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朝鮮的古史(조선적고사)-조선의 옛 역사를
今日始踏査(금일시답사)-오늘 답사하니
山川依如舊(산천의여구)-산천은 그대로인데
古人也無看(고인야무간)-옛사람은 보이지 않네
啊哈虛無(아합허무)-아하 허무하구 !
國民的福比(국민적복비)-국민의 행복보다
權力于執着(권력우집착)-권력에 집착함이
古现的無別(고현적무별)-옛과 지금이 다를 바 없으니
농월(弄月)
송시열과 치열한 정치적 대립 한 명재(明齋) 윤증(尹拯) 고택 답사
▲명재 윤증 고택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조선 후기 소론(少論)의 영수(領袖)
명재 윤증((尹拯)1629~1714) 고택(故宅)을 답사하였다.
필자가 고택을 본 소감은 고택이 소박하고 규모가 작을 것이라 상상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고택 규모가 컸다.
왜 그럴까?
“윤증 고택”이라 쓸 때는 “옛 고(古)”자가 아닌 연고(緣故), 사유(事由)라는 뜻인
“인연 고(故)”자를 쓴다.
이유는 명칭은 “명재(明齋) 윤증(尹拯) 고택(故宅)”이라해도 윤증(尹拯)이 이 집에서
한 번도 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윤증(尹拯) 고택의 특징은 대문(大門)이 없다.
대문은 사대부 집 권위의 상징으로 양옆 행랑보다 지붕을 높게 올려서 “솟을 대문”
이라고 하는데 그 대문이 없다.
대문이 없으니 담장도 없다.
휑하게 뚫린 마을길에서 곧장 마당이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도 두루마기 없는 한복처럼 노출돼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정면에서 왼쪽으로 맞배지붕을 얹은 커다란 집 한 채가 보인다.
노성향교(魯城鄕校) 대성전(大成殿)이다.
지금의 국립학교인 당시의 관립학교(官立學校)인 향교(鄕校)가 사대부 집 옆에
맞붙어 있다.
시간이 없어 미쳐 사진을 못 찍었는데 윤증 고택 오른쪽 언덕을 넘으면 공자(孔子)의 사당이 나온다. 직선거리는 80~100m 정도다.
사당 이름은 “궐리사(闕里祠)”라 한다.
“궐리(闕里)”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서남부의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孔子)의
출생지(出生地) 지명(地名)으로 공자(孔子)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714년 윤증이 죽었다.
그리고 니산(尼山-노성)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죽은 송시열 뜻을 따라 그 제자들이 노성(魯城)에 살던 공자 후손과 손잡고
바로 이 파평 윤씨 땅이 있는 권역(圈域)에 공자 사당 궐리사(闕里祠)를 짓는다는 것이다.
노성향교(魯城鄕校)도 궐리사(闕里祠)도 모두 200년 집권 여당, 노론(老論)이
관리하고 회의를 하던 장소다.
노성(魯城)은 지금의 논산(論山)의 옛 이름이다.
윤증(尹拯) 고택(故宅)은
“노론(老論)에 포위당한 소론(少論)의 당수(黨首)의 집”이 되었다.
무슨 이유일까?
윤증(尹拯)의 후손들은
송시열(宋時烈) 노론의 “정치 사찰에 대항해 아예 배짱 좋게 대문을 없애버렸다”고 했다.
“너희들 마음대로 보라”는 뜻이다.
▲윤증 고택의 구조
윤증(尹拯) 고택(古宅)은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최대로 이용한 집이다.
맨 앞에 있는 사랑채 마루에서 뜰을 내려다보면 자연속의 집이라는 느낌이 온다.
사랑채 방문을 열면 바로 밑에는 인공으로 조성한 금강산(金剛山)이 바라보인다.
그 밑으로는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이 보인다.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은 인공 조경의 한 형태로서 보통 연못의 섬이나,
정원의 중심에 만든 자연경치로 “석가산(石假山)”형태를 모방한다.
모두 인공으로 조경(造景)을 한 것이다.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의 무산(巫山)은 중국 사천성(四川省) 무산현(巫山縣)에 있는
파산산맥(巴山山脈) 속의 아름다운 봉우리 이름을 말한다.
눈을 멀리떠면 30리 바깥에는 계룡산의 암봉(巖峰)들이 눈에 들어온다.
인공으로 만든 금강산과 무산십이봉은 가짜산(假山)이요,
계룡산은 진짜산(眞山)의 경치이다.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3대 명산을 모두 감상하게 되어 있다.
