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3월 25일(을묘) 2번째기사/ 각 원과 능의 제물 규정, 전 강원 감사가 아뢴 내용 등을 의논하다.
첫째, 강릉(江陵), 영서(嶺西) 6개 면의 원대장과 속대장에 올라있는 토지 가운데서 묵밭으로 잡아준 것이 348결(結)인데 경자년(1840)부터 조세를 중지시킨 것이 100결이고, 을묘년(1855)에 도로 수확하는 것으로 쳐준 것이 248결이며, 병인년(1866)에 가서 전부 조세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6개 면은 대령(大嶺)에 위치하고 있어 농사짓기에 품만 들고 수확이 적어 흩어져간 백성들이 아직도 모여들지 않아 묵밭이 전혀 일궈지지 못하였습니다.
=> 강릉은 바닷가가 아니라 대령에 위치하고 있었다.
2)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10월 20일(정해) 2번째기사 / 강릉부 관하 영서의 여러 고을에 큰 물이 나다. => 강릉은 큰 홍수가 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에 놓여져 있었다.
강릉부(江陵府) 관하
영서(嶺西)의 여러 읍(邑)에 큰 물이 졌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31명,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민가(民家)가 124호, 개울로 변해버린 논밭이 45결(結) 7부(負) 5속(束)이었다.】
【원본】 37책 33권 78장 A면
【영인본】 2책 573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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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옳고 다른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군요. 그만해야겠군요.
저와 논쟁하시다가 불리하시면 결국 포기하시네요... 명명백백한 내용을 논란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앞으로 관련 자료를 계속 찾아보세요...
영동(嶺東)의 아홉 고을은 모두 바다와 연접되어 있는데 왜선(倭船)이 양양(襄陽)·울산(蔚山) 등지에 정박하지 않고
반드시 강릉·삼척 이 두 곳에 정박하는 것은 아마도 수세(水勢)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
[출처=<조선왕조실록>, 정조 2년(1778년) 12월 23일 2번째 기사]
강원도 관찰사 경세창(慶世昌)이 아뢰기를,
영동(嶺東)의 삼척(三陟)·강릉(江陵)은, 처음에는 한발이 심하더니 얼마 후에는 큰 비가 내려 이 때문에 곡식이 부실하게 되었습니다.
또 영서(嶺西)는 비록 수한(水旱)의 재변은 없으나, 양전(量田)을 하는데 대개 위관(委官)과 서원(書員)들이 모두들 외람(猥濫)해서,
백성이 곤고를 견디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출처=<조선왕조실록>, 중종 11년(1516년) 8월 27일 2번째 기사]
기록이 많다고 사실이 아니고 기록이 적다고 허위가 아니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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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선생님, 뭐든지 그런 식으로 연구하십니까???
기록이 더 많은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을 먼저 증명하세요...
"강릉(江陵)은 영서(嶺西) 지방에 존재하였다"는 주장은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해(誤解)라고요...
김재만 선생님이 위 본문에 제시하신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거짓(허위)인 게 아니라, 그 해석이 잘못된 겁니다. 명심하세요.
명주[溟州: 江陵]는 2군, 4현을 거느린다.
2군은 양양(襄陽)ㆍ삼척(三陟)이고, 4현은 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 歙谷을 합병함]ㆍ울진[蔚珍: 平海를 합병함]이다.
명주 도호부 대사는 영동 안무사(嶺東 安撫使)를 겸한다.
명주 지역이, 동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태산이 둘러 있어, 좁고 막힌 것이 문득 이역과 같으므로 감사에게 반(半)은 영동에 있도록 함이 마땅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동 여러 고을의 일반 정무는 명주 대사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고 오직 큰 사건만 감사(監司)에게 관유(關由)하여, 강계(江界)의 폐4군처럼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출처=<경세유표(經世遺表)>, 군현분예(郡縣分隸)]
"명주[溟州: 강릉(江陵)] 지역이, 동(東)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서(西)쪽으로는 태산(太山)이 둘러 있어"라고 나옵니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강릉(江陵)은 처음부터 줄곧 영동(嶺東)에 속한 지명(地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