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땐 뭐하지 PGA 투어의 낮과 밤
美억만장자, 한국산 휘둘렀다…‘은밀한 골프장’ 밀착 취재기
카드 발행 일시2025.03.12
에디터
성호준
PGA 투어의 낮과 밤
관심
FBI 요원처럼 짙은 선글라스를 낀 보안요원들이 출입자를 꼼꼼히 검문했다. 지난 4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주노 비치의 세미놀 골프클럽, 스페인풍의 클럽하우스를 지나니 타이거 우즈와 로리 매킬로이 등이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샷을 가다듬고 있었다.
NFL의 전설적인 쿼터백 톰 브래디와 NBA 스타 셰인 배티어,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인 롭 맨프래드도 보였다. 세미놀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폐쇄적인 명문 클럽이다.
세미놀 골프클럽 클럽하우스. 성호준 기자
전 NFL 쿼터백 톰 브래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서 탬파베이 버커니어스로 이적한 후 세미놀 클럽 회원이 됐다. AP=연합뉴스
이곳에서 ‘세미놀 프로-멤버’ 대회가 열렸다. 우즈 같은 프로 골퍼들과 골프장 회원들의 자선기금 모금 친선대회다. 프로 골퍼들이 많이 사는 주피터와 부자들이 많이 사는 팜비치 중간에 있는 세미놀에서 골프 귀족과 억만장자들이 매년 3월 초 은밀히 만난다. 대회 참가자와 그들의 가족과 지인 등 일부만 들어갈 수 있다. 기자도 골프계 인사(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다)의 초대로 운 좋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날 끝난 PGA 투어 코그니전트 클래식 참가 선수들도 온다. 저스틴 토머스, 콜린 모리카와, 애덤 스콧, 토니 피나우, 리키 파울러, 어니 엘스, 키건 브래들리와 여자 랭킹 1위인 넬리 코다 등도 보였다. 한국의 임성재와 안병훈도 초대됐다. 데이비스 러브 3세는 참가 선수의 수준이 높은 이 대회를 두고 “시즌 첫 메이저대회”라고 표현했다.
놀랍게도 우즈나 톰 브래디 같은 수퍼스타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인을 해달라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유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 그들은 대중과 차단된 공간을 사랑한다.
팜비치는 미국 억만장자들의 겨울 별장이자 은퇴 후 거주지다. 1930년대 대공황 직전 대호황기 부자들이 유럽의 성 같은 저택들을 팜비치에 지었다. 그중 하나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랑하는 마러라고 클럽인데 팜비치 최고는 아니다. 헨리 플레이거 맨션과 반더빌트 저택 등도 팜비치의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팜비치에 위치한 트럼프의 겨울 백악관 마러라고.
마러라고 클럽 내부.
팜비치의 부자들은 이 지역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이름을 딴 세미놀 골프클럽을 1929년 만들어 놀이터로 썼다.
클럽엔 전통적으로 기업인이 많았다. 헨리 포드 2세, 잭 크라이슬러, 로버트 밴더빌트 등이 회원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명예회원이었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자주 들렀다. 윈저 공작은 영국 왕을 포기한 후 세미놀 회원으로 여생을 즐겼다.
폐쇄적인 최상급 클럽치고는 프로 선수들에게 호의적이다. 1938년 마스터스 우승자인 헨리 피카드가 클럽 프로였다. 벤 호건은 세미놀에서 조용히 연습하는 걸 좋아했다. 세미놀은 매킬로이의 아버지 개리 매킬로이에게도 회원이 되게 허용했다. 프로 선수들과 회원들의 자선 친선 라운드를 여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김경진 기자
출전자 명단엔 자산 264억 달러의 HCA 헬스케어 창업자인 토미 프리스티 등이 있었다. 나를 초대한 사람은 “회원 명단을 공개하지는 않지만 세미놀 회원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상상할 수 없는 액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보수 성향 폭스방송 앵커 브렛 바이어도 보였다. 트럼프가 근처에 있지 않은가.
뉴욕 월가의 젊은 벼락부자들도 팜비치에 온다. 그래서 올드 머니(오래된 부자)와 뉴 머니(신흥 부자)들의 문화적 충돌도 있다고 한다. 뉴머니는 팜비치를 미국 부자 동네의 대명사인 롱아일랜드 햄튼을 따 햄튼 사우스(남쪽에 있는 햄튼)라고 부른다.
