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며 마음을 비우게 되면
지금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훤히 보인다.
그만큼 어느 한 분야에서도 그 장느와 파트에
거울을 들이대며 더 맑아지고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란 더 바짝 가까이
마주설수록 더 행복해지며 홀가분해진다.
아마 글 쓰기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역시
이 나이가 되도록 글을 쓰지만 아직껏 나는 매번
실수를 해 벌서는 아이처럼 내 자신에게 솔직히
불만과 부끄러움이 많다. 그래서 늘 주눅과 그것을
벗어남 이 두 사이에서 자주 타협을 일삼는다.
왜냐면 (더 잘 써야지) 하면 그럴수록 본래 서있던
곳에서 갈곳을 잊고 자주 헤맨다
잘됨과 못됨의 높낮이를 과연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우왕좌왕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완숙이 덜된
탓임을 인정함이 옳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냥
꼬임을 담지않은 마음으로 순순히 받아들인다
좋은 글을 쓰기위한 고통이나 고민없이 디룩디룩
살만 찌우는 형극이란 내 사전엔 용서가 되지않으니
어쩌랴.
마음을 비우고 한차원을 더 제대로 Up시키겠다는
겸손의 자세로 다가서면 종종은 좋은 글을 본다.
유불리의 계산을 버리고 첫 출발때와는 완전히 다른
자세와 마음가짐을 준비해 문제를 스스로의 내부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모두 글감의 자원이며
무한창조 가능임을 나는 못난 내자신과 정면으로
마주치며 싸워 배우기도 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한다. 잘못된것을 벗고 버리며
그것또한 더 나은 또 하나로 자리 잡을 때 정말
편안하고도 누구에게나 이로운 그것 다움이
되지않을까?
오래 내가 알던 귀하신
누군가가 (오래된것은 아름답다)란 말로 글을 주고
가셨다.지금 내가 쓰는 내용과는 많이 다른 내용일 수는있으나 나 또한 그것이 제대로이며 올바른 것이면
정말 오래된것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사람들은 사람 이 하나를 두고도 나이들어 아름답다니
말이 되냐고, 세월을 곱하며 낡고 찌그러져간 그런것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냐고 하지만 그것은 시각적인
것과 생각의 척도를 어디에 두며 그 자체를 얼마나
제대로로 이해하며 알고 있느냐에서 달라질 뿐이다.
우리가 써온 이 글 또한 의미를 가진 참의 글이라면 실로
오래된 글이 얼마든 아름다울 수 있다. 봄에 씨를
뿌린 후 수십 수백년을 사계(四季)를 거치며 다듬고
다듬어 다시 씨알을 건지며 하나의 제제(제목)을
가지고서도 수백번 이상을 거듭 새옷을 입히고 다시
벗겨 갈아입힌 그 시간과 노력속에 수만 경험의 무게도
담고 슬프고 아팠던 삶의 애환까지를 안으로 삭히며
그려낸 그 모습과 시간은 변했을지라도 그것에 남은
오랜 기억의 순간들과 수없이 숙성시켜간 성숙이
바로 (오래)라는 이 말속에 있다.
그 말은 그냥 시간만 보낸 세월이 아니다
거기에 함께 보낸 사람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베어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으며
더러는 일생을 바쳐 사랑해온 모든것들이 구석구석
하나의 '축'을 구성해 또박 또박 걸어온 길을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 슬슬 모두를 풀어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함께 해온 시간이 없이 오늘만의 현재이거나
지금의 당장이란 그렇게 농익고 뻐근한 생명의 영감이 없다. 절로 맛들고 숙성되어 온갖 독성을 버리고 가장
순수로만 마주한 서로와 고귀한 색깔이며 하나가 된
것들이 어떻게 와 살겠는가 세상에 널브러진 것들만이
아닐것이다.
이 시간에도
오늘 나와 함께 가고있는 (아름다운 동행), 이들이란
실로 더 여실히 생각해보면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을
함께하며 갈 너무도 소중하고도 귀한 사람들임을
어느 날 문득 나는 깨닫게 되었다.
함께해온 부부나 연인도
언젠가는 떠나기도 한다. 그들 역시 아주 오래된
사람들도 있고 잠시동안의 인연을 손잡고 가다 어느 날
그냥 홀로 가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오래된것은 더욱 아름답다. 거기에는 함께 격려해주며
실제 그만큼의 가슴 뻐근한 흔적이 베어있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말로서 말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모든것으로 그가 거기에 있었기에
흔적으로 남겨둔 그 모든것이
언제까지나 함께 살고있기 때문이다.
더 깊이 더 많이 사랑하면 보일
오늘도
내가 만난 그런 사람들은 그래서 더
너무나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