사랑채에는 집 주인이 걸어놓은 “도원인가(桃源人家)” 편액이 있다.
“신선(神仙)이 사는 별천지(別天地)”라는 뜻이다.
도원(桃源)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준말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이 세상(世上)을 떠난 별천지(別天地)를 이르는 말이다.
금강산과 무산십이봉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집이므로 무릉도원 같은 곳이라는 의미다.
사랑채 마루 옆에는 “이은시사(離隱時舍)”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세속을 떠나 은둔(隱遁)하며 하늘의 때를 따라서 사는 자연의 집”이라는 뜻이다.
대청마루 뒷문 위에 “허한고와(虛閑高臥)” 글씨가 걸려 있다.
“모든 것이 텅 빈 곳에 한가하게 누워 있다”는 뜻으로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음을 뜻한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어떤 사람인가
윤증(尹拯)의 본관은 파평윤씨고 호(號)는 명재(明齋)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에 책봉된 윤신달(尹莘達)과 우리가 역사에서 잘 알고 있는 윤관(尹瓘)장군을 가문에 둔 명문이다.
전주에 사는 필자의 친구가 윤(尹)씨 인데 간혹 노성(魯城) 윤(尹)씨 자랑을 한다.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이란?
벽면(壁面)의 높은 위치를 뜻하며 삼한(三韓-신라·백제·고구려)에서 가장 임금의
정치를 잘 도운 공신의 칭호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집안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46명이나 배출한 명문가다.
그의 집안에서 시호(諡號)를 받은 인물이 9명이다.
특히 윤증(尹拯-문성공)은 조부인 문정공 윤황((尹煌), 아버지 문경공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3대에 걸쳐 시호(諡號)를 받았다.
※시호(諡號)-제왕(帝王)이나 재상, 유현(儒賢) 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윤증(尹拯)은 외가인 서울 정선방(貞善坊지금의 종로 3가)에서 태어났다.
윤증(尹拯)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7세에 시(詩)를 지을 정도였다.
10세에 “거미를 읊다(詠蜘蟵)라는 시를 지었다.
아래에 소개 한다
蜘蟵結網罟(지蟵결망고)-거미가 매달려 그물을 치니
橫截下與上(횡절하여상)-가로지른 다음엔 위로 아래로 그물을 친다
爲語蜻蜓子(위어청정자)-잠자리에게 충고하노니
愼勿簷前向(신물첨전향)-처마 밑엔 가지 말라 거미줄에 걸릴라
윤증(尹拯)은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조선 후기 정치현장의 뒤에(山谷林下)
은거(隱居)해 있으면서 학덕(學德)을 겸비(兼備)한 선비 정치인이다.
이처럼 역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된 인물을 필자의 짧은 지식과 좁은 견문으로
명사(名士)의 역사적 발자취를 기록한다는 것은 무척 외람된 다는 생각이 든다.
윤증(尹拯)이 내려온 고향 니산(尼山-노성)은 파평 윤(尹)씨 땅이 많았다.
옛날에는 땅이 많으면 부자다.
그런데도 윤증은 작은 초가(草家)를 짓고 살았다.
제자들이 벼슬 없고 덕망 높은 초라한 스승을 위해 집을 지었다.
이집이 현재의 “명재 윤증 고택”이다.
그런데 윤증은 이 좋은 집에 이사를 거부했다.
새로 부임하는 벼슬아치들이 이 초가집 어른인 윤증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윤증(尹拯은 인사온 관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이 관리들이 명재(明齋)와 함께 식사를 한 뒤에 동구 밖 느티나무 근처에 이르면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내곤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음식이 거칠어 소화를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명재는 자기 제사상의 크기를 1.2m를 넘지 않도록 소박하게 차리라고 신신당부하고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이야기 할 때에 충무공 이순 장군을 떠 올린다.
그리고 원균의 모함에 의하여 삼도수군통제사(오늘날 해군총사령관)를 해임당하고
사병으로 강등된 것을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고 말한다.
윤증(尹拯)은 일찍이 과거와 벼슬을 포기했다.
윤증은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17대 효종과 19대 숙종 때까지
공조좌랑,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진선, 사헌부 장령, 집의, 호조참의,
대사헌, 찬선, 이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좌참찬, 좌찬성,우의정 등 수많은
높은 관직을 내렸지만 한 번도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조에 유일하게 “백의정승(白衣政丞)”별명이 붙었다.
