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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미륵(恩津彌勒)
한하운(韓何雲)
논산땅 은진 미륵불
돌로 천 년 살아오신 육십오 척
몸길이가 얼굴길이가 균형을 잃은
웅장한 험절(險絶)의 어처구니없는
옛날의 불구자.
앙데팡당(Independant)의 뉘 석장(石匠)이
그지없는 인간고의 초극상(超克像)을
스핑크스로 아로새겼다.
비원(悲願)에 우는 사람들이
진정소발(眞情所發)을
천년 세월에 걸쳐
열도(熱禱)하였건만.
초등학교 때 배운 은진미륵(恩津彌勒) 오늘 답사 길에 올라 !
오늘 훌쩍 마음을 내어 논산 은진미륵(恩津彌勒) 답사를 떠났다.
12살 초등학교때 배운 충남 논산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恩津彌勒)을
백발이 성성한 지금 와서 찾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과 설레는 마음이다.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여행은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복잡한 서울 도심을 떠나 호젓한 겨울 자동차 여행은 그야말로 힐링(healing)이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침묵의 겨울 산, 하늘도 건조하여 더 가볍게 보인다.
벼를 거두어들인 겨울의 빈 들판이 약간은 황량(荒凉)한 느낌이 있지만
고즈넉한 들녘에 하얀 볏짚뭉치와 벼를 베어낸 밑동거리 사이로 자란
파란 독새풀이 겨울속의 봄처럼 이채롭다.
도시를 떠난 여행의 특징은 서울은 눈만떠면 사람이 북새통을 이루는데
시골은 사람을 만나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가하다.
농촌 인구도 적을뿐더러 자연 속에 파묻혀 있으니 눈에 뜨이질 않는다.
마치 속세의 중생이 신선(神仙)이 사는 선경(仙境)에 들어 선 기분이다.
문득 중국 시인 가도(賈島)가 산중에서 도사(道士)를 찾지만 만날 수 없다는
시(詩)가 생각난다.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소나무 아래에서 아이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스승은 약초를 캐러 갔다고 말하면서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이 산 속에 계시기는 하지만
雲深不知處(운심불지처)-구름이 짙어서 계신 곳을 알 수 없다고.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의 시에도
俗客不到處(속객불도처)-속된 사람 오지 못하는 곳에
登臨意思淸(등림의사청)-올라오니 마음이 맑아지는구나.
自慙蝸角上(자참와각상)-부끄럽도다. 달팽이 뿔 같은 이 세상에서
半世覓功名(반세멱공명)-부질없는 공명(功名)을 찾아 반평생을 헤매었으니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에서는
살아가면서 캄캄한 벽처럼 앞이 보이지 않은 어려움에 처하여 힘들어 할 때나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는냐?” 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은
1.여행 2.산책 3.운동 4.자원봉사라하였다.
생활 속 여러 가지 고민에서 탈출하려면 가족이나 친구등과 여행을 하면 그 기간에
다소 마음이 안정되고 새로운 마음을 다지는 터닝포인트(Turning point)가 된다.
여행은 행복의 뷔페식당이라고 할 수 있다.
(2017. 7. 17 SBS 방송)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도 여행의 즐거움을 아래의 시(詩)로 표현하였다.
名士看山話(명사간산화)-이름난 선비가 산 구경하자는 말에
欣然動我心(흔연동아심)-내 마음을 혼연히 감동시켰네!
時宜唯漫浪(시의유만낭)-지금 사정은 여행하는 것뿐이려니와
天性況山林(천성황산림)-더구나 천성이 산과 수풀을 좋아함에랴
沙暖春蕪遠(사난춘무원)-백사장 따스하니 봄풀이 무성하고
峯稠晩翠深(봉조만취심)-산봉우리가 빽빽하게 겨울 소나무가 푸르구려.
不愁筋力短(불수근력단)-근력이 약하여 힘 부친 것 걱정할 것 없어라
行處有繁陰(행처유번음)-가는 곳마다 쉴 수 있는 짙은 그늘 있으니
유적지를 답사할 때마다 우리 산하(山河)가 이처럼 아름다운데 진심으로 감탄한다.
