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남침 때 美軍 파병을 결정하여 한국을 살린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 결정이 자신의 在任 기간중 가장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술회하였다. 당시 미국은 30만 명의 美軍이 戰死(전사)한 2차세계大戰이 끝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다. 미국의 軍部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赤化된 마당에 韓國을 지킨다는 것은 불필요하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판단, 그 1년 전에 駐韓美軍을 철수시켰다. 미국 정부는 李承晩(이승만) 정부가 도발을 못하도록 武器(무기)도 제대로 대주지 않는 정책을 썼다. 한국과 미국 사이엔 동맹 조약이 없어 미국은 파병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트루먼 대통령은 南侵(남침) 보고를 받자마자 派兵(파병)을 결심한다. 電話를 걸어온 에치슨 국무장관에게 그가 내뱉은 말은 "그 개새끼들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였다.
미군 파병으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은 고생을 많이 하였다. 抗命(항명)한 맥아더를 해임하였다가 욕을 먹었고, 승리도 패배도 아닌 休戰을 위하여 협상을 끄는 사이에 많은 美軍이 戰死하고 다치자 여론이 등을 돌렸다. 그는 반공포로를 강제송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는데, 이 고위한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미군이 희생되었다. 그는 퇴임할 때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져 역대 최저 기록을 세웠다. '휴전'을 공약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후보가 大選에서 이겼다.
트루먼의 인기가 회복된 것은 그가 죽고 나서였다. 특히 東西冷戰(동서냉전)이 서방세계의 승리로 끝난 뒤 전문가들은 그를 '냉전 승리의 기초를 놓은 大전략가'라고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창립, 마셜 플랜, 독일과 일본의 부흥, 한국전 파병, 原爆 투하, 트루먼 독트린 등 그가 결정한 對蘇 전략이 50년 뒤에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서 美中 관계 정상화의 기틀을 놓았던 헨리 키신저는 하버드 대학 교수 시절, 은퇴하여 고향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에서 살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을 찾아갔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2차세계 대전 때의 敵이었던 독일과 日本을 도와 민주주의 국가가 되도록 만들고 경제부흥도 시켰다. 敵을 이렇게 도와서 친구로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2차세계대전의 다른 戰勝國(전승국) 소련은 독일과 일본 및 두 나라의 점령지에서 공업시설과 과학자들을 약탈·납치해갔다. 만주 주둔 일본 關東軍(관동군) 약 60만 명을 포로로 잡아 10여년 간 시베리아에서 강제勞役(노역)을 시켰다. 소련은 이렇게 함으로써 생산력이 엄청난 독일과 일본 民心을 敵으로 돌렸다. 冷戰 때 독일과 일본이 미국 편에 선 것이 소련 등 공산권의 敗因(패인)이 되었다.
미국은 韓國戰에서도 戰場(전장)에선 있을 수 없는 慈善(자선)을 베풀었다. 美軍은 중공군에 포위되어 興南에서 탈출할 때 10만 명의 한국인 避亂民(피란민)들을 태우고 왔다.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중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강제송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내기 위하여 2년간 휴전협상을 끌어야 했다. 휴전협상 시기에 2만 명이 넘는 미군이 더 죽었다.
休戰 이후엔 한국의 부흥을 위하여 대규모 경제원조를 하고 한국군을 현대화시켜주었다. 산업화 시기에는 한국이 만든 물건을 사주었다. 산업화에 필요한 고급기술을 제도적으로 제공하기 위하여 KIST, 즉 과학기술연구소를 지어주었다. 미국은 이렇게 하여 한국에 대하여 '아낌 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背恩忘德(배은망덕)의 反美운동이 일어나도 미국은 참았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단순 교통사고로 두 여중생이 죽은 것을 좌익들이 악용하여 反美운동을 벌이자 미국은 대통령까지 나서서 사과하였다. 북한의 核 및 미사일 개발에 한국인들은 천하태평인데, 미국이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북한人權 문제에 대하여도 미국이 한국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관련 단체들을 지원한다.
세계 外交史上 이런 경우가 또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韓美동맹은 東北亞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둥이 되었다. 이 기둥은 그러나 안전하지 못하다. 한국인들이 미군의 등에 업혀 안보무임 승차를 계속한다면, 그런 공짜심리에다가 미국을 원수로 여기는 좌익세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정신적으로 타락한 나라가 되어 자유통일의 찬스를 또 놓치게 될 것이다. 중국의 개입을 차단하고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이 이뤄지려면 韓美동맹이 우리를 뒷받침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생명줄인 韓美血盟을 만든 두 사람-트루먼과 李承晩을 잊어버리는 국민들이라면, 이렇게 고마움을 모르는 국민들이라면 고생을 더 해야 할지 모른다. 이번 미국 대사 테러에 대한 한국인의 감상적 반응이 지속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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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버드 대학의 와이드너 도서관 맞은 편엔 추모교회(The Memorial Church)가 있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교회 겸 戰死者 추모시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 2차 대전, 한국전, 월남전에 참전하여 戰死한 하버드 졸업생들의 이름이 벽에 새겨져 있다. 동판에 새겨진, 한국에서 戰死한 하버드 졸업생은 17명이었다.
미국 CIA 국장을 오래 지낸 알렌 덜레스는 獨子(독자)를 두었는데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면서 公職者(공직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중 6·25 남침전쟁이 터지자 해병대에 지원, 장교로서 한국戰線에 배치되었다.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머리에 총상을 맞고 영구적인 정신장애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은 1997년에 '알렌 메시 덜레스 51년 賞'을 제정하여 국가를 위하여 봉사한 학생들에게 주고 있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로 참전, 북한지역을 폭격하던 중 실종, 戰死처리되었다. 밴 플리트는 부하들에게 아들에 대한 수색이 度(도)를 넘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셀던 도드 아이젠하워도 장교로 참전하였다. 아이젠하워가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아들은 한국전선의 미군 전투 대대에 배속된 소령이었다.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戰線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휘관에게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사단본부 근무로 옮겼다.
장군을 아버지로 둔 미군 장교 130여 명이 한국전에 참전, 3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렇게 높은 死傷率(사상률)은 이들이 위험한 일선 근무를 자원하였기 때문이다.
워커 8군 사령관, 무어 군단장도 한국전에서 사고로 죽었다. 딘 사단장은 한국인이 북한군에 신고하여 포로가 되었다. 인천상륙전과 흥남철수 작전을 지휘하였던 알몬드 장군은 2차 대전 때 사위와 아들을 잃은 사람이었다.
6·25 남침 전쟁 때 한국의 장관이나 장성의 아들이 전사한 경우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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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려주신 소중한 말씀 과 이미지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