조선역사속에서 부자(富者)에 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말할 때
경주최부자, 구례 운조루, 논산 명재 윤증 고택을 떠올린다.
부자로서 상응하는 사회적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사회에서 부자(富者)가 왼만해서는
창찬 듣기가 힘들다.
2019년도 한국 총 예산이 470조 5천억이다.
삼성그룹 산하 관계되는 회사와 약 50만명의 직원이 내는 세금이 약 150조라한다
한해 예산의 약 31%를 차지하는 한국경제의 지대한 영향력의 삼성이지만 국민은
좋은 눈으로 안보고 정치권도 삼성을 손보겠다는 말을 한다.
불경 방등경(方等經)과 법사경(法嗣經)에서
“석가모니는 재물(財物)에 집착하면 열반(涅槃)에 들 수 없다”고 하였다.
신약성경 마태복은 19장 24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富者)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쉬우니라”
고 말하여 부자덕(富者德)으로 먹고사는 종교도 부자를 좋게 보지 않았다.
우리는 절대로 부자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윤증(尹拯) 당시의 논산에서는 양잠업(養蠶業)을 많이 했다.
당시는 뽕나무를 심어 누에고치를 기르는 일은 가정경제의 중심이 되는 주 소득원이었다.
지역민들은 서로 양잠업(養蠶業)과 이에 관련된 일을 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윤증도 넓은 땅에 양잠업(養蠶業)을 하였다.
그는 양잠업으로 지나친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면서
“우리 잡안은 양잠업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니” 가난한 사람이 양잠업을
할 수 있도록 후손들에게 양잠(養蠶)을 금지했다.
그리고 가족에게 당부하기를 굴뚝을 낮게 하여 밥짓는 연기가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 안 띄게 했다.
남들은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우리집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면 가난한
이웃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런 윤증의 고결(高潔)한 사회정신이 선비정신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런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적선(積善)의 결과 경주최부자, 구례 운조루, 논산 윤증
집안은 동학난과 6.25한국전쟁 때에 지리산 공비나 폭도들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성행을 베푼 복이다.
윤증은 1714년(숙종 40) 1월 24일에 85세의 긴 삶을 마쳤다.
병이 위독해지자 그는 상(喪)을 치를 때 중국(청)의 물품을 사용하지 말고,
묘비(墓碑)에는 관직이나 재호(齋號) 선생(先生)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고
“징사(徵士-선비의 뜻)”라고만 쓰라고 당부했다.
평생 동안 징소(徵召-징병과 같음)의 임금 은혜를 입은 것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윤증이 세상을 떠나자 많은 벼슬을 내렸지만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숙종(肅宗)은
아래와 같이 애도시(哀悼詩)를 내렸다.
儒林尊道德(유림존도덕)-유림은 도덕을 숭상하고
小子亦甞欽(소자역상흠)-소자도 일찍이 공경했네
平生不識面(평생불식면)-평생 한 번 만나 보지 못했기에
沒後恨彌深(몰후한미심)-사후(死後)에 한이 더욱 깊어지네
※소자(小子)-이 시에서 소자(小子)는 숙종이 신하나 백성에게 자기를 낮춰서 하는 말이다.
▲윤증(尹拯)과 정치
반드시 사학(史學)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청지역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충청지방 출신 주요 유학자 이름들을 한 번쯤 상기(想起)할 필요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중봉(重峯) 조헌(趙憲),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명재(明齋) 윤증(尹拯),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등이 조선시대에 충청지역
중심에 있었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다.
이글의 주인공인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조선 환국정치(換局政治)의 스타로 불리는
조선 제19대 숙종(肅宗)때의 인물이다.
숙종 때의 당쟁사를 알려면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는다. 왕후가 죽는 국상이 일어나자, 시어머니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가
며느리의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 가지로 주장하는 예송(禮訟) 사건이다.
이때 정권을 잡고 있던 송시열을 중심한 서인(西人)들은 대공복(大功服 9개월 상복)을 주장하였다.
반대파인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을 중심한 남인(南人)은 기년복(朞年服 1년상복)의
복제(服制)를 주장하였다.
현종은 기년복(朞年服)으로 결정하고 서인(西人)의 중심인물들을 처벌하였다.
그해 8월에 현종이 죽고 숙종(肅宗)이 즉위하면서 서인(西人)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南人)들을 등용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서인(西人)이 실각하고 남인(南人)이 권력을 잡은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한다.
그 후 1694년(숙종 20년) 장희빈에 의하여 폐위되었던 인현 왕후 민씨가 복위되어
인현왕후 편인 서인(西人)들이 다시 권력을 잡고 남인(南人)들이 화(禍)를 입었다.
