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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일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청빈의 삶
청빈, 정결, 순명은 수도자들이 지니고 있는 생활의 규범입니다. 이 세 가지 덕행은 복음 삼덕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덕행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별히 청빈하게 산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덕행입니다. 청빈(淸貧,poverty)은 복음적 권고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단순 소박한 가난을 뜻합니다. 자발적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된 자유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공직자들이 청렴하면서 가난한 것을 청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가난하게 된 것과는 달리, 청렴이 가난의 원인이 될 때만 그 가난을 청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 서민들도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 가난해 질 수 있으나, 불의와 타협할 유혹을 가장 많이 받는 공직자들에게 청렴이라는 말은 더욱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덕과 능력이 있어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를 수 있는데도 그 자리에 앉는 것 자체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사양하거나, 그런 지위에 있는 공직자가 불의와 타협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도 도덕적인 이유에서 타협을 거부하므로 가난하게 되는 사람을 청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청렴한 공직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벼슬을 거절하고 가난하게 산 청빈의 표본인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황희(黃喜)정승과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도 ‘관복(官服)을 장만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하여 청빈의 전형으로 존경받아 왔습니다. 청빈이란 표현이 이미 고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도 청렴한 공직자는 대개 가난했던 것 같으며,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사회에서 청렴한 공직자와 정직한 서민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가난하게 되는 정도는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에 반비례하며, 청빈의 정도와 청빈에 대한 사회적 존경은 그 사회의 부조리에 비례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의로운 서민이나 공직자가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된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불의와 부패가 주로 물질적인 이익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공직에는 항상 부패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공직과 도덕성이 병립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명예롭게 가난한 사람이 존경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동양에서처럼 그렇게 높이 평가되지 않으며, 그런 가난을 감수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보다는 오히려 청빈을 불가피하게 하는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항의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청빈에 대한 존경도 청빈의 원인이 되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간접적인 항의가 그만큼 높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청빈을 강조하는 것은 부조리와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 함께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열망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존경이나 비판은 모두 사회개혁의 중요한 정신적 자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부조리는 청빈에 대한 존경 같은 소극적 방법만으로는 제거되기가 어렵습니다. 청빈을 불가피하게 하는 사회의 무질서는 정직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약자들을 억울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해를 끼치므로 구조개혁과 같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청빈은 공직자들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특히 검소한 생활이나 겸손한 삶은 청빈의 지침입니다. 부지런하게 일하고 열심히 벌어서 잘 나누어 쓰는 생활은 청빈한 삶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것이 스스로 선택한 청빈의 삶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들은 너무 가난을 강조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황님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하느님도 보이지 않고 이웃도 보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되어봐야 가난한 사람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우리는 청빈한 삶을 살고 있나요?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와 하느님의 심판을 깨달아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17,24-29
하느님께서는 24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위로하신다.
25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26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
27 살아서 감사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28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29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축일3월 3일 성녀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 (Teresa Eustochio Verzeri)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지역 : 베르가모(Bergamo)
활동 연도 : 1801-1852년
같은 이름 : 베르제리, 에우스토키움, 테레사, 테레시아
1801년 7월 31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의 베르가모에서 태어난 성녀 테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Teresia Eustochio Verzeri, 또는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는 아버지 안토니오 베르체리(Antonio Verzeri)와 여백작인 어머니 엘레나 페드로카 그루멜리(Elena Pedrocca-Grumelli)의 일곱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베르체리 가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중에 브레시아(Brescia)의 주교가 된 성녀 테레사의 동생은 지롤라모(Girolamo, 히에로니무스)로, 테레사는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딸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에우스토키오(Eustochio 또는 Eustochium, 9월 28일)로 이름지었다.
성녀 테레사는 10세 때에 첫영성체를 하면서부터 수녀가 될 마음을 품었다. 그 후 견진성사를 받고나서부터는 베르가모 대성당의 총대리인 요셉 신부로부터 영성지도와 격려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세 번씩이나 산 그라타(San Grata)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세 번 다 교육을 받는 도중에 나왔다. 그 후에 그녀는 그로모라고 부르는 작은 집에서 소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는데 전념하였다. 이것은 후에 그녀가 세운 수녀회의 씨앗이었다. 성녀 테레사는 1831년 베르가모에서 '예수 성심의 딸들 수도회'(Daughter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를 설립했다.
