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두르골?두우티?두우치?두우현동(斗牛峴洞)
두우티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주로 안동 권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 두우티: 두우티 마을 위쪽에 있는 고개이다. 지형이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밋두르 서족에 해당된다.
116. 밋두리?미두루?며두동
한티재 남쪽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서 콩과 팥을 많이 재배하였다고 해서 '며두동'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 울바위골: 밋두로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제비원 미륵불을 만 들 때 다른 한 바위가 먼저 가서 미륵으로 만들어지자 남은 한 바위가 원통해 울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117. 양이골?양의곡(良義谷)
왕달봉 밑에 있는 마을에 지방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봉화대를 통하여 임금님께 소상히 알리는 어진 백성이 살고 있다 하여 '양의골'이라 하였다. 두 개의 작은 마을이 있는데 골짜기 남쪽 양지 쪽에 있는 것을 '양지마을', 음지 쪽에 있는 것을 '음지마을'이라 한다.
-- 왕달봉: 조선시대에 봉화가 있었던 높은 산이다.
-- 왯골: 양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기와를 많이 구웠다고 한다.
118. 용달골?용당곡(龍堂谷)
범당골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송천(二松川)에 최씨와 김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가축을 산짐승한테 많이 잃어 마주 보이는 산에 당(堂)을 지어서 제사(祭祀)를 지냈더니 그런 일이 없어졌다 한다. 이 일이 있은 이후부터 이곳을 용당골이라 한다.
--범당골: 용달골 앞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범당'이라는 당집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119. 매락골?매화골(梅花谷)
송현동 몰갯골에서 북동쪽으로 조그마한 고래를 넘으면 '매화골'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 매화나무가 많아서 '매화골'이라 이름지어졌다 하는데 지금은 매화나무를 찾아 볼 수 없다. 매화골을 '매락골'이라고도 한다.
120. 안막골, 안막곡(安幕谷)
이 마을은 안막동의 원마을로써 원래 안동부의 서부지역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현 길원여고(吉原女高) 자리에 순흥(順興) 안효자(安孝子)의 대묘막(大墓幕)이 있었기 때문에 '안막골'이라 불렀다. 이 만막골은 1914년 '머질리'와 병합하여 안막동(安幕洞)이 되었다가 1931년 안막정(安幕町), 명륜 1정(明倫一町), 명륜 2정(明倫二町), 으로 분리되었다. 그 뒤 명륜 1정은 '명륜동', 명륜 2정은 '신안동'이 되고, 안막정은 '안막동'이 되었으며 이때에 상아동을 독립시켰다. 그러니까 원래의 안막동은 현재의 명륜동, 신안동, 상아동이 다 포함된다.
121. 얼근바우, 쿵쿵바우, 킁킁바우, 굼바우골
현재 길원여고 아래 쪽에 있었던 바위로 얼금얼금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얼근방우'라고 부르기도 하고, 얼근방우 아랬부분에 약수가 솟아 폭포를 이루어 쿵쿵 킁틍 한다고 해서 '쿵쿵바우', '킁킁바우'라고도 한다. 그 바위가 있었던 부근의 마을을 '얼근방우'라고 한다.
122. 세명당?사명당골/사명당곡(四溟堂谷)
사명당(四溟堂)이 머물렀다는 말이 연유되어 부르게 된 이름이며, 사명당에서 그 음이 변하여 '사명당골' 혹은 '세명당'으로 불리어졌다 한다.
123. 등애골?도화곡(桃花谷)
옛날 이곳 계곡에는 복숭아 나무가 많아 꽃이 만발했다가 질 대 낙화가 골에 가득했다 해서 '도화곡(桃花谷)'이라 칭했으나 그 음이 변하여 '등애곡'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124. 머지리?며질리?원지(遠地)?원촌(遠村)
고려말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이 피신하여 머물렀다 해서 불리어진 이름으로 '머지리' 혹은 '며질리'라고 부른다. 또 일설에는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여러 개의 골로 이루어져 세상이 시끄러울 때 은거하기에 알맞는 피난지로써 이 곳에 은거하는 이에게 어디 있는냐?고 물으면 '그저 먼 곳에 있다.' 대답하므로 먼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원지', '원촌', '머질'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마을은 약 150년 전 안동권씨 판관공(判官公)의 후예인 권동규(權東奎)라는 선비가 은거지로 정하고 그의 호(號)를 따서 몽은서당(夢隱書堂)을 열었으므로 사방에서 학동들이 모여 글을 배웠다. 그 중에는 대성(大成)한 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후손들도 대를 이어 훈장 노릇함을 즐겨했으며, 특히 고종(高宗) 임금의 어린 시절에 글을 가르친 스승도 이 마을에서 나신 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안동권씨의 재실이 있으며 그 후손들이 여러 집 살고 있다.
125. 녹감애골?노가므골, 원무덤골: 머지골 안에 잇는 골짜기이다.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에 훌륭한 고을 원님이 있어서 늘 고을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돌아보며 불편함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한편, 한 사람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배려를 하는 것이었다. 송사(訟事)가 있읅 경우에는 항상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송사를 해결하고, 권세나 재물의 힘으로 약한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억누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원님이 선정(善政)을 펴니, 고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원님을 따르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님이 갑자기 병이 걸려서 위독하게 되자 고을 사람들은 모두 원님의 완쾌를 빌었지만 기도의 보람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원님의 죽음으로 고을 사람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컷다. 원님 장례일에는 모두들 조객(弔客)으로 모여들었고, 상두꾼으로 자청해서 나섰다. 상여가 나가자 뒤를 따르는 조객들은 길을 매웠다. 상주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조객으로 장지까지 따라 온 사람들과 상두꾼에게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놋쇠로 된 큰 가마솥을 구해 오도록 하고, 그 솥에다 밥을 짓게 하였다. 놋가마솥이 워낙 컸기 때문에 조객들과 상두꾼의 점심 대접을 넉넉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연유하여 그 원님의 무덤이 마련된 이 골을 '원무덤골', 또 그 큰 놋가마로 조객과 상두꾼을 대접했던 골이라고 '놋가마', 곧 '나가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