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멍청한 그리스인들아. 나는 너희들의 교활한 수를 잘 보았다...너희가 헝가리인들을 도나우강 이쪽으로 데려오고 싶다면 데려와 보라. 너희가 오래전에 잃은 지역들을 회복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보라..... 너희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것마저 잃는 일뿐이다."
-오스만 제국의 재상 할랄 파샤가 비잔티움의 사절들에게. 로저 크롤리저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에서 인용. (해당 언동의 원인은 비잔티움이 메흐메트 2세에게 자신들의 궁정에 데리고 있던 오르한 왕자의 생활비를 더 지급해주지 않으면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다시 풀어주겠다는 사실상의 협박이 배경입니다.)
오스만제국의 확장을 보면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때 기독교 국가들이 왜 비잔티움을 돕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두번 하실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독교 국가들은 제국을 돕지 않았을까요?
답은 우선은 서유럽 국가와 비잔티움 사이에 그동안 묵혀져 왔던 감정이 4차 십자군을 통해 폭발되었고, 이러한 앙금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는것과, 각국가마다 자기일로(어찌보면 그정도로 중요할까 생각될 일로) 바빴다는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란게 무엇이었을까요?
우선은 비잔티움이 오스만의 공격을 받았을경우 가장 먼저 생각나는 국가는 위에서 인용된 할랄의 말처럼 헝가리입니다. 당시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병합한 상태였고, 그 힘은 세르비아와 왈라키아지방까지 영향을 떨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헝가리는 주전파인 섭정 야노슈 후냐디의 영향이 약화되었다는게 문제였습니다. 후냐디의 주도로 이루어진 코소보에서의 전투에서 대패해 후냐디의 발언권이 약해졌고, 왕이었던 라슬로 5세가 성인이 되가 후냐디의 섭정을 탐탁치 않아했다는것이죠. 거기다가 라슬로 5세는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3세에게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를 위협받고 있었다는게 문제였습니다.그렇기에 이들이 콘스탄티노플이 공방전에 한창이었을때 바로 가는건 무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후 메흐메트가 공방전이 끝나기 직전에 라슬로의 사절이 후냐디와의 휴전협정은 무효가 되었다고 전한걸 보면, 어느정도 포위가 길어졌으면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제국이 도움을 요청할만한 또다른 국가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공화국입니다. 이들은 제국의 영역에서 자유로운 무역을 하고있었고, 오스만이 제국을 멸망시키고 난뒤 가장 위협을 받을 국가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사이가 매~우 안좋았고,(양국은 이미 1379년에 키오자에서 크게 맞붙은적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매우 멀었던 제국의 안위보단 자기 바로 근처에 있는 밀라노나 사보이등 이탈리아 공국들의 경계를 더 신경썼습니다.(거기다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밀라노 공국의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제국은 다른쪽으로 도움을 청할 국가를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앙쥬 백작으로부터 나폴리왕국을 정복한(당시 아라곤 왕 알폰소 6세는 시칠리아 왕위도 겸하고 있었기에, 어찌보면 탈환이 되기도 합니다.) 아라곤 왕국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알폰소 6세는 여러번 자신의 야망이 라틴제국의 황제라는걸 여러번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내에서 그는 알바니아의 저항군 지도자인 스칸데르베그를 지원해주었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역시 초강대국 오스만에게 직접 대항할 생각은 없었고, 앞에서 언급한 라틴제국의 황제 운운도 단순한 허풍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외에 발칸반도 근처에 있었던 정교회 국가들의 경우에도 전부다 상황이 안좋았던게, 우선은 몰도비아는 당시 분열되있던데다가 허구한날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고, 왈라키아는 절대 헝가리의 협조없이는 오스만에게 대들지 않았습니다. 세르비아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오스만에게 반항하는데 더 시큰둥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중 세르비아와 왈라키아는 오스만의 봉신으로써 병력을 징집해 오스만에게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비잔티움의 봉신이었던 모레아 전제국의 경우엔 공성이 시작되자마자 오스만의 맹장 투라한 베이의 공격을 받았기에 도움을 아예 줄 수 가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리되면 제국의 입장에선 조금 멀더라도 어느정도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서유럽 강국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었는데, 이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우선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3세의 경우엔 애초에 오스만과 싸울 생각이 거의 없었고, 교황에게 서방의 제국으로써 행동을 보여라고 요청했을때도 단순히 오스만에게 (그다지 엄중하지도 않은)'경고'를 보냈을 뿐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전술했듯이 당시 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를 노리느라 바빴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엔, 그들사이의 전쟁이었던 백년전쟁의 참화를 씻어내는게 첫번째였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이 대규모로 십자군을 선포하면 참전했을지도 모르지만, 전술한 신성로마제국부터가 소극적인데 그게 될리가 없었죠.....