그녀는 안토니아를 비롯한 비르지니아 시모니 그리고 카타리나 만제노니 등의 도움을 받아 소녀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한편, 단식과 침묵 등을 통하여 힘든 완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성녀 테레사는 요셉 신부의 지도하에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으며, 가난한 어린이 교육, 병자방문 그리고 윤리적 위기에 처한 소녀들의 휴식처 겸 신앙교육, 여성 피정지도 등을 실시하였다. 1841년 성녀 테레사 원장과 그의 동료들은 종신서원을 발했고, 이듬해 베르가모 주교로부터 수도회 규칙서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84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이 수도회를 공식 인준하였다.
성녀 테레사는 북부 이탈리아를 강타한 콜레라에 걸려 1852년 3월 3일 브레시아(Brescia)에서 운명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베르가모의 예수 성심의 딸들 수도회 성당에 모셔졌다. 예수 성심의 딸들 수도회는 그 후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카메룬, 인디아, 알바니아 등으로 진출해서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성녀 테레사는 1946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1년 6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일3월 3일 성녀 쿠네군다 (Cunegundes)
신분 : 동정녀, 과부, 황후
활동 연도 :978-1033/1039년
같은 이름 :구네군다, 구네군데스, 구네군디스, 쿠네군데스, 쿠네군디스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룩셈부르크(Luxembourg)의 백작인 아버지 지크프리트 1세(Siegfried I)와 어머니 헤드비히(Hedwig)에게 아주 어릴 때부터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는 20세에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인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와 결혼하였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뮌헨에 보존되어 있다. 전기작가에 따르면, 결혼 첫날밤에 성녀 쿠네군다는 남편에게 정결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기 위해 동정을 지키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남편인 성 헨리쿠스 또한 평소 그러한 희망이 있었다며 일생 남매처럼 지내되 세상에는 알리지 말자며 동정서원을 발했다. 이런 이유로 “로마 순교록”은 그녀에게 동정녀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다.
당시 황제인 오토 3세가 서거하자 성 헨리쿠스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1002년 바이에른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마인츠(Mainz)에서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 대주교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어 1014년에 성 헨리쿠스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8세(Benedictus VIII)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으며 신앙에 충실하고 교회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그런데 결혼 첫날밤부터 서로 동정을 지키며 남매처럼 지내던 성녀 쿠네군다는 얼마 뒤에 중상자들의 희생물이 되었고, 남편마저 일시적이나마 아내를 의심하게 되었다. 확고히 항변해야 할 처지에 선 그녀는 불에 의한 시죄법(試罪法) 적용을 허용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그녀는 당시 관습대로 뜨거운 불로 달구어진 12개의 쟁기 위로 걸어갔지만 아무런 상처나 화상도 입지 않아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다.
이때 성 헨리쿠스는 잠시나마 아내를 의심한 자신의 잘못을 머리 숙여 사과하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선정을 베풀고, 나라 안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1007년 성녀 쿠네군다는 황제에게 청을 드려서 밤베르크(Bamberg) 교구를 설립하고 대성당을 건립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다. 그러던 중 중병을 앓게 된 성녀 쿠네군다는 병이 나으면 독일 중부 헤센(Hessen) 북부에 있는 카셀(Kassel) 근교의 카우풍엔(Kaufungen)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약속했고, 완치된 후 1021년 그곳에 베네딕투스회 수녀원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24년에 남편인 성 헨리쿠스 2세가 선종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후 성녀 쿠네군다는 나라를 다스려달라는 청을 물리치고 수도 생활에 정진할 결심을 했다. 1년 후 남편의 기일을 맞아 카우풍엔 수도원 봉헌식이 있었는데, 미사 중에 복음이 낭독된 후 왕관과 화려한 옷을 벗은 성녀 쿠네군다는 머리를 깎고 주교로부터 수녀복을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의 재산은 가난한 이들과 성당 건축에 모두 봉헌하고, 지난날 황녀로서 누린 모든 부귀영화를 잊고 비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즐기며 엄격한 단식과 보속의 생활을 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삶을 살았다는 칭송을 받았다. 1033년 또는 1039년 3월 3일 선종한 그녀의 유해는 밤베르크 대성당으로 운구되어 평소 오빠라고 부르던 남편 성 헨리쿠스 옆에 묻혔다. 권력과 부귀영화 속에 교만과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삶을 겸손과 정결한 삶으로 완성한 그녀는 1200년 3월 29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룩셈부르크의 성녀 쿠네군다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성녀 데레사 에우스토키오 베르체리 (Teresa Eustochio Verzeri)와 쿠네군다 (Cunegundes)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