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구나무
박관례
내 고향에는 수 백년동안 마을을 지키며 함께 살아온 아름드리 둥구나무 한그루가 마을 입구에 커다란 풍채를 한 채 서있다.유년시절 밤이 되어 보름달이 떠오르면 달빛에 가려진 둥구나무는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 마땅한 장소이며 낮에는 태양을 덩치 큰 몸으로 막아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둥구나무 아래 앉아서 작은 조약돌로 친구와 공기놀이도 하며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놀이터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그 밑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옷 샘이라고 부를 만큼 물이 아주 차가웠다. 겨울이면 물안개를 피우듯 김이 모락모락 나기 때문에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의 시린 손끝을 녹여주는 온수가 되어주곤 했다. 때로는 동네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초가지붕을 태우면 양동이로 물을 길어 불을 끄는 소방차 역할을 하여 소방수라고도 불렀다.
이 우물은 손이 시리도록 차가움으로 목마른 동네사람들에게 갈증을 풀어주었고 겨울에는 우물 스스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따뜻함으로 시린 가슴을 데워주었던 신비한 우물이었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언제나 한결같이 물의 깊이를 일정하게 해주었고, 이 마을 사람들은 고마움에 보답을 해야된다고 정월 상달이면 정성을 모아 고사도 드리며 마을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내 고향에 둥구나무는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붙잡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장소였다.
그 시절 겁이 유난히 많은 나였지만 단 한번이라도 나무에 오르고 싶은 열망에 둥구나무를 기어오르려 하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교 친구인 진이는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목마를 태워주며 커다란 나무 위로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나무 중턱까지 무작정 타고 올랐다. 그리고는 나무 위에 걸터앉아서 노래를 부를 때까지만 해도 내가 위험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는지. 아찔했던 순간을 생각해 보니 오금이 저려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올라올 때는 예상을 못했던 지라 막상 내려오려고 하니 무서워서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제기차기를 하면서 놀고 있던 진이한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고 나는 진이를 불렀으나 도와주기는커녕 저만치 도망가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소리내어 울고있는데, 제기차기를 멈추고 진이가 둥구나무 밑으로 바싹 다가왔다. 진이가 하는 말이 약속 한가지만 들어주면 나무에서 내려 주겠다고 했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커서 내 색시가 되어 준다면………….” 하기에 “그러면 너는 내 약속 들어줄 꺼야?” "무슨 말인데?" “나는 공부 많이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시내 사람한테 시집 갈 꺼야."했더니 "그러면 나도 시내로 이사가서 공부 많이 하면 되잖아" "그래 그럼 하면서 무사히 진 이의 도움을 받고 내려와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했었다.
그후 진이는 대전으로 이사를 하여 학교를 다녔고 나는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며 소녀시절을 보냈다. 가끔 인편을 통하여 안부를 전할 때면 나도 궁금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으나 막연하게 그 사람만 기다리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보다. 중매로 남편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을 때 소식이 전해왔다. 학교와 군 복무를 마치고 청년이 된 진이는, 유년시절에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색시 감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 친정 집에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어머니께서 내가 시집을 갔다고 하였더니 허탈한 모습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을 때, 동창모임이 있다하여 나갔다가 진이를 만났다. 너무나 긴 세월이 지난 후 만났기에 반가움에 앞서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었다. 키는 장대같이 커서 내가 올려다 보아야만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어엿한 멋쟁이로 변해있었다.
그 옛날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친정 집을 찾아 주었던 진이의 사랑을 떠올리며,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먼저 결혼을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결혼은 하였나 궁금하여 알아보니 진이는 서울에서 예쁜 색시를 만나 성실하게 생활하여 빌딩을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미혼이기를 기대했던 것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겠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왔지만 마을 입구에 서있는 둥구나무를 바라보니, 어린 시절 진이의 색시가 되어준다는 무심코 한 약속이었지만, 그 날이 그리워지는 것은 웬일일까.
진이는 어쩌면 나를 믿기 보다는 이 둥구나무를 믿고 세월을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따라 둥구나무 아래 있는 우물에 드리워진 내 모습이 세월에 무상함을 일깨워 준다. 지금 이 나이에 나에게 잠시나마 유년시절에 있었던 사연들을 생각나게 해준 이 둥구나무가 마냥 정겹게 느껴진다. 지금 이 나무를 바라보니 내 가슴이 시려오는 것은 나도 진이를 마음속으로 무척이나 좋아한 것은 아니었는지 앞뒤가 온통 산야로 둘러싸여 산막 동네라 불리울 만큼 두메산골에 묻혀있는 둥구나무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나무를 끌어안은 채 기대어 옛 생각을 해본다.
이 넓고 큰 둥구나무는 심신이 지쳐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쉼터가 되어 주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해 주었을 것이고, 때로는 마음이 외로운 사람에게도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었을 것이다. 인생의 뒤안길에 서 있는 요즈음 나는 어느새 삶의 가을을 만난 것 같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를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보내주었으며,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또한 사랑의 빈말만 남기며 살지는 않았던가. 나는 진이와의 약속을 어기고 살고있지만 고향의 둥구나무는 지금도 묵묵히 우리 고향을 지키고 있다.
2000.8집
첫댓글 결혼은 하였나 궁금하여 알아보니 진이는 서울에서 예쁜 색시를 만나 성실하게 생활하여 빌딩을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미혼이기를 기대했던 것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겠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왔지만 마을 입구에 서있는 둥구나무를 바라보니, 어린 시절 진이의 색시가 되어준다는 무심코 한 약속이었지만, 그 날이 그리워지는 것은 웬일일까.
나무를 바라보니 내 가슴이 시려오는 것은 나도 진이를 마음속으로 무척이나 좋아한 것은 아니었는지 앞뒤가 온통 산야로 둘러싸여 산막 동네라 불리울 만큼 두메산골에 묻혀있는 둥구나무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나무를 끌어안은 채 기대어 옛 생각을 해본다.
이 넓고 큰 둥구나무는 심신이 지쳐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쉼터가 되어 주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해 주었을 것이고, 때로는 마음이 외로운 사람에게도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었을 것이다. 인생의 뒤안길에 서 있는 요즈음 나는 어느새 삶의 가을을 만난 것 같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를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보내주었으며,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또한 사랑의 빈말만 남기며 살지는 않았던가. 나는 진이와의 약속을 어기고 살고있지만 고향의 둥구나무는 지금도 묵묵히 우리 고향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