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먹을거리, 입을거리 귀해도 사는 게 참 정겨웠고 사람 사는 맛이 있었다고 하면 내 부모님 연배의 어른들은 "니가 어려운 시절을 알기나 하냐"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누리는 풍요(물론 빈곤의 대물림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도 존재하지만)에 비해서는 여러 모로 부족했던 시절이지만 사람 사이의 정이나, 모든 게 귀해서 더 소중한 그런 기억들은 당시가 훨씬 많은 것 같다.
여섯 명의 자식 중에 아들이 나 혼자다 보니 아무래도 없는 살림에도 나에 대한 대우는 남달랐다. 지금도 누나들과 자리를 같이 하면 결단코 나는 아들이란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지는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 했던 누나들은 전부 여상으로 진학하고 나 혼자 4년제 대학을 나온 걸로만 봐도 나의 증언은 명백한 위증으로 드러난다.
그 시절 먹는 것도 참 귀했다. 지금에야 안 먹는다고, 아니면 넘쳐나는 음식들 사이에서 영양분의 과다섭취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흰 쌀밥 먹는 것도 제삿날 아니면 명절 등 큰일 때에나 가능했으니 말이다.
매일 먹는 반찬이라야 지금처럼 양념이 듬뿍 들어가지 않고 구색만 갖춘 김치나 텃밭에 심어놓은 배추·고추·상추 그리고 지금은 아련하게 그리워지고 구수한 느낌마저 드는, 그 땐 지겹도록 먹던 자리젓, 어쩌다 신문지에 둘둘 말은 돼지고기 한 근이라도 끊어온 날은 비계 한 조각이라도 더 먹어 보려고 다투는 게 다반사였던 그런 시절이었다.
사실 곳간에서 인심 나온다는 옛말이 있듯이 없는 살림이었지만 아들에 대한 특별대우는 먹는 것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났다. 예를 들어 닭 한 마리를 사면 온 가족이 먹어야 하기 때문에 백숙보다는 닭죽을 끓여 먹었는데 닭다리 하나는 아버지, 나머지 다리 하나는 나 그리고 남은 날개, 목, 가슴살 등은 어머니를 비롯한 여섯 식구가 나누어 먹었다. 이처럼 묘한 음식 배분에서도 아들에 대한 특별대우는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당시 외가댁에 제사를 지내러 가면 외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외손자의 배려는 남달랐다(지금도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아련하게 눈가가 젖을 때가 많다). 남의 밭에 김을 매러 갔다와서 받은 품삯으로 꼬깃거리는 천원짜리 지폐를 외숙모 몰래 손에 쥐어주기도 했고 무엇인가를 손에 쥐여 보내지 못해 늘 안달이셨다.
초등학교 5학년 이맘때였다. 외할아버지 제사가 있어 외가댁을 다니고 오는 길에(하룻밤 자고 왔었다) 외할머니가 금방 알을 낳기 시작한 토종닭 한 쌍을 손에 들려 주셨다. 알 낳는 것도 구경하고 키워보라고 주신 것이지만 달걀 한 알이라도 하나밖에 없는 외손자 먹게 하기 위한 당신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 토종닭은 그야말로 나의 첫 재산이었고 순전히 내 것인 소유물이었다. 닭을 갖고 온 다음날부터 나의 기대에 부응하여 닭은 순조롭게 알을 낳기 시작했고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낳은 알을 점검하는 것이 나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가끔씩 밑알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져오면 어머니는 알을 품을 수 없게 하는 것만큼 모진 것도 없다고 도로 갖다 놓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토종닭 한 쌍과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오래도록 지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닭은 엄연한 내 것이었고 병사하지 않는 이상 닭의 존재에 대해서는 당연히 주인인 내 허가를 득해야 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느낀 내 것이라는 것 때문에 황홀해진 나는 친구들에게 엄청 자랑을 해댔다. 오죽하면 학교 글짓기 시간에 내 닭을 내용으로 해서 시까지 썼을까.
이런 황홀한 나의 봄날은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아주 짧게 끝이 났다. 여느 때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중요한 임무인 닭을 점검하는데 닭이 보이지 않았다. 텃밭에 있으려니 생각하고 보리쌀을 손에 쥐고 "구구구구"하고 불러보아도 내 목소리만 공허하게 되돌아올 뿐이었다.
학교에 돌아와서 부엌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던 것을 떠올리고는 부엌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난 뜨거운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놓인 물체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정스레 닭을 잡고 계셨던 것이었다. 내 닭을…. 아버지는 나를 보시고는 여름 지내기 전에 몸보신한다고 하면서 싱긋 웃으셨다. 그런데 나는 그게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나의 머릿속에는 '내 닭인데… 내 허락 없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내 것인데…' 라는 말만 맴돌고 있었다. 그토록 아끼던 닭을 강탈해 간 거대한 힘에 맞서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나는 그 분노와 상실감을 눈물과 묵언이라는 시위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흘리지 않은 눈물을, 감히 내 것이라 여긴 닭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 그것도 나의 영원한 우방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부모님이 가해자인 이 기막힌 현실에서, 마르지 않은 샘처럼 줄곧 쏟아냈다.
난 정말 그들을 보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리 허망하게 보낼 거였으면 애써 거리를 둘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누나들이 하나 둘씩 학교에서 돌아왔다. 다들 "야! 닭 먹는다"하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나는 그런 누나들의 지극히 단세포적인 행동을 경멸할 뿐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데 남의 밭에 일해 주러 갔다 온 큰 누나까지 들어 와서 저녁밥상을 차리게 되었다.
나는 절대 먹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이렇게 힘없이 닭을 보내고 그 닭을 차지한 적들과 밥상머리를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치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어머니보다 더 나를 챙기는 큰 누나 손에 이끌려 밥상머리에 앉게 되었다.
내 몫의 그릇을 보니 애써 참았던 눈물이 다시 났다. 하얀 닭죽 위에 얹힌 토실한 닭다리 하나…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학교 잘 갔다 온다고 인사까지 건넸던 한 때는 내 것이었던 내 닭…. 이제는 닭다리 하나로 남아 나의 저녁그릇위에 올라온 이 기막힌 현실이 더욱 나를 슬프게 했다.
옆의 막내누나가 한 마디 말을 했다.
"너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을게."
때려주고 싶도록 얄미웠다. 그 자리에 부모님만 안 계셨더라면 아마 한 대 때렸을 것이다. 큰누나가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다. 먹성 좋은 누나들은 벌써 자기 몫의 닭은 다 먹어 치우고 나의 닭다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래 죽만 딱 한 숟갈 먹자. 모처럼 하얀 일반미로 끓인 참기름을 넣은 고소한 죽 냄새가 목안 가득히 퍼져왔다.
내 인내력은 거기까지였다. 내가 안 먹으면 자기가 먹는다는 작은 누나의 말보다는 나의 먹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울면서 닭다리를 집었다. 한 입 살점을 베어 물었다. 눈물을 흘리며 씹느라 감촉을 채 느끼지 못했지만….
맛 있 었 다….
나는 내 닭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여름이 시작되면서 그렇게 보냈다. 그 맘 때 한 동안 나는 닭을 먹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참 간사하게도 그런 생각은 금세 시들해졌다. 그리고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보며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닭죽이라는 이 어처구니없음이란….
다시 여름이 다가온다. 이번 돌아오는 오일장에는 토종닭은 아닐지라도 닭 한 마리를 사서 통마늘과 황기를 넣어 압력밥솥에 넣고 푹 삶아 닭다리를 뜯어야겠다. 그 옛날 죽음으로써 나를 살찌웠던 토종닭 한 쌍을 추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