이것을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한다.
마치 이명박이 정권을 잡자 노무현 비리를 조사 중 자살하자
문재인 정권이 이명박 박근혜를 적폐로 모는 것과 닮은꼴이다.
기사환국(己巳換局)-(장희빈 득세 인현왕후몰락)
갑술환국(甲戌換局)-(인현왕후 복귀 장희빈몰락)
을 거치면서 윤증(尹拯)은 55세, 송시열(宋時烈)은 77세가 되었다.
윤증(尹拯)의 일생에서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큰 사건은 송시열을 만나게 된 것이다.
조선 예학(禮學)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한 사람은 김장생(金長生)과 그아들 김집(金集)이다.
김집(金集)은 윤증(尹拯)의 스승이다.
윤증(尹拯)은 스승의 권유로 22세 연상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만나게 되었고 윤증(尹拯)은 송시열(宋時烈)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정치적 운명으로 불행이라 할 수 있다.
송시열(宋時烈)은 조선역사가 인정하는
중국 송대의 유학자(儒學者)인 주자(朱子)을 신봉하는 주자학파(朱子學派)다.
심지어는 주자(朱子)의 이름을 본떠서 “조선의 송자(宋子)”라고 하였다.
지난번 필자가 화양구곡을 소개 했는데 화양동(華陽洞)은 주자학(朱子學)과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만동묘(萬東廟)를 세울 정도로 명나라 사대주의자이며 주자학파(朱子學派)다.
윤증(尹拯)과 송시열(宋時烈)간에 틈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막강한 권력 위치에 있었던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이 갈라서는 분기점(分岐點)이 된 일이다.
송시열이 윤휴(尹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유교(儒敎)를 어지럽히는 도적(盜賊)이라는 뜻으로,
교리(敎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으로 유교(儒敎)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말한다.
윤휴(尹鑴)는 박세당과 같이 송시열(宋時烈)의 같은 서인(西人)이었다.
윤휴(尹鑴)가 유학(儒學)의 해석을 주자학(朱子學)과 다르게 하여 학문논쟁이 치열하였다.
또한 송시열은 북벌(北伐)을 반대하였지만 윤휴(尹鑴)는 찬성파였다.
송시열(宋時烈)과 윤휴는 학문 면에서도 라이벌이었다.
송시열이 주자학(朱子學) 유일주의를 주장하고 기틀을 세웠다면,
윤휴는 공자와 맹자의 원전(原典)으로 돌아가 자유롭고 독창적인 학문을 모색했다.
윤휴는 지행(知行) 합일설의 양명학(陽明學)에 가까웠다.
쉽게 말하면 주자학(朱子學)은 보수주의고 양명학(陽明學)은 진보주의다.
이런 윤휴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절친한 친구요 정치의 동반자였다.
“기유의서(己酉擬書)”라는 것이 있다.
조선 현종 때에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가 친구 송시열(宋時烈)에게 조언하기
위해 써 두었던 편지로, 그의 사후에 공개되어 오히려 송시열과 아들 윤증 사이에
불화를 일으킨 내용이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宋時烈)은 막역한 친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송시열은 평소 자기의 학문인 주자학을 비판한 윤휴(尹鑴)를 평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비판했다.
윤휴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절친한 친구였다
송시열은 예송논쟁(禮訟論諍)에서 의견을 달리한 윤휴를 가혹하게 처리하였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윤휴와 친구 교제를 끊을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이를 거부하고 중도적 태도를 취했다.
오히려 송시열에게 친구로서 충고하는 서신을 써놓고 세상을 떠났다.
편지 내용은
“남인 윤휴와 허적을 나쁜 사람(讒賊)이라 하지 말고 같은 사림(士林)으로서 잘
소통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윤선거가 죽던 기유(己酉)년에 썼기 때문에 “기유의서(己酉擬書)”라고 부른다.
“신유의서(辛酉擬書)”가 있다.
신유년에 윤증(尹拯)이 송시열에게 어떤 일을 비교한 글로서
송시열이 평생 높이고 따른 사람은 주자(朱子)였지만 정작 그의 행동은 주자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들어 송시열의 주자의 학문 근원(根源-源)과 행동하는
학술(學術)에 대해 비판한 내용의 글이다.
