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 중에서 대한항공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서서영 씨 이야기가 나온다.
서 씨가 10여 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객실 승무원이 한 차례 서비스를 마친 후, 일부가 벙커(여객기 안에 있는 승무원 휴식처)로 휴식을 취하러 간 시간이었다.
서 씨가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객실을 한 바퀴 도는데 할머니 한 분이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뭔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서 씨가 다가가 여쭸다.
“할머니 어디 편찮으신 데 있으세요?”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서 씨 귀에 대고 “내가 틀니를 잃어버렸는데 어느 화장실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라고 말했다.
서 씨는 “제가 찾아보겠다”며 할머니를 안심시킨 후 좌석에 모셨다. 그러곤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객실 안에 있는 화장실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없고, 두 번째도 없고, 마침내 세 번째 쓰레기통에서 서 씨는 휴지에 곱게 싸인 틀니를 발견했다.
할머니가 양치질하느라 빼놓고 잊어버리고 간 것을 누군가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린 것이다. 서 씨는 틀니를 깨끗이 씻고 뜨거운 물에 소독까지 해 할머니께 갖다 드렸다.
세월이 한참 흘러 그날 일이, 서 씨 기억 속에서 까맣게 잊힐 즈음 서 씨의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자친구는 서 씨에게 “미국에서 외할머니가 오셨는데, 지금 서울에 계시니 인사 드리러 가자”고 했다.
예비 시댁 어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라 서 씨는 잔뜩 긴장한 채 남자친구를 따라 할머니를 뵈러 갔다. 그런데 할머니를 뵌 순간 어디서 뵌 듯 낯이 익어 이렇게 얘기했다.
“할머니, 처음 뵙는 것 같지가 않아요. 자주 뵙던 분 같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서 씨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손뼉을 치며 “아가! 나 모르겠니? 틀니, 틀니!” 하며 그러곤 옛날 탑승권을 여권 사이에서 꺼내 보였는데, 거기에는 서 씨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언젠가 비행기를 타면, 그때 그 친절했던 승무원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름을 적어 놨다고 한다.
할머니는 “외손자와 결혼할 처자가 비행기를 타는 아가씨라 해서 혹시나 했는데, 이런 인연이 어디 있느냐”며 좋아했고, 서 씨는 예비 시댁 어른을 만나기도 전에 사랑 받는 며느리가 됐다고 한다.
피천득 선생은 이 글 끝에서 ...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고 했다.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