1960년대만 하여도 국민들 굶는 생활과 같이 산도 헐벗고 강은 메말랐다.
지금 북한과 같은 실정이었다.
거미줄 같은 고속도로, 산촌의 지방도로 농로(農路)도 잘 정리되어 있다.
산림이 울창하고 아름답다.
강물이 맑고 풍부하다.
다양한 음식점이 곳곳에 있다.
어느 곳이든 와이파이(Wireless Fidelity)설치로 무선인터넷 통신이 된다.
충남 논산읍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恩津彌勒),
정식명칭은 관촉사(灌燭寺) 석조보살립상(石造菩薩立像)이다.
2018.4.20.일에 국보 323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초인 968년(광종19년) 조각장(彫刻匠)인 승려(僧侶) 혜명(慧明)에 의해 세워진
18.12m의 국내 최대 입불상(立佛像)으로 태어난 지 1050년만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관촉사(灌燭寺)는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로 논산 시내에서 약3km 떨어진
낮으막한 반야산(般若山100m)기슭에 본전(本殿)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요사채도 별로 없는 있는 아주 작은 사찰이다.
“은진미륵(恩津彌勒)”이 관촉사(灌燭寺) 절 이름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이 편리하기 때문에 관촉사 은진미륵에 대한 교과서 같은 정보는 새삼스럽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사진만 올리고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궁금한 것 몇 가지만 관심을 가져 보면,
관촉사(灌燭寺)의 절 이름을 한자(漢字)로 풀이하면
“灌”은 물댈관 물(水)이라는 뜻이다.
“燭”은 촛불촉 불(火)이라는 뜻이다.
오행(五行)에서 물(灌)과 불(燭)은 수극화(水剋火)의 상극(相剋)으로 절 이름으로는
글자의 뜻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하여 절 이름을 짓게 되엇을까?
관촉사의 이름 변경은
1.관촉사(觀燭寺-촛불을 본다)
2.관족사(灌足寺-물로 발을 씻는다)
3.관촉사(灌燭寺-물로 촛불을 끈다)로 변경된 기록들이 있는데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제24권에
전하는 관촉사에 관련된 이색(李穡)의 시(詩)가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 하는데
이 시에는 “관족사(灌足寺)”라 되어 있다.
참고로 아래와 같다.
馬邑之東百餘里(마읍지동백여리)-한산의 동쪽으로 백여 리쯤 되는 곳에
市津縣中灌足寺(시진현중관족사)-은진현이라 그 안에 관족사(灌足寺)가 있다
有大石像彌勒尊(유대석상미륵존)-여기에 크나큰 석상 미륵존이 있으니
我出我出湧從地(아출아출용종지)-“내 나간다 나간다”며 땅속에서 솟았다네.
巍然雪色臨大野(외연설색림대야)-눈처럼 하얗게 우뚝이 큰 들을 임하니
農夫刈稻充檀施(농부예도충단시)-농부들은 벼를 베어 보시를 하거니와
時時流汗警君臣(시시류한경군신)-때로는 땀 흘려 군신(君臣)을 타이른다
不獨口傳藏國史(불독구전장국사)-구전(口傳)만이 아니라 국사(國史)에도 실렸고
癸卯仲冬邊報急(계묘중동변보급)-계묘년 동짓달엔 변방의 경보가 급하여
我又降香馳汲汲(아우강향치급급)-내가 또 향을 받아서 급히 달려가면서
一張白紙上所署(일장백지상소서)-한 장의 흰 종이에 임금께서 서명한 것을
掛向指間吾感泣(괘향지간오감읍)-내 손가락 새에 쥐고 매우 감읍했는데
兇人敗走朝著淸(흉인패주조저청)-흉악한이 패주하고 조정이 청명해지니
至今歌詠先王明(지금가영선왕명)-지금도 선왕의 명철함을 다 노래한다네.