비틀스의 존 레넌도 팜비치 주민이었다. 여행 왔던 팜비치가 좋아 1980년 초 저택을 샀으나 그해 12월 뉴욕에서 암살당해 따뜻한 남쪽 나라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
세미놀 골프클럽. 중앙포토
세미놀보다 눈부신 골프장은 없을 것이다. 선샤인 스테이트라 불리는 플로리다 바닷가의 얕은 구릉에 펼쳐진 링크스다. 다른 나무는 전혀 없고 드문드문 야자수만 서 있어 햇살이 골프 코스에 유난히 밝게 빛난다. 전 세계에서 그린이 가장 빠른 코스로 알려졌다. 임성재는 “마스터스 그린보다 더 빠르다”고 했다.
미국 억만장자들의 빅5 클럽
퍼트 교습가 스위니는 매킬로이 같은 선수들은 물론, 최고 명문 클럽 회원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 라운드를 할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 그가 알려준 최고 클럽들이다.
“골프를 좋아하는 부자들이 가장 선망하는 클럽 5개가 있다. 만약 그 다섯 개 클럽 모두 회원이 된다면 골프 선수가 4대 메이저와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처럼 최고의 영예다. 그런 사람은 오거스타 내셔널의 체어맨이 될 자격이 된다는 얘기도 한다”고 했다. 20년 넘게 골프 기자를 하면서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내가 알던 기존 명문 클럽과는 약간 달랐다. 미국 골프 기자들도 잘 몰랐다.
미국 억만장자들이 생각하는 최고 골프클럽은 ‘SCABS’다.
시네콕 힐스
S는 시네콕 힐스 골프클럽이다.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고 월가의 큰손들이 회원이다. 1891년 창립한 미국에서 손꼽히는 유서 깊은 클럽이다. 2018년 US오픈 등 메이저대회를 종종 개최한다.
사이프러스 포인트
C는 사이프러스 포인트 클럽이다.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반도에 있다. 바다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클럽으로 꼽힌다. 50여 년간 PGA 투어 대회장이었는데 흑인을 받지 않는 회원 정책을 바꿔달라는 요구를 받고, 이후 대회를 열지 않았다.
오거스타 내셔널
A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이다. 마스터스를 개최하는, 설명이 필요 없는 클럽이다.
버틀러 내셔널
B는 버틀러 내셔널이다. 시카고 인근, 미국 중부의 대표적인 폐쇄적인 클럽이다. 사이프러스 포인트처럼 PGA 투어 대회에 코스를 쓰게 하다가 남성 전용 회원 규칙 개정 요청을 듣고 대회를 열지 않는다.
세미놀
S는 세미놀 골프클럽이다.
부자들의 스윙
주로 50대에서 70대인 회원들의 드라이브샷이 총알처럼 뻗어나가 놀라웠다. 몸에 군살도 별로 없었고 스윙 폼도 근사했다. 실력이 좋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는 경향도 있지만, 세미놀 회원들이 고용한 골프 일타강사들의 능력이기도 하다.
주피터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퍼트 전문 교습가인 스티븐 스위니와 팜비치의 골프 문화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내가 이 지역에 자리 잡은 이유는 프로 선수들 때문이 아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명문 클럽 회원들의 ‘근처에 살면서 레슨을 해달라’는 요청 때문이었다. 억만장자들은 레슨비 신경 쓰지 않고 최고 선생님에게 배우고 그래서 실력도 좋다”고 말했다. 팜비치 인근엔 유명한 피트니스 코치도 많다.
의외로 유명한 스윙 코치는 이 지역에 없다고 한다. 스위니는 “퍼트 교습가는 실내 퍼트 스튜디오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스윙 코치는 넓은 잔디밭이 필요하다. 골프장을 이용해야 하는데 재벌들은 공개된 장소를 싫어한다. 팜비치와 주피터 지역의 골프장들은 워낙 비싸 골프 교습가들이 전세 낼 수가 없다. 그래서 회원들이 유명 코치를 팜비치로 부르기도 하고 직접 가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회원은 전세기 두 대에 가족을 태우고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타이거 우즈를 가르쳤던 부치 하먼에게 사흘간 레슨받고 왔다”고 전했다.
