를 믿는 신앙인들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도록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다음날 것을 참조하시라.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버드 철학자들의 인생수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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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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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의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과 함께 지내며,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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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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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목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는 '출가제자'입니다. 지금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네요.
반면 신자들은 '재가제자'입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였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열두 사도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부와 세리와 같은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 로마의 앞잡이인 세리, 그리고 반로마세력인 열혈당원 등.
이는 '12'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상징하는데, 열두 제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구하시겠다는 '큰 사랑의 드러남'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고,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려 줄행랑을 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향해 가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도 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당신의 최측근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세상 기준과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제자들은 '대기만성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도 참제자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성령을 받고, '참제자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실망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당신 제자로 뽑으셨다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그리고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자주 넘어지는 제자이지만, 끝까지 견디면서 성령체험과 성령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참제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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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4EyNoTo-2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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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 13)
부르심으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게된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신다.
따름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체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사람의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예수님께
두는 것이다.
부족하고
약한 부분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참된 삶의
행복이
예수님께
있음을
알게된다.
부르심과
따름은
하나이다.
따름이
사라지면
부르심도
생명을 잃는다.
부르심에
생명을
더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맞아들임의
살아있는
부르심이다.
날마다
십자가이고
날마다
부르심이다.
온 마음으로
온 삶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삶이
부르심의
가장 큰
의미이다.
부르심을 통해
드러나는
가장 좋은
사랑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다.
부르심과
따름으로
성숙해지는
사랑이다.
사랑은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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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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