回思少也侍慈顔(회사소야시자안)-회상하건대 내 젊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目瞻頂禮浮舟還(목첨정례부주환)-우러러 예배하고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龍華樹下人天會(룡화수하인천회)-용화수 아래에 중생이 가득 모였을 때
已擬跡於其班列(이의적어기반열)-이미 그 반열에 자취를 나란히 했었으니
況又把筆廣邀請(황우파필광요청)-더구나 지금 글을 지어 널리 초대한다면
傾心施財誰復慳(경심시재수부간)-성심껏 보시하기를 누가 다시 아끼리오.
直截根原只一念(직절근원지일념)-근원을 밝히는 데 다만 일념을 갖는다면
三世分明方寸間(삼세분명방촌간)-삼세가 한 치의 마음 사이에 분명해지리.
南望雲山幾千疊(남망운산기천첩)-남으로 바라보니 운산이 그 몇 천 겹 인고
恨殺我今腰脚頑(한살아금요각완)-내 지금 허리 다리 뻣뻣한 게 한스러워라.
이색(李穡)의 관족사(灌足寺)는 발을 씻는 다는 의미로 해석할 때에
종교에서 발을 씻는 것은 불교의 금강경과 기독교의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다.
*금강경(金剛經) 1분 3~4절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부처님께서 성중(城中)에서 차례대로 걸식(乞食)하시고 나서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시어 옷과 발우(鉢盂)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시고 앉으신 후공양(供養)을 드셨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3장
4절-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절-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닦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직전이다.
절에 가면 중심건물인 본전(本殿)에 “대웅전(大雄殿)” 현판이 붙어 있는데
눈여겨보면 절마다 다 “대웅전(大雄殿)”이라 되어 있지 않다.
안에 모신 불상(佛像)에 따라 본전(本殿)의 현판 명칭도 다르다.
예를 들어
본전(本殿)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이나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불상(佛像)으로 모신 곳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불상(佛像)이 없고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법당에 모셔 놓는다.
원통전(圓通殿)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상(佛像)이다 강원도 낙산사가 대표적이다.
관촉사(灌燭寺)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육신(肉身)이 보이는 석가모니불과
다르게 보통 사람의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라 하였다.
육신(肉身)이 아닌 진리(眞理)의 모습이므로 법신불(法身佛)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불상(佛像)은 부처님을 형상화시켜 천개의 연꽃(千葉蓮華)위에 결가부좌상을 하고 있다.
▲관촉사(灌燭寺) 답사의 이야기 거리는 단연 “은진미륵(恩津彌勒)”이다.
정식명칭이 “관촉사(灌燭寺) 석조보살립상(石造菩薩立像)”이라 하지만
이런 어려운 불상이름보다 세속에 전하여 내려온 이름인
은진(恩津)동네에 있는 “은진미륵(恩津彌勒)”이름이 더 친근하다.
미륵(彌勒)의 뜻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뒤를 이어 57억 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를 뜻한다.
은진미륵은 높이가 18.2m로 아파트 6층 높이다.
은진미륵은 불상의 하반신, 중반부, 상반부의 비례가 맞지 않는 조각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올려다보면 비교적 균형 잡힌 조각석불로 보인다.
은진미륵은 경주 석굴암이나 마애불상(磨崖佛像) 금동불상(金銅佛像)에 비하여
조형미가 떨어지고 얼굴이 세련되지 못해 “못난이”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체구에 비해 얼굴이 너무 커서 인체 비례로 하면 4등신도 안 되게 보인다.
거기다 눈·코·입 손발이 매우 크다.
필자가 가까이서 본 은진미륵의 첫 인상은 마치 동구 밖에서 있는 장승 이미지였다.
*입,코,눈이 불상(佛像)이라기보다는 거한(巨漢)의 얼굴과 같다.
*거대한 손에 든 작은 철제연꽃이 앙증맞다.