하먼에게 지불한 레슨비는 사흘간 50만 달러 정도일 거라고 스위니는 추정했다.
세미놀 골프장. 드문드문 야자수만 서 있는 특이한 링크스다. 중앙포토
억만장자들 한국 샤프트 쓴다
한국에서 만든 시니어용 장타 샤프트를 쓰는 회원들이 가끔 눈에 보여 신기했다. 클럽 거치대엔 몬스터 샤프트가 있었고, 분홍색 오토플렉스 샤프트를 낀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2021년 매킬로이가 인터뷰에서 애덤 스콧의 핑크색 한국 샤프트 얘기를 하다가 “아버지가 ‘클럽 회원들이 많이 쓰는 그 샤프트를 구해달라’고 했는데 다른 용품사들과 달리 그냥 주지 않아 못 구해드렸다”고 말했다. 매킬로이 말대로 세미놀 회원들이 한국 샤프트를 썼다.
타이거 우즈가 집 근처에서 열리는 PGA 투어 정규대회 코그니전트 클래식과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 나가지 않으면서 세미놀 프로-멤버 대회와 TGL에 출전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공식 대회가 아니라 이벤트에 더 관심이 많다는 비판적인 뉘앙스다.
PGA 투어의 엘리트 프로 골프 선수들은 억만장자들과 친밀하다. 기업들은 선수를 후원하고 VIP 고객과의 프라이빗 라운드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선수들은 최고경영자들과 친분을 맺는다.
우즈에겐 이런 친목 이벤트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일반 PGA 투어 선수에게도 우즈의 네트워크가 필요할 것이다. 그레그 노먼과 필 미켈슨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 간부들과 어울리면서 LIV 골프를 만들어냈다. 우즈와 매킬로이 등은 세미놀 같은 행사에서 억만장자들을 알게 됐고 LIV에 대항할 PGA 투어의 자금을 유치했다.
지미 던. AP=연합뉴스
억만장자의 5개 클럽에 가입한 사람은 12명이라고 한다. 그중 한 명은 세미놀 회장인 지미 던이다. 인수합병 전문 투자은행가다. 파인 밸리, 내셔널 골프 링크스 등 다른 명문 클럽의 회원이기도 하다. 골프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2001년 9월 11일 US 미드 아마추어 챔피언십 예선전에 출전해 뉴욕 무역센터에 있는 회사에 가지 않았는데 그날 빌딩이 테러에 무너졌다. 던은 사망한 동료들의 자녀 76명 모두의 대학 등록금을 지불할 재단을 설립했다. 던은 4일 세미놀 프로-멤버 대회에서 라이언 폭스와 팀을 이뤄 우승했다.
역시 세미놀 회원-프로 대회에 참가한 에드 헐리히는 인수합병 전문 로펌 대표로 2008년 뱅크오브아메리카의 447억 달러 규모 메릴린치 인수를 포함, 730억 달러가 넘는 거래를 자문했다. LIV 출범 후 PGA 투어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다.
인수합병 전문가인 지미 던과 에드 헐리히가 사우디 PIF와의 통합 협상을 주도했다. 헤지펀드로 수백억 달러를 벌었고 뉴욕 메츠의 구단주로 선수 영입에 돈을 펑펑 쓰는 데이비드 코언 등은 우즈와 매킬로이가 만든 TGL의 구단주로도 나섰다.
현대차가 PGA 투어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 프로암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손녀인 17세 소녀 카이 트럼프를 초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카이의 아버지이자 트럼프 정부의 실세인 트럼프 주니어와 오랫동안 얘기했다. 골프 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미놀 같은 초명문 클럽은 코스에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신성한 코스에서는 속세를 잊고 골프에만 전념하라는 의미다. 억만장자들에게 급한 전화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리 매킬로이는 구석에서 슬쩍슬쩍 핸드폰을 꺼내 봤다. 참가자의 지인 중에도 전화를 가져와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기사에 쓸 사진이 필요했고 몇 장 얻었다.
※ 중앙일보(주)는 본 콘텐트에 대한 저작권 등 일체의 권리를 보유하며, 본 콘텐트의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에디터
성호준
관심
중앙일보 골프전문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9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