당시 그나마 강성했던 정교회 국가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자신들의 라이벌이었던 노보고로드 공화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남쪽에 약해졌다지만 여전히 남아있던 타타르의 잔해인 킵차크 칸국때문에 지원을 보내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은 요안네스 8세때 이루어질뻔한 동서교회통합의 충격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는게 문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국이 도움을 청할만한 국가는 백년전쟁당시 프랑스와 영국이 대립하는 틈을 타서 저지대를 얻어내고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부르고뉴 공국이었습니다만, 당시 부르고뉴의 지배자였던 '선량공' 필리프는 아버지인 '대담공' 장이 니코폴리스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당한 치욕을 잊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가 자신을 아버지를 따라 '십자군'이라고 칭하긴 했으나 그것은 엄연히 외교적 수사였을뿐, 직접 행동에 나서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헨등의 라인강 인근 지방을 얻어내는것을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럽 기독교 군주들은 자기들의 이권다툼을 제국의 안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지, 멀리있던 동방제국이 어찌되었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스만이란 거대한 이슬람 제국은 근세 내내 기독교세계를 위협하게 됩니다
1360년대를 성공적으로 보내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하다못해 1371년에 요안니스 5세가 서유럽 그만 쳐다보고 마누일 2세를 도와 함께 세르비아와 연합을 해서 건곤일척이라도 던졌으면 모를 일입니다. 하다못해 1365년부터 재점령하게된 칼리폴리를 점유한 채로 가급적 빨리 1370년대 말에 마누일 2세에게 제위를 넘긴다던가. 개인적으로는 발암덩어리 같은 안드로니코스 4세를 빨리 없애버리던가 아니면 본인이 강단을 가져서 대오스만 정책을 국내정책으로 확실히 밀어붙이던가 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1377년 이후부터는 사실상 비잔티움의 구원과 같은 이야기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봅니다.
1354년에 이른바 대튀르크 강경파 vs 지연파의 논쟁에서 요안니스 6세와 같은 소수 지연파가 주장하던 유화책을 이용한 지연전과 경제적 유인책으로 최대한 설득하여 유럽에서 적을 일단 밀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 1340년대의 파국에서 겨우 복원되던 제국의 입장에선 가장 유망한 답안이었고 일단 1350년대 후반만 무사히 넘어가도 트라키아 해안의 방위를 재건하고 발칸 남부 해안을 재점유하는 여러 필수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건데, 당시 제국군이 열심히 싸워서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이미 돌파된 칼리폴리 수복도 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무한정 밀려오는 적을 당할 수가 없었죠.
1360년대를 성공적으로 보내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하다못해 1371년에 요안니스 5세가 서유럽 그만 쳐다보고 마누일 2세를 도와 함께 세르비아와 연합을 해서 건곤일척이라도 던졌으면 모를 일입니다. 하다못해 1365년부터 재점령하게된 칼리폴리를 점유한 채로 가급적 빨리 1370년대 말에 마누일 2세에게 제위를 넘긴다던가. 개인적으로는 발암덩어리 같은 안드로니코스 4세를 빨리 없애버리던가 아니면 본인이 강단을 가져서 대오스만 정책을 국내정책으로 확실히 밀어붙이던가 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1377년 이후부터는 사실상 비잔티움의 구원과 같은 이야기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봅니다.
1354년에 이른바 대튀르크 강경파 vs 지연파의 논쟁에서 요안니스 6세와 같은 소수 지연파가 주장하던 유화책을 이용한 지연전과 경제적 유인책으로 최대한 설득하여 유럽에서 적을 일단 밀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 1340년대의 파국에서 겨우 복원되던 제국의 입장에선 가장 유망한 답안이었고 일단 1350년대 후반만 무사히 넘어가도 트라키아 해안의 방위를 재건하고 발칸 남부 해안을 재점유하는 여러 필수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건데, 당시 제국군이 열심히 싸워서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이미 돌파된 칼리폴리 수복도 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무한정 밀려오는 적을 당할 수가 없었죠.
뭐 저도 동롬뽕 맞은 사람이고 참 아쉽긴 합니다만 지원이 들어갔더래도 코소보의, 니코폴리스의, 바르나의 결과를 반복하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겠죠. 지원의 구심점이 될만한 서방황제는 희대의 ㅂㅅ이고 성좌는 지난 세기에 권위 다 말아드셨고...
135~60년대를 내분으로 허비하지 않았다면 다음 세기 중반쯤까지도 트라키아와 그리스의 제국영토들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 시점에서 내분이 터지고 오스만의 2세기에 걸친 폭발적 성장이 시작된 이상 1453년의 파국은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그걸 알았을지라도 아둥바둥 버텨온 그들의 마지막 백년 때문에 뽕을 맞지 않았나 싶긴 합니다만...
영프:백년전쟁
헝가리:바르나전투에서 왕까지죽었는데 굳이 또 싸울필요가
폴리투:로ㄹ랑 만리장성+튜튼죽이기
모스크바:비잔틴이 (물론 대외적으로만) 동방정교를 기독교와 통합시키면서 사실상절교
제노바 베니스:애초에 자신들 경제적 이익만챙김 즉 오스만과 척을 질 필요가없음
잉베리아:레콩키스타
교황:어버버버버버
결론:프리드리히를 깝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