윤증은 박세채(朴世采)의 만류로 송시열에게 편지를 부치지 않았으나,
그 후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宋淳錫)이 몰래 베껴서
송시열에게 전하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신유의서(辛酉擬書)”로 인하여 윤증(尹拯)과 송시열(宋時烈)사이는 큰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이 갈등을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르며,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당(分黨) 계기로 작용했다.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있다 이 말뜻은
당시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던 송시열과 그의 제자와
충청도 논산의 옛 지명인 니산(尼山)에 살았던 윤증과의 제자들 사이의 시비(是非)로
“회(懷)자와 니(尼)”자를 따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하였다.
결국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인해 불화를 빚어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윤증(尹拯)을 역사속의 스타 인물로 만든 것은 조선 사색당파(四色黨派)인 노론과 소론의 결별(訣別)이었다.
이때가 1673년 윤증이 44세 때이다.
당시 조선 정치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의 결별로 당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숙종 9년 계해(1683)5월 5일(병오) 조선왕조실록 내용이다.
숙종실록 1683년 5월 5일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윤증(尹拯)이 숙종의 부름을 받고 과천(果川)에 머무르면서 상소를 올리기를,
화(禍)를 만나 원통함을 품고 감히 명(命)을 받들지 못할 사정이옵니다 하니
숙종이 승지(承旨)를 보내 타이르면서(敦勉) 궁궐로 들어오게 하였다.
윤증이 또 상소(上疏)하여 사양하였고, 숙종이 잇달아 사관(史官)을 보내
타일러(曉諭) 불러오게 하였으나, 윤증은 거절하고 고향 노성 집으로 돌아갔다.
윤증이 과천(果川)에 머무를 때 박세채(朴世采)가 가서 만났는데,
윤증이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대궐로 입궐하라는 명이 있지만 조정에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다.
1.남인(南人)의 원한(怨毒)을 화평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이고,
2.삼척(三戚-숙종의 외척,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권력을 제지(制止)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이며,
3.우옹(尤翁-송시열)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윤증은 이미 송시열(宋時烈)과 갈라설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송시열을 가까이 하면 뒷날의 재앙(災殃)과 복(福)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다.
그날밤 과천에서 박세채와 같이 자면서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모두 송시열을
비판하는 말이었으며, 또 박세채에게 반드시 송시열과 맞버티어(角立) 굴복(屈服)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5년 뒤 과격파(過激派)인 송시열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약(賜藥)을 받았다.
반면에 온건파(穩健派)인 윤증은 30년을 더 살아 85까지 살았다.
오늘날 자유민주의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헌법 제8조 ①항~④항까지 정당의 설립과 운영 이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별별 핑계를 대면서 정치보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왕조의 당쟁정치(黨爭政治)와 환국정치(換局政治)와 다를 것이 없다.
조선 후기의 정치상황은 3당 체제였다.
집권여당인 서인계(西人系) 노론(老論) 충청 호남 중심
야당인 남인(南人) 영남 강원 중심
그 중간에 중도노선인 소론(小論)이 있었다.
이 3당 구도는 숙종 말엽인 17세기 후반부터 시작해서 19세기 후반 고종까지 대략 20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유지됐다.
노론(老論)은 200년 권력을 독점하는 장기집권을 하였고, 남인(南人)들 중에서도
특히 경상도 남인들은 200년간 만년 야당을 하며 중앙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말단 고을 원자리 하나도 차지 할 수 없었다.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인 고산 윤선도는
전남 해남 사람이지만 영남쪽의 남인(南人)이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자주 하여 벼슬에서 배제 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 호남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호남은 조선왕조와 신생 대한민국에서 권력에서 소외 됐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를 읽지 않고 대단히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주축을 이루는 서인(西人)과 노론(老論)계가 조선왕조 말까지 약 200여년을 권력을 잡고 영남지방의 남인계는 철저히 권력에서 소외된다.
그후 5.16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정권이 18년간 권력을 잡는다.
호남의 200년 권력, 영남의 18년 권력 !
그런데 역사를 읽으면서 주목할 것은 조선왕조때는 지역감정은 없고 당파 대립
이였다
지금 정치는 지역감정이 심하다.
조선왕조보다 지금의 정당정치가 매우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인(西人)에서 갈려 나온 소론(少論)은 노론(老論)의 경륜도 지니고 있었고
아울러 야당인 남인(南人)의 설움도 이해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중도통합 노선에 가까웠다.
이 소론(少論)의 기초를 다졌던 지도자가 바로 명재(明齋) 윤증(尹拯)이다.
농월
첫댓글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신 선생님의 글 열심히 열심히 두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금년에도
건강하시구요.