*크지만 희미한 미소가 담긴 붉은 입술, 코,
*짧은 눈썹에 비해 길게 표현된 부리부리한 눈
*어깨에 닿을 것만 같이 늘어진 귓불
*좌우의 머릿결 위로 무겁게 느껴지는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 모자)
*양쪽 귀를 살짝 덮고 흘러내린 세 가닥의 머리카락
*오른손 손목의 팔찌
*엄청나게 큰 발가락
*거칠게 조각된 피부는 중생의 고통을 불상에 옮긴 듯하다.
은진미륵은 큰 바위 3개를 조각하여 배꼽이하부분, 배곱이상 머리부분,
보관(寶冠모자)부분을 붙인 것이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불상의 조각이 섬세하지는 않고 거칠지만 소박한 자연미가
느껴진다.
필자 생각으로는 신라 고려의 불상 조각기술 수준이 충분이 세련미를 낼 수 있지만
미래에 나타날 미륵불(彌勒佛)을 괴력(怪力)의 거한(巨漢) 모습으로 보이게 한 것은
고통 받고 있는 힘없는 민중(民衆)에게 희망을 주는 든든한 배경의 이미지라 본다.
은진 미륵이 세워진 설화는 대부분 아는 것이지만 간단히 정리한다.
절 아래 한 노파가 쑥을 캐러 갔는데 갑자기 땅속에서 바위가 솟아오른다.
노파는 이 일을 관청에 고했다.
고려 광종은 “이 바위 돌로 미륵불을 지으라”고 명하고 책임자는 혜명(慧明)대사였다.
혜명이 인부 100명과 공사를 끝내는 데는 38년이 걸렸다.
불상 조각을 끝낸 혜명은 미륵불의 머리와 신체로 나뉜 세부분을 붙이려했지만
바위가 너무 무거워 세울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차에 두 어린이가 탑 쌓기 놀이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모습을 보고 혜명은 깨달음을 얻었다.
두 아이는 하나의 돌을 놓고 주변에 흙과 모래를 채운 뒤 또 다른 돌을 굴려
두 돌을 포갰다.
혜명대사가 그걸 보고 손뼉을 치는 순간 아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혜명은 그 아이들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현신이었다고 믿었다.
농월
관촉사 입구 일주문 반야산 관촉사
반야루(盤若樓)아래에 있는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추모비(追慕碑)다
논산 연무대에 포로수용소에 있는 반공포로 석방으로 자유를 찾은 반공 청년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북한군 전쟁 포로들을 남한에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한데 대한
고마움의 추모비다.
관촉사 본전(本殿)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이다
대광보전(大光寶殿),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도 한다.
이뜻은 맑고 깨끗한 법신(法身)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두루 비치는 빛이다
현판의 글씨체가 독특하여 쓴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지만 아는 스님이 없다.
본전(本殿)의 불상을 표시하는 현판은 그 절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현판 글을 누가 썼는지 모른다는 것은 그 절에 있는 승려들의 불심(佛心)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의심할 수 있다(필자 생각)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현판도 아는 스님이 없어 필자가 종무소(宗務所)
서고(書庫)에서 찾아 안평대군의 글씨임을 알려 주었다.
*반야루(盤若樓) 뒷면에 있는 불광보조(佛光普照)라는 현판이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비추다”라는 뜻이다.
부처님!
"돈을 넣고 복을 비는 곳"
이것이 당신의 설법인가요?
당신의 성상이 모셔진 법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자비하신
당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입을 딱 벌린 채 버티고 있는 “불전통(佛錢筒)”이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의 위치는 바로 당신의 코앞입니다.
어느 절간을 가릴 것 없이 그것은 근래 사원의 정해진 악세사리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내려다보실 때마다 얼마나 난처해 하실까를 당신의 제자들은
눈이 어두워 못보고 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어떤 곳에서는 이런 “간판”까지 내걸었습니다.
“돈을 넣고 복을 비는 곳”이라고-.
당신의 설법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번이라도 계셨습니까?
복덕(福德)이라는 게 화폐로써 잴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당신의 가르침이 사교(邪敎)가 아닌 위없는 정법(正法)임에도
누가 보든지 낯간지러운 이 괴물은 시급히 철거되어야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像(상)이 모셔진 코앞에서 만이라도 -.
법정스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