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있다 / 이기철
누구든 아침에는 신성해지고 밤에는 한번 씩 악마가 된다
나는 선의 얼굴도 악의 얼굴도 만난 적 없기에
선과 악은 하나라는 믿음을 갖는다
악마의 지갑에도 돈이 들어있고
성직자의 지갑에도 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경악케 한다
불상 앞에서는 누구나 어린 아이가 된다
성모상 앞에서는 누구나 경건해진다
그 사실이 나를 안심케 한다
새 노래가 무엇을 전하는지를
나는 예순이 되어서야 조금은 깨달았다
풀벌레가 무슨 마음을 전하는지를
나는 머리카락이 반백이 되어서야 조금은 터득했다
내 마음 속에 부침하는 사유들
미안하지만. 내 마음 속 한 시간 안에 일어나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한 권의 장편을 쓰리라
그러나 나의 앳된 서정은 어린 순결이어서
인간의 삶 곁에서는 눈물난다
나는 오늘, 햇볕 아래서는 새로운 일이란 없다고 단호히 말한 뒤에도
그 말을 다시 한 번 부정한다
그대여, 사람 사랑하는 일 외에 이 세상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그러나, 들 가운데서 죽은 고기를 발견한 까마귀처럼
십만 권의 책 속에서 한 권의 책을 찾아낸다 한들.
십만 행의 글 가운데서 진리라는 말 하날 찾아낸다 한들
그것이 겨운 우리네 하루치의 노동의 대가가 된단 말인가
삶을 위해서는 어떤 위기에도 꽃을 바쳐야 한다
살아간다는 일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
밥 먹고 글 쓰고 팽이를 잡는 일보다 무엇이 더 신성할 것인가
나는 오늘 노동하고 밥 먹고 사유하고 배설한다
나는 살아있다
[출처] 이기